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왜 문제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영광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돈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 모든 우선순위가 무너졌습니다.
포스트 모던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절대 진리와 규범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속이 좁고 이기적인 그런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질투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우상숭배를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하지 말라고 한 그 일을 곧바로 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니까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영원히 당신만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다가 이 남자가 이 군대에 가게 됐습니다.
지금이야 뭐 군대에 가서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죠.
연락이 뜸하고 마음이 멀어지면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군대에 간 지 일주일 만에 새로운 사람을 사귄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군대에 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곧바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최소한의 도리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행동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들은 곧바로 그 말씀을 어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의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은 금 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절대 우상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며칠이나 되었다고 왜 그 말씀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도대체 우상숭배는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요?
우상숭배 금송아지는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본질과 매력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든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보이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의 우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랫동안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도 등장하지만 나중에 열왕기에도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뉘어진 이후에 북이스라엘에는 항상 금송아지 우상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부터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도대체 금송아지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서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애굽에서 시내산까지 오는데 3개월 걸렸습니다.
수십만이 넘는 무리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이동을 잘했습니다.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규범으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의산 꼭대기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진영을 떠난 지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에 빠졌습니다.
모세가 자리를 비웠다고 왜 불안해 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지칭하는 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했습니까?
누가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까?
모세가 내렸습니까?
하나님께서 내리셨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내리셨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모세를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모세도 믿었지만 모세를 더 믿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모세는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목사를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교회를 믿으십니까?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목사를 믿고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요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의 대리자였던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입니다.
아론은 사람들에게서 금귀고리를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 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멘.
아론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와 함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리더가 왜 이런 죄를 행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론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 앞에서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중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은 이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렇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잠언 29장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아멘.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요구를 따라가면 올무에 걸린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론의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 앞에서 그는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대중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통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죠.
포퓰리즘을 따라가는 리더는 원칙과 철학이 없습니다.
대중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뿐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손해가 되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 좋아하면 곧바로 추진합니다.
그렇게 해서 표를 얻고 권력을 얻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포퓰리즘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울 왕이 있습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요 모든 백성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환호가 사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왔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지 군대의 사기가 올라가는데 사무엘이 늦게 와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사울 왕이 직접 자기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는 레위인만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 왕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요?
아론과 똑같은 이유입니다.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환호를 따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대중의 환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우상숭배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중의 환호를 따라가는 사람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중의 뜻은 항상 옳을까요?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대중의 뜻도 타락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리더는 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 비전의 원칙이 있는지, 일관성이 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대중의 환호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유하는 리더는 올바른 비전을 제시합니다.
올바른 비전이란 올바른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일관성이 있는 비전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대중의 환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앞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에게 번제를 드리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축제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멘.
우상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번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이 아주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 번제가 무엇입니까?
번제는 재물 전체를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영어로 burnt offering 입니다.
성경의 모든 제사가 재물 전체를 불태우지는 않습니다.
화목제의 경우에 내장을 덮은 기름만 태우고 남은 고기로 제사장과 그 제사를 드린 가족들이 함께 나누어서 먹습니다.
그런데 번제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불로 다 태웁니다.
번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온전한 제사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번제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레위기 1장 4절에 보면 번제를 드리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번제의 의미는 속죄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이 재물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이 재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속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에게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에게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우상에게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을까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상은 말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적하는 우상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하박국 2장 18절에 보니까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기면 무엇이 좋을까요?
내 마음대로 조종하기에 좋습니다.
내 욕망을 투영하기에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매력입니다.
세계적인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사를 위해 일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을 제한하고 축소시키고 통제하려고 한다' 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영어 단어 중에서 'domesticate'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면 '동물을 길들이다 가축화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물을 잡아서 울타리 안에 가두고 사람에게 순응하도록 하는 그 과정을 가리켜서 domesticate 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히 무한하신 하나님을 domesticate 할 수 있을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두고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domesticate 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가 만든 틀 안에 가두고 오로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 안에 있는 지니처럼 하나님을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두고 내 소원을 성취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고,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아멘. 한글 성경은 '방자하다' 라고 했는데 영어로 보니까 'out of control' 입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날뛰고 있기 때문에 절대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야생마와 명마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역사에 기억되는 유명한 명마들이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탔던 적토마가 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탔던 마렝고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승리로 꼽히는 마렝고 전투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갈 때 탔던 말이 바로 마렝고였습니다.
