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 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권력의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다스리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이름은 권력을 갈망하는 권세자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실 때 세상의 모든 질서와 기초가 제 자리를 찾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탐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좋은 것입니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기 원하고 누구나 돈을 자랑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입니까?
사회에 공헌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직업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좋은 직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좋은 배우자입니까?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좋은 배우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현실입니다.
코넬 대학교 의대 교수였던 리소크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다른 사람이 얼마나 버는지를 알아낸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에서는 돈이 힘과 영향력과 권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돈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갈망하기도 하고 돈이 없을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너무 돈을 밝히는 것은 아닌가 죄의식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돈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많다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매년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질병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큰 병을 앓게 되어서 치료받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분이 조언하기를 너무 한 병원만 믿지 말고 돌아가면서 건강검진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다고 부부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자녀와의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돈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돈을 단순히 교환의 매개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환 수단으로서의 재물과 영적인 속성을 가진 재물을 구분하셨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똑같이 재물이라고 나오지만 헬라어는 다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깁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멘,
여기에 사용된 재물은 화폐가 아니라 영적인 속성을 가진 맘몬입니다.
맘몸은 주고받는 화폐가 아니라 하나님과 경쟁 관계에 있는 우상 만들어진 신입니다.
맘몸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겨서 더 많은 것을 탐내게 합니다.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유혹을 한마디로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로마 제국의 중요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뉴욕쯤 해당될 것입니다.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고 화려한 문화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뉴욕에 갔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맨하탄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졌는지 모릅니다.
저도 멋진 옷을 입어야 할 것 같고, 멋진 차를 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화려한 도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이니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아멘,
화려한 이방 문화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이방인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의 방식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영어로 보니까 futility of their thinking 이었습니다.
그들의 허망한 생각이었습니다.
생각이 허망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 번째로 공허하고 의미 없는 생각입니다.
생각의 중심 목적, 방향이 없습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유행에 민감한 사회입니다.
뭐가 하나 유명해지면 모두가 다 그것을 따라하기 원합니다.
뭐 얼마 전에는 두바이 쫀득 쿠키가 유명해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먹었다고 하죠.
한 달 전에 금요 기도회 설교를 하고 나왔는데 한 초등학생이 저에게 두쫀쿠를 주었습니다.
그 귀한 것을 저에게 주니까 제가 괜찮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그 착한 학생이 목사님 꼭 드시라고 해서 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두쫀쿠의 인기가 식었다고 합니다.
그 재료를 대량으로 구입한 사람이 손해를 볼 정도로 인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유행에 민감하십니까?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것이 있으면 꼭 해보기를 원하십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은 사람들을 조종하기 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조종하기 원합니다.
제일 조종하기 쉬운 사람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에 따르면 마음이 허망한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은 허망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생각의 중심, 생각의 목적, 생각의 방향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살았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이 허망하다는 것은 가치가 없고 열매가 없는 생각을 뜻합니다.
무엇이 유익한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근시안적인 생각을 가지고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잠깐 반짝 노력해서 열매 맺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사가 되려면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 최소 10년이 필요합니다.
전문 셰프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7년에서 10년 동안의 실무 수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1년 만에 딸 수 있는 전문 자격증이란 없습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오랜 기간 동안 수고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이 가치 있고 어떻게 열매 맺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허망한 사람은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10년 뒤의 모습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나를 즐겁게 할 것을 찾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허망한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유익하고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들의 이성은 어두워지고 그들의 감성은 굳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아멘,
허망한 생각을 따라갈 때 나타나는 결과는 두 가지입니다.
총명 이성이 어두워지고 마음 감성이 굳어집니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영적 무지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길이 생명으로 가는 것인지, 어느 길이 사막으로 가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성에 문제가 생기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감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굳어진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분별력이 필요하고 공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이성을 가져야 하고 올바른 감성을 가져야 합니다.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아니 온전한 대화를 위해서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허망한 생각에 빠진 사람은 올바른 이성과 올바른 감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그 결과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 대신 하나님과 단절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생수의 근원 대신 하나님을 떠나면 생수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허망한 생각에 빠지면 이성과 감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상태였습니다.
저는 현대 사회가 바로 이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허망한 생각에 빠져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열매 맺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즉각적인 욕망을 따라갈 뿐입니다.
생각의 중심, 생각의 목적, 생각의 방향이 없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은 우울합니다.
미국의 영화 배우 짐 캐리를 잘 아실 것입니다.
코미디 연기로 유명한 배우인데,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두 번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유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그러면 그들이 꿈꾸었던 모든 것이 정답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캐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안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를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성공한 배우이고 부자이고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럼 그가 말하기를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데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은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망한 생각에 빠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보다 눈에 보이는 부와 명예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깨닫습니다.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 평생을 걸고 어떤 꿈을 향해 달려왔는데,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이것은 현대 사회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입니다.
요즘 인문학 분야에서 많이 팔리는 책이 있는데 바로 쇼펜하우어의 책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대표적인 염세주의자입니다.

인생을 고통으로 여기는 철학자였습니다.
인간의 욕구와 충동은 결코 만족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때로 인생의 허무함을 실전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인생의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데 이것을 실존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는 것보다 전도서를 읽는 것이 100번 낫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의 글을 읽으면요.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영원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의 글을 읽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입니다.
그런데 왜 현대인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만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200년 전에 위대한 철학자도 그 공허함을 느꼈기 때문에 거기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허망한 생각에 빠지면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면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말할 수 없죠.
