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한 적이 있으십니까?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원해서 희생한 적이 있으십니까?
희생은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기는 것이 희생입니다.
진정한 희생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도와주었는지 그 내역을 기록해 놓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가를 기대하는 것은 진정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희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일종의 투자 개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서 제일 똑똑한 아들에게 투자해서 노후의 봉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진정한 희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진정한 희생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정말 귀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면이었습니다.
부룬디에는 한국 식당도 없고 한국 마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라면을 구할 방법이 없죠.
그래서 한국 선교사들끼리 절대 하지 않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면을 빌려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너무 실례가 되는 말이기 때문에 절대 서로 이런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라면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 과자였습니다.
단기 선교팀이 올 때 한국 과자를 가져오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중에서 제가 좋아했던 초콜릿 쿠키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껴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도 그 쿠키를 엄청 좋아했습니다.
저는 하나씩 아껴서 먹었는데 저희 딸은 한 번에 여러 개 아무 생각 없이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저의 쿠키를 다 저희 딸한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주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작가 마이클 노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행복의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행복의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주고 또 주고, 또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받는 게 더 좋겠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마음, 기쁨으로 희생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에고, 에이미라는 헬라어 표현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신적인 정체성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고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고 생명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함과 세상이 말하는 선함은 같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에서는 순하고 조용하면 선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온순한 것입니다.
타고난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 있지요.
말이 적고 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순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이타적이지는 않습니다.
온순하면서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조용조용히 말하면서 얼마든지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함은 온순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함은 상대방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열매가 헬라어로 '선한 열매'입니다.
선한 열매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열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목숨이 헬라어로 부스케인데, 동일한 헬라어가 마가복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10장 45절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죄와 사망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은 기꺼이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말이고 또한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내가 기꺼이 이것을 위해서 내 목숨을 걸겠다' 하는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 목숨이 제일 소중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도 출근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목숨은 짧고 유한합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기 때문에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것은 매우 순간적인 목표가 됩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내 목숨보다 더 영원하고 궁극적인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 가치, 그 목적을 찾은 사람은 죽을 때에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확실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이 목숨을 걸 만한 그 숭고한 목적을 가지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만큼 중요하고 영원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쓴 십자가라는 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이죠.
그 마지막 부분이 다음과 같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는 역설법의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어떻게 괴로우면서 동시에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목숨을 걸 만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는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위해 살고, 그 영원한 뜻을 위해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윤동주 시인은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했던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목숨을 걸 만한 가치를 발견했다면 그 인생은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단 하루를 살아도 그 뜻과 목적을 충만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사람을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영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었기 때문에 소망을 잃고 희망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의사를 만나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 살아난 환자가 기쁠까요?
아니면 그를 살린 의사가 기쁠까요?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를 살린 의사가 정말로 기쁠 것입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모두가 죽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영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죄와 사망 아래에서 신음하던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방황하던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나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으로 살아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마음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는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 아래에서 신음하던 우리를 살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타의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뜻으로 그분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17절에 보니까는 '내가 내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신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완벽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서 인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멘,
아직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목자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선교적인 말씀입니다.
율법의 전통 안에 있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 우리 바깥에 있는 양들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공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면 특별한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일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0절 21절에 보니까
헬라인 몇 명이 있는데 청하여 이르기를 선생이요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합니다 라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헬라인이면 이방인들이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고, 율법의 전통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이를 만나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아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하셨죠.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올 때 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유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너무나 궁금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때는 언제 이를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궁금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12장에 가면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이르렀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이 말씀하십니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을 때 이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온 세상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을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하나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놀라운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칼의 힘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의 힘, 세상의 권력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가진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로 나타났을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양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양들, 여러분과 저 같은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영국 런던에 가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습니다.
영국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웅장한 대성당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왕실 행사를 거행하는 공식적인 장소입니다.
1066년 이래로 영국의 모든 왕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했습니다.
대관식뿐만 아니라 왕실의 결혼식, 장례식 등 공식 행사를 다 여기에서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영국 왕실의 역사를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사를 기리는 인물들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작 뉴튼,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영국 최고의 위인들이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선교사 한 분도 묻혀 계십니다.
영국이 낳은 최고의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입니다.

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데이빗 리빙스턴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근부는 아프리카 의료 선교사로서 선교 사역을 섬겼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서 학창 시절에 리빙스턴의 전기를 읽고 의료 선교사가 되고자 의사가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리빙스턴은 영국 선교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영국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을 노예로 잡아가는 노예 무역이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선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 폐지 운동을 앞장섰습니다.
사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로 가기 이전에 영국 국회에서는 노예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복음주의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윌버퍼스의 노력으로 영국은 1833년 세계 최초로 노예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아프리카에서 실제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왕국의 왕들은 유럽 사람들의 총과 술을를 원했는데, 그 대가로 줄 수 있는 것이 노예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국회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어도 여전히 아프리카에서는 노예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워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서양과 공정하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지금 개념으로 따지면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세 가지 c를 주장했습니다.

