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3월 15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3. 15. 22:57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면 인격이 되어 갑니다.
물질인 우상을 예배하면 물질화되어 갑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비인간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비인격적인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비인간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사람은 인간성을 잃고 점점 더 물질화되어 갑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형상만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통 이데올로기도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오늘은 전통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전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통은 좋은 것입니까?
안 좋은 것입니까?
전통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회적 관습과 규범 문화를 의미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전통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요즘같이 이주민이 많은 글로벌 시대에 한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좋은 전통입니다.

 

또한 전통에는 선조들의 오랜 지혜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 음식은 한국 사람들에게 잘 맞는 건강식입니다.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췌장의 크기가 12% 정도 작고 인슐린 분비가 36% 적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이 서양인들처럼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소화 능력과 인슐린 분비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인들처럼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인해서 최근 한국인의 당뇨병이 크게 늘었습니다.
한국의 음식 문화에도 우리 몸에 맞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전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통을 사랑하는 마음이 국가를 약하게 만든 적은 없었으며, 그것은 오히려 위기의 때에 국가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은 반드시 나타나야 하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전통은 큰 힘을 발휘합니다.
강력한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킵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위기 앞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영국을 하나로 통합시켰습니다.
그런데 고착화되고 굳어진 전통은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항상 해왔던 방식대로 하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통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통주의자들은 문제의 해답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좋았던 그 과거의 방식대로 하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의 해답이 과거에 있을까요?
아니면 미래에 있을까요? 

문제 사안마다 다를 것입니다.
전통주의자는 과거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혁신주의자는 미래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과거 영국이 세계를 주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영국이 힘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예전 같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인재들이 미국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2025년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글로벌 100대 기업 중에서 영국 기업은 2개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반면 미국 기업은 38개나 있었습니다. 

과거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전통을 사랑하는 마음과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는 마음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기존 사회는 전통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편안하게 느끼는 안전지대 안에 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와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접촉하셨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기준으로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직접 만져서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인과 세대들과 가까이하셨습니다.
이들 역시 율법의 기준으로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 그를 배신하거나 그를 비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이렇게 존중해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 1절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아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이 율법과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과 더불어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 오럴 트레디션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장로들의 전통이라고도 나오는데, 율법이 규정하지 않은 수많은 디테일을 강조했습니다.
주로 정결 의식에 관한 법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토록 율법과 전통에 집착했을까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세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것이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의 후원으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이것이 기원전 516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제1 성전과 스롯 바벨의 성전, 제2 성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1 성전에 비해서 제2 성전은 작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서에 보면 솔로몬의 성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성전을 보고 대성통곡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작고 초라한 성전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2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봉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 성전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성전 건물은 완성했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와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이때 등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2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를 제도화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도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조직과 공동체에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제도가 있습니다.
당회가 있고 위원회가 있고 또한 재직회가 있습니다.
제도는 필요한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도화는 나쁜 것입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 전통과 규칙에 없는 일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해왔던 사역만 하게 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그 안전지대 안에만 머무르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교회는 점차 가라앉게 될 것이고, 젊은 세대가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자발성이 있고 역동성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유기체를 전통과 규칙으로 통제하면 안 됩니다.
제도화된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 학교 사역, 청년부 사역을 모두 다 통제하려고 한다면 역동성이 사라지고 창의성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76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입니다.
세계 선교에도 역동적이고 청년부도 역동적이고, 교회 학교도 역동적입니다.
교육과 훈련도 뜨겁게 하고 있고, 전도 대화, 전도회도 역동적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76년 된 교회가 역동적일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들고 안전지대 밖으로 기꺼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규칙을 앞세워서 새로운 사역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규칙과 절차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법으로 만들어서 지켰습니다.
그중에는 시장, 마켓에 다녀와서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이방인들과의 접촉으로 더러워진 손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은 우리만 거룩하기 때문에 더러운 이방인들과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교법에 따라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제자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본문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순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 전통을 지키지 않는지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아멘, 

예수님께서 이사야 29장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의 특징이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우상과 같이 변해서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 역시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척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어떤 우상을 섬기고 있을까요?
그들이 어떤 형상에 절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에 온 마음을 다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전통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그레고리 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우상 숭배가 발전하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예배를 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더 존경하고 따름으로써 우상숭배를 범하였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에 보이는 형상을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돈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운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과 전통의 관계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개신교와 카톨릭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개신교는 성경을 절대적인 권위로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사역에 있어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카톨릭은 어떨까요? 

카톨릭은 성경을 안 믿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성경을 믿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에는 두 가지 권위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과 전통입니다. 

가톨릭에서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믿지만 전통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없는 내용이지만 전통에 따라서 지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에 있을 때 8월 15일이 공휴일이었습니다.
8월 15일이면 광복절인데 부룬디도 그날 독립했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8월 15일이 성모 마리아 승천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휴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처럼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카톨릭 전통에 따라서 그렇다고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성경에 없는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성인들 세인트의 유골을 신성하게 여긴다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로마에 있는 카타콤에 간 적이 있습니다.
카타홈은 로마 시대의 지하 무덤이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살던 곳이었습니다.


