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1월 18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1. 18. 22:02

기쁨 없는 예배
요한복음 4:19-26 | 문대원 목사
2026-01-18


여러분은 철학을 좋아하십니까? 

예전에 뭐 고등학교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철학을 배웠습니다.
21세기에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그런 고민이 필요한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AI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민은 더욱더 필요합니다.
인간과 AI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인간은 생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정적이지 않고 지향적입니다.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데이빗 튠이 말한 것처럼 '이성은 욕망의 노예이다' 라는 말이 있죠.
맞는 말입니다. 

이것도 인간이 이성적인 것 같지만 항상 이성을 따라서 살지는 또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수단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엄청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의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욕망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본다면 동물과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동물이 본능을 따라 사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또 똑같지는 않습니다. 

동물의 욕망에는 도덕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동물이 짝짓기를 하면서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힘센 수컷이 자기 마음대로 정합니다. 

여러 마리의 암컷과 자기 마음대로 짝짓기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에는 도덕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 중에서 올바른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외도를 하고 자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열명과 바람을 피웠다고 SNS에 올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에는 도덕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욕망과 동물의 욕망은 조금 다릅니다.
한편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간만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을 생각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강아지가 아무리 똑똑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침팬지가 아무리 똑똑해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배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나보다 더 큰 절대자 창조주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내 인생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놓는 시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예배하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예배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여러분들 잘 알고 계신 내용이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야곱의 우물을 보셨습니다.
목이 말라서 그곳에 앉으셨는데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가장 무더운 정오에 여인이 혼자서 물을 길러 왔습니다.
제가 중동의 태양은 잘 모르지만 아프리카의 태양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정오가 되면 정말로 태양이 뜨겁습니다. 

잠깐만 밖에 있어도 정말 땀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출근합니다.
특히 이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은 아침에 일찍 시작해서 가능하면 오전 중에 일을 다 끝냅니다.
정오가 되면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더구나 혼자서 왔습니다.
일부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장 더울 때 물을 길러 왔습니다.
우물에서 만난 그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영원한 만족을 주는 생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여인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그 유대인들의 반응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표적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죠.
그저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정오에 물을 길러오는 일에 지쳤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야곱보다 더 크신 분이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와서 하는 말이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만족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이 작은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구가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하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순간적인 즐거움에 너무나 쉽게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냥 눈앞에 작은 즐거움을 위해서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를 아시지요?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저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숭이를 여러 마리 키우고 있었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원숭이를 기르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원숭이 먹이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먹이를 줄인다고 하면 원숭이들이 싫어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꾀를 썼죠. 

먼저는 원숭이들에게 가서 앞으로 먹이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벌쩍 대면서 아침에 하나 적게 먹으면 배가 고프다고 항의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저공이 슬쩍 말을 바꿨죠. 

그래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씩 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원숭이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먹으나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먹으나 똑같습니다.
차이가 뭘까요? 지금 당장 한 개 더 먹는 겁니다. 

나중에 적게 먹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타내는 말이 '조삼모사' 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이를 한 개 더 먹는지 아닌지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눈앞에 있는 그 작은 쾌락에 너무나 쉽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엄청난 보상을 생각하면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신다고 해도 우리는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하고 만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과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인생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실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작은 것에 만족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때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은 여행지를 가면 이렇게 말했죠. 

'힐링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말했습니다. 

힐링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류의 힐링이 얼마나 갈까요?
좋은 여행지에 가서 힐링을 받으면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맛있는 음식 먹고 힐링되면 그 상태가 얼마나 갈까요?
2~3일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2~3일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여전히 내 인생은 행복하지 않고 불평거리가 가득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힐링이 아닙니다. 

좋은 여행지에 가고 맛있는 음식 먹는다고 힐링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힐링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상처 입은 자아가 치유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 안에 분노가 가득한 사람이 평안을 누리게 되고, 실패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소망을 찾는 것이 힐링입니다.
이 진정한 힐링은 어려운 일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부흥에 가서 기도 한 번 받는다고 힐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거짓 메시지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깨어지고 연약한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심리적인 문제로 병원에 가거나 전문가를 찾아가면 부모님 선생님 같은 권위자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잘못된 권위자에게 받은 상처가 오랫동안 남아 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 받은 그 상처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서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사 안수 받을 때 저와 함께 면접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엄청 무서운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서 아버지 또래의 어른만 보면 덜덜 떨었습니다.
그래서 목사 후보생 인터뷰를 하는데 그 면접관들 앞에서 정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 또래 남성들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서 무서워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폭력적인 아버지를 만난 사람은 마음 안에 분노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그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았으면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 느낌, 그 상처는 엄밀히 말해서 그 사람 잘못은 아니죠.
그 사람의 부모 잘못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동안 부모를 원망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그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사 치유를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우리 마음을 비추실 때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왜 잘못되었는지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오랜 기도와 오랜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상처가 깊고 힘들수록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상담이고 성령의 내적 치유입니다.

 

이 사역을 위해서 우리 교회가 동신 상담 센터를 오픈했습니다.
수성대학교 입구에 있는 은혜관 5층에 상담센터를 오픈했습니다.
지난주에 정식으로 이제 개소식을 하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신 상담 목사님이 1년 전에 오셔서 그동안 준비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대규모로 사역을 하진 못해도 마음의 상처와 이슈가 있는 분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는 너무나 중요한 사역입니다.
과거의 상처 깨어진 관계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는 사역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힐링입니다. 

그런데 이 힐링을 좋은 관광지 가는 거, 맛있는 음식 먹는 걸로 축소시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한한 기쁨을 우리 눈앞에 있는 작은 즐거움으로 축소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숭이가 아닙니다. 