이런 명마와 야생마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명마는 철저하게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말입니다.
주인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주인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말이 명마입니다.
반면에 야생마는 어떤 것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말입니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 야생마입니다.
야생마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누구에게도 쓰임 받지 않고 사라집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야생마이십니까? 명마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즉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움직여도 통제되지 않는 고집이 있으십니까?
성령의 열매 중에서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온유입니다.
온유가 헬라어로 프라우스(πραΰς) 입니다. 이
것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조용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통제되는 힘을 뜻합니다.
잘 훈련된 명마와 같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은 통제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을까요?
주인의 뜻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하십니까?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통제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고 싶은 말 다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는 말이 있으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절대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얼마든지 나의 뜻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담임 목사 청빙 인터뷰를 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목회 방향과 당회의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질문은 아주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목사님은 온유하십니까? 입니다.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목사님은 목사님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고집을 부리면 안 됩니다.
무능한 리더보다 더 안 좋은 리더는 고집 센 리더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 듣지 않고 자기의 뜻을 꺾지 않는 사람은 절대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결혼 상대자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결혼 상대자를 생각할 때 생각해야 될 요건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신앙도 좋아야 하고, 성품도 좋아야 하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고집이 세면 안 됩니다.
고집이 세면 변화의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습이 조금 부족한 것은 괜찮습니다.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고집이 세면 변화의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세운 울타리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2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아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이 백성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이 뻣뻣하다 목이 곧다라는 것은 불순종, 완고 고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만하고 고집스러운 태도를 한마디로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이런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과 같이 목을 곧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의 조상이란 신의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사람을 뜻합니다.
금송아지를 섬겼던 그들과 같이 그들의 후손도 하나님 앞에서 모기 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몫 같이 하여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는 장면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죄를 참고, 참고, 또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포악한 앗수르 제국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만 이런 것 아닙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그 완악한 유대인들을 향해서 스테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 함께 읽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아멘,
예수님을 거부하고 성령을 거스르는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스테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과 같이 목이 곧은 사람들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이 곧은 것은 단지 뭐 거만하고 고집이 센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목이 곧은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성령을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 우상숭배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그 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에게 배워야 합니다.
혼자서 대충 배워서는 우리가 탁월하게 할 수가 없겠죠.
예를 들어서 테니스 치는 사람 중에서 제대로 레슨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알았던 어떤 분은 테니스를 엄청 좋아하셨는데 제대로 레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운동 신경이 좋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공을 넘기긴 했습니다.
그런데 백핸드그도 그렇고 발리도 그렇고 폼이 이상했습니다.
제대로 된 폼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폼이었습니다.
아마추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실력으로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야이든지 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권위 있는 사람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지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분들이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치유 사역, 성경 사역하는 분들 중에서 신학 공부 안 하고 설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권성수 목사님이나 저처럼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면 그 사람의 신학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칼빈주의자인지 알미니안주의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복음주의자인지 아니면 자유주의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설교를 들어도 분석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아십니까?
설교자가 제대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신학적인 기초가 없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설교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사역해서는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에게 배워야 합니다.
혼자서 대충 배워서는 탁월하게 사육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 사역 훈련, 오늘 광고했던 베스트 성경, 대학, 성경을 따라가는 조직, 신학 등 많은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똑같지 않습니다.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하는 기도와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하는 기도는 절대로 똑같지 않습니다.
훈련을 받은 만큼 더 깊이 기도하고 더 깊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제자 훈련 사역 훈련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훈련 사역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연습입니다.
의식적으로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연습이 바로 훈련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이 순종을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들어서 조용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방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점점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잘못했다고 해도 내 말이 옳다고 이야기하면서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에서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다른 신을 동시에 섬겼을 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혼합주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합주의는 죄일까요? 죄가 아닐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닐까요?
혼합주의가 죄인지 아닌지 제가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유부남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를 버린 것 아닙니다.
혼인관계 유지하고 있고 생활비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내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여자도 사랑할 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내를 버린 것이 아니니까 죄가 아닐까요?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아내를 버린 것입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하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 상 8장 8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죠.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배우자가 한 명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목이 곧은 사람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아멘.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입니다.
할례는 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것입니다.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곧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vuCgCXk-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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