카타콤은 이제 지하 무덤이니까 유골이 이제 많이 있었겠죠.
저희를 인도하는 이탈리아 가이드가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절대로 카타콤에 있는 유골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이해가 안 됐죠. 

아니 도대체 누가 이 유골을 가져갈 것인가 알고 보니까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은 성인의 유골을 원했습니다.
거기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복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 어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성인의 유골을 가지면 신성한 힘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카톨릭의 전통에 따라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권위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합니다.
저는 이것이 개신교 최고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황 무오설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얼마든지 목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여러분이 저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제가 조금 섭섭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담임 목사가 항상 옳은 것 아니죠?

당회가 항상 옳은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만이 항상 옳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리더는 전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신실한 리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범한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 

전통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8절과 9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땅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전통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에 대해서 항상 유의하게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의 전통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전통은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미국 교회 안에 성조기가 있습니다.
그것도 본당 앞쪽에 강대상 옆에 있습니다. 처음에 이걸 보면 조금 어색할 수 있죠.


왜 굳이 국기를 본 땅 앞에 두는지 어색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은 국교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미국의 국교가 아닙니다.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당 앞쪽에 성조기를 놓았을까요?
알고 보니까 1차 대전 때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자는 의미로 이러한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예배 순서에 대한 전통도 있습니다. 

헌금 순서를 설교 전에 할 것인지 설교 후에 할 것인지 교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헌금할 때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경우도 있고, 들어오면서 헌금하며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딱 한 가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 무엇인지 리더들이 함께 기도하고 논의해서 정하면 됩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중세의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일의 사랑을' 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본질에는 일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 구원에 대한 교리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회는 이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인 이유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얼마든지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예배 중에 헌금 순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가만 불러야 하는지, 복음서가 불러도 되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각 교회에서 정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전통은 현재보다 과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문제의 해답이 과거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GK 체스터터는 전통을 가리켜서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라고 불렀습니다.


멋진 표현이죠.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어떤 사안에 대해서 투표를 하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포함해서 투표하는 것이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G.K.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비록 하인일지언정 좋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알려준다. 전통은 우리에게 비록 우리의 아버지일지언정 좋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라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신분과 상관없이 좋은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전통은 나이와 상관없이 좋은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과거의 지혜로부터 배우려는 태도가 전통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통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성경과 전통은 절대로 동등한 권위가 아닙니다. 

성경은 최종 권위이고 전통은 그다음 권위입니다.
모든 문제의 답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과거를 미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떠한 문제를 맞이한다면 과거의 답이 있을까요?
미래의 답이 있을까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됐는데 과거의 답이 있을까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전성기가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이제 앞으로는 좋은 날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전성기가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 최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과거를 미워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일을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동기를 다 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전통을 강조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전통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당히 과격한 표현이죠. 마태복음 23장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아멘, 

회칠한 무덤이란 아름답게 장식된 무덤을 뜻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되어도 무덤은 무덤입니다.
무덤 안에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의 뼈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격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숭배하게 되면 그 결과는 물질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신실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주님은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2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아멘.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아 내가 겉으로 보기에 깨끗하니까 내가 정말로 깨끗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탐욕, 교만, 음란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말과 종교적인 행동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악은 반드시 언젠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휴대폰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고받은 모든 전화와 문자와 카톡을 다 공개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본 모든 영상을 다 공개할 수 있으십니까?


최근 AI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제품이 맞춤형 광고로 바로바로 올라옵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우리가 휴대폰으로 보는 모든 정보를 AI가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고받은 카톡 이메일 내용을 가지고 AI가 우리를 협박할 수도 있습니다.
이 내용을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회사에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AI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integrity  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integrity  가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바깥에서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을 만날 때나 나보다 낮은 사람을 만날 때나 똑같은 모습으로 대합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공개해도 마음에 거릴 것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integrity 를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AI 시대에 빛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AI가 협박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협박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아멘.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외식이 헬라어로 hypokrites(휘퍼크리텐스트) 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 배우를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전문 배우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음란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옳게 보이려고 열심히 연기를 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 마음에 없는 행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삶을 살아갔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위선을 포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전통은 우리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입니다.
남자가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거죠.
농경 시대에는 이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남자가 바깥에 나아가서 농사를 짓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에는 이것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부부가 함께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남자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일을 합니다. 

부부가 함께 일을 하니까 집안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대부분의 집안일은 여성들이 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바깥에서도 일하고 집 안에서도 일을 합니다.
일을 두 배로 많이 하는 거죠.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전통이 아닙니다. 

남성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죠.


이와 똑같은 모습이 바리새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8절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오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그들의 종교적 권한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유익을 지키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전통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전통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과 같이 변하여서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에 집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계명에 집착한 나머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사람의 전통 안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아멘, 

율법의 완성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의 완성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전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kuLbrSUqi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