사탄이 던지는 조삼모사의 계략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눈앞에 있는 그 작은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무한한 기쁨을 추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던 그 사마리아 여인이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남편에 대해서 질문하시니까 갑자기 이 예배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나누어진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남편 이야기에 당황한 여인이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 위해서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늘 예배에 대해서 궁금해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질문을 예수님께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왜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는지 우리가 그 마음속까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녀에게 예배가 중요했다라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질문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예배의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본문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아멘, 

여기서 이산은 그리심산을 뜻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그리심산에 그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르심사는 세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세김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재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이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예배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장소와 형식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예배당 의자는 반드시 장의자야 하고, 반드시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반드시 가운을 입고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예배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형적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고 있는지 우리 영혼의 중심을 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십니다.
성경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를 찾으십니다.
예배는 화려한 음악을 즐기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찬양대가 매주 은혜로운 찬양을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음악 안에 담긴 예수님의 말씀 진리입니다. 

예배는 목사가 멋진 강의를 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해서 설교 준비하지만 저의 철학이나 생각을 전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찬양대의 음악, 목사의 설교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드러나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만나면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치고 상한 우리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고 소망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영원히 살아나는 것이 바로 생명 사역입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보배 되시는 그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생명 사역입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보화로 영접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에는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환영하고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요소들이 담겨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귀한 보배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리 인생에서 벌어진 최고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배 시간을 너무나 기다립니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고 가정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주일 아침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예배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예배 오는데 마음에 기쁨이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기쁨 없는 예배' 가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는 향기를 잃어버린 꽃과 같습니다.


결혼 기념일에 배우자가 장미꽃 한 다발을 사 왔습니다.
그런데 꽃에서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생화가 아니라 조화를 사 온 것이지요.
그때 기분이 어떨까요? 

조화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조화를 진짜 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쁨과 생동감을 잃어버린 그 관계를 우리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의무감'입니다.

예배의 위기는 종교적 의무감에서 시작됩니다.
결혼 기념일에 배우자가 아주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습니다.
대구에서 제일 좋은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합니다.
너무 감동을 받아서 왜 그렇게 했어 질문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자가 말하죠. 

'이건 나의 의무니까'

여러분, 이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결혼 기념일 챙기는 것이 내 의무라서 그렇게 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기분 안 좋겠죠? 

그때 이렇게 답했어야 합니다. 

이건 나의 기쁨이니까 영어로 하면 My Pleasure 입니다.
제가 보스턴에서 공부할 때 정말로 착한 친절한 미국 친구가 있었습니다.
정말 멀리서 오는데도 꼭 문을 잡아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고맙다고 땡큐 하면은 이렇게 답했어요.

My Pleasure 나의 기쁨입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것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면 나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까?
예수님 당시에 종교적 의무감에 빠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종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23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아멘.

헬라어로 외식이 히포크리테스입니다.

영어 단어 hypocrite 이 여기서 왔습니다.
영어로 hypocrite 하면 '위선자'입니다.

여러분, 위선자가 착한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착한 척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할 필요가 없겠지요.
나쁜 사람이니까 착한 척하겠지요. 

헬라어 히포크리테스는 문자적으로 '연극 배우'를 뜻합니다.
연극 배우는 대본에 쓰인 대로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 전통에 따라서 연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 전문 배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기를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인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화려한 음악, 멋진 설교를 찾는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재물을 드리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는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 열심히 드리면 좋은 대학 가고 뭐 좋은 회사 취직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관계와도 같은 이치이지 진정한 관계의 목적은 관계입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관계는 진정한 관계가 아닙니다.

 

정말 오랜만에 옛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내에서 만나서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나가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돈을 좀 빌려달라는 것이지요. 

그때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그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나갔는데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기분이 어떨까요?


진정한 관계의 목적은 관계 그 자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예배 그 자체입니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시편 32편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아멘.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모든 선한 은혜와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즐거워야 할 분은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예배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예배의 깊이 이상으로 봉사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공헌할 수 없습니다.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예배의 깊이 이상으로 사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은 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특정 사역이 다른 사역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외부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더 큰 수고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외부에서 주차 봉사하시는 분들은 더 힘든 수고를 하십니다.
더 힘든 수고를 하기 때문에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힘과 내 열심으로 봉사하면요. 하다 보면 화날 때가 있습니다.
그 안내 지시에 따르지 않는 차량을 보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할수록 더욱더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 기쁨과 은혜가 있을 때 그때 우리에게 맡기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깊이는 비례합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하죠. 

이 말을 예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주님의 뜻과 성품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만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을수록 더욱더 깊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의 피아노 반주를 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내내 저는 주일 오전 예배를 두 번 드렸습니다.
중고등부 예배드리고 그다음에 어른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영적으로 어렸기 때문에 깊은 예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열심히 피아노 반주하고 설교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부끄러운 일이죠. 

맨 앞에 앉아서 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1대 1 양육을 받고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깊이도 더 깊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설교 시간에 한 번도 졸지 않았습니다.
누가 설교하든 상관없습니다. 

주일 예배든 새벽 기도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된 이후에 단 한 번도 대충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을수록 더욱더 깊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 찬송가의 깊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 가사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얼마나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알면 정말로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 예배에 오는 것은 사실 불편한 일입니다.
주차도 불편하고 본당의 자리를 맞는 것도 불편합니다.
주일마다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예배에 나오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기뻐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형식이나 장소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것보다도 주님을 가장 기뻐하는 마음이 진정한 예배의 핵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겨서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충만히 누리는 새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aiAv94XUY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