Christianity, Commerce, Civilization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 상업 문명을 통해서 아프리카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유럽인이 데이빗 리빙스턴입니다.
그는 1873년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리빙스턴의 심장은 아프리카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와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습니다.
레빙스턴이 묻힌 자리에 묘비가 있습니다.

그 묘비의 왼쪽에 보면 성경 구절이 영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0장 16절입니다.
영국 역사에 기념될 만한 극소수의 사람만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데이빗 리빙스턴이었습니다.
그를 기념하는 묘비에 요한복음 10장 16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을 찾으시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빙스턴은 평생 이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노년의 리빙스턴은 케임브레지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의했습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에 많은 시간을 아프리카에서 보내면서 내가 큰 희생이나 한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 진 큰 빚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을 갚았다고 해서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에게 선교는 희생이 아닙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선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분출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벌거 벗은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중에 작은 것을 드리면서 어떻게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목숨을 주셨는데, 우리가 가진 시간의 일부를 드리면서 어떻게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간 선교 한국에서 주최한 선교 헌신자 집회가 있었습니다.
청년 미래 선교를 줄여서 청미선이라고 부르는 집회였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선교 한국 대회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청년들 100명이 모였습니다.
요즘 같은 때 선교사로 헌신한 청년 100명이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20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한 청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중에는 우리 교회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인 저에게 저녁 집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우리 교회 사역이 워낙 많기 때문에 제가 웬만하면 외부 설교를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교 헌신자들 청년들을 위한 집회라고 하니까 제가 기쁜 마음으로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 단체 리더들도 다 와 있었습니다.
선교에 헌신된 청년들과 1대 1로 멘토링을 하고 조별로 토의를 했습니다.
패널 토의 시간에는 선교사님들과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의응답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모임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세계 선교를 위한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웃음이 끊이지 않고 감동이 끊이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오랫동안 계셨던 선교사님들이나 선교를 꿈꾸는 청년들이나 모두가 행복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그 모습을 보셨다면 놀라셨을 것입니다.
선교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놀라셨을 것입니다.
선교는 희생이 아닙니다.
선교는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기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선교인 줄로 믿습니다.
선교를 기쁨의 확장으로 여기는 사람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기쁨을 경험한 자로서 그 기쁨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양들의 큰 목자 대신 우리 주 예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무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아니라 아주 큰 무리의 양을 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목자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멘,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곧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신데 어떻게 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까요?
주님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직접 예수님을 대면하지 못하더라도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사도행전의 역사를 미리 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이고 생명 선교입니다.
생명 사역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사역을 우리가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고안하고 사람이 계획한 사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사역을 이어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삶의 방식, 신앙의 방식을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방식인가?
우리는 정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 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멘.
오늘 본문과 동일한 고백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형제를 위하여서 진정한 사랑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큰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한 무리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무리입니다.
동일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이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할례받은 유대인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건물 안에 있을 수 없었고, 같이 식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모두가 한 무리가 되어서 한 목자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이방인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이방인도 예수님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무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대구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한 무리입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한 무리입니다.
우리 모두 큰 목자 대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의 핵심입니다.
선교적 교회의 시작은 우리 교회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식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의 선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는 우리 교회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사역입니다.
우리 교회의 재정과 인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식해야 합니다.
2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경북대학교 기독센터를 위해서 후원을 했습니다.

국립대학교에서 기독 인재를 키우는 이 사역을 위해서 무려 7억 원을 후원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상 외부 단체를 위해서 가장 큰 금액을 후원했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부담감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했습니다.
저는 경북대학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센터에 여러분 자녀들은 갈 수 없습니다.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장소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 교회의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선교입니다.
동신교회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많은 교회들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와 많은 개인이 후원에 동참했습니다.
대구에서도 후원하고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후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기금이 모여서 이번 주 목요일에 착공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때 여러분이 믿음으로 헌신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캠퍼스 선교가 어려운 이 시대에 국립대학교에서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역량은 seating capacity 가 아니라 sending capacity'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의 진정한 역량은 교회에 몇 명이 모여 있는지?
몇 명이 앉아 있는지? 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세상으로 보내는지 그 sending capacity 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예산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정을 세상으로 복음을 위해서 흘려보내고 있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우리 교회처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우리 교회처럼 많은 재정을 흘려보내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선교계를 가든, 국제 선교계를 가든 많은 선교 리더들이 대구 동신교회를 칭찬하십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교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또 다른 선교적 실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생명 사역 정신으로 무장된 건강한 교회를 파송 개척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7년 동안 사역했던 이기복 목사님께서 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기도회에는 이기복 목사님이 설교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을 주셨고 어떤 마음으로 개척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금요 기도에 많이 오셔서 파손 개척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교는 희생이 아닙니다. 선교는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기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아직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을 찾으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동신교회를 통해서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이 더욱 왕성히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ei4SdgrDy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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