그러면 우리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염세주의에 빠질 것입니다.
원래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하는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할 뿐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탐심'입니다.
탐심은 단지 좋은 것을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탐심은 절제를 잃어버린 욕심입니다.
무언가를 갖고 싶은 그 마음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마음이 절제를 잃어버리고 나를 집어삼키면 그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본문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와 같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허망한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감각 없는 자가 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만족과 절제에 대한 감각을 다 잃어버립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러한 존재가 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는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는 방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권투 선수가 가드를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권투할 때 딱 가드를 올려서 방어해야죠.
권투를 하다 보면 때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권투 선수가 가드를 내린다는 것은 경기를 완전히 포기한 거죠.
나 가만히 있을 테니까 마음대로 날 때리라는 신호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방탕에 내어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잘못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고 완전히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죄와 싸우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보니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합니다.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돈의 유혹을 받고 성적인 유혹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자 하는 유혹도 받습니다.
그럴 때 그 유혹에 자신을 내어주면 안 됩니다.
죄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은 가드를 내린 권투 선수와 같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모든 더러운 욕심으로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방탕의 끝은 무절제한 욕심 곧 탐심입니다.
여러분 탐심은 평범한 죄가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역과 악한 정역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아멘,
성경은 왜 탐심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말씀할까요?
좋은 것을 보고 갖고 싶은 마음이 왜 문제일까요?
성경에 보면 최초의 인간이 죄에 빠진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 보니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그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세 가지 행동을 했죠.
보다 탐내다 취하다 세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동사 중에서 핵심은 가운데 있는 탐내다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탐냈습니다.
그 탐심으로 말미암아서 최초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십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지막 10번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20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내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아멘.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이웃이 가졌어도 그것을 탐내면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죠.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가르쳐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가 건강한 마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는 고집을 부리게 되고 떼를 쓰게 됩니다.
조금 더 크면 화를 내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됐을 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계속해서 상기시켜야 합니다.
내가 원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탐심을 방치하면 그것은 점점 더 커져서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탐심에 대해서 심각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보니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는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온 장면입니다.
지금도 유산을 가지고 형제 간에 다투고 소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왔을 때 주님께서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하시면서 영어로 보니까 be on your guard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드를 올리라는 말입니다.
권투 선수가 경기를 포기하면 가드를 내린다고 했죠.
그렇게 하지 말고 가드를 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이 우리를 조종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가드를 올려서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탐심으로부터 보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의 마음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은 옛 사람과 세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세 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후반부에는 동사가 3개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옛 사람을 벗으라.
그다음에 새롭게 되라.
마지막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중간에 해야 할 일이 나오죠.
무엇입니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새롭게 되어야 할까요?
본문 23절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멘,
세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심령이 헬라어로 누스이고 영어로 마인드입니다.
직역하면 생각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할 때 우리가 세 사람을 입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혼미하게 했던 이 세상의 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신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혼미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은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아멘,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은 허망한 생각을 한다고 했습니다.
허망한 생각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신 사탄이 그들의 생각을 혼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입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새롭게 된 생각은 살아있고 역동적인 생각입니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생각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 정신입니다.
여러분 실제 나이와 정신적 나이가 똑같지 않습니다.
실제 나이는 젊어도 정신적으로 나이가 든 경우가 있습니다.
목표 의식도 없고 도전 정신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그런 마음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제 나이가 많아도 정신적으로 젊은 경우가 있습니다.
역동성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회심, 생각의 회심, 그리고 지갑의 회심이 필요하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회심, conversion 은 신학적인 의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 죄의 길로 가다가 올바른 길, 의의 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회심은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심한 이후로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내 욕망대로, 내 탐심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의 회심이 필요하고, 생각의 회심이 필요하고, 그리고 지갑의 회심도 필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면 우리가 돈을 쓰는 방식도 새롭게 변화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갖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지 않습니다.
탐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내가 살 수 있는 최고의 것, 최고급의 것을 살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살 수 있는 최고급보다 한 단계 더 위에 것을 살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각 사람의 수입에 맞는 자동차의 가격이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살 때 월급의 6배 정도로 사는 것이 적당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의 월급이 500만 원이라면 적당한 차량 가격은 3천만 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5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3천만 원보다 좋은 차를 탈까요?
나쁜 차를 탈까요?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더 좋은 차를 탑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모두가 다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도 그렇게 하고 내 이웃도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나만 검소하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탐심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내가 일해서, 내 능력으로 돈 번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보니까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과 주권을 인정해야지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여름 휴가 때 어떤 사람의 별장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편하게 별장에서 쉬다 가라고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별장에서 쉬면서 우리가 함부로 그곳에 있는 물건을 만지지 않습니다.
내 것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죠.
다른 사람의 소유이고 단지 나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배려를 받았을 뿐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친절과 사랑에 감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하나님의 집이고, 우리가 타는 자동차는 하나님의 자동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잠시 동안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탐심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장난감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나의 진정한 선은 다른 세상에 있고, 나의 유일한 보물은 그리스도 뿐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10살 때 아꼈던 장난감을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20살 때 소중하게 여겼던 전자제품을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이 모든 장난감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선은 다른 세상, 천국에 있고, 우리의 유일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지려는 탐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보물 되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live/lGtfZ7o_Eug?si=EiREfFDKw8R-QkW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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