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1월 4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1. 5. 16:03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2026년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작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새해에는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어야겠다 다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새로운 다짐과 목표를 지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틀, 3일 혹은 일주일은 어떻게 할지 몰라도 한 달 이상 변화를 지속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의 의지력은 약한 것일까요?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죠.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는 것이 일단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시작은 시작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시작이지 절반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는 뜻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거 시작하고 저거 시작한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것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을 때 그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러이 바오 마이스터 교수는 의지력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2011년 아마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정도로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자기 절제와 인내심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의지력을 근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근육을 계속 사용하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처럼 의지력을 계속 사용하면 피곤함을 느낀다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근육의 제한이 있는 것처럼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의지력에도 제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가지고 가족들과 토론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 딸이 하는 말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고 이야기합니다.
아침에는 간식의 유혹을 참을 수 있지만, 밤이 되면 간식의 유혹을 참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의지력을 다 사용했기 때문에 밤이 되면 의지력이 고갈되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 공감하실 것입니다. 

밤이 되면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밤에는 쉽게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일, 영적인 건강을 해치는 일을 밤에 주로 하게 되죠.
밤늦게 무언가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일찍 자는 것입니다.
취침 시간을 딱 정해놓고 밤 10시가 되면 무조건 자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체력에 제한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력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의지력이 무한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의지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의지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망입니다.
올바른 것을 갈망하고 선한 것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갈망을 가리켜서 성경은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2026년에 여러 가지 목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예수님의 고별 담화 ' Farewell Discourse' 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그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박해하는 이 세상 살아갈 때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 가면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고별 담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고별 담화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그분의 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내 때가 이르렀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 많이 하셨죠.
그분은 자기 임의대로 행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따라서 행동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날 때가 된 것을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서 천국으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 신실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온 것처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말하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합니다. 

너가 신에게 충성하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 복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고대 근동의 많은 신들은 이런 식으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이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이 있다면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 소원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녀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외에 소원이 없습니다.
한 가지 더 바랄 것이 있다면 부모가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을 알기 원합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 이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뿐인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 이상 바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마음을 잘 표현하는 말씀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입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멘.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숭배하라, 나를 사랑하라 뭐 이렇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그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장 무언가를 하기 원치 않으십니다.
먼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고백하는 그 마음입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전심으로 기뻐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있으면 그 사람은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사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권력으로 매수할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 문장이 있죠. 

영국의 철학자 데이빗 힘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성은 욕망의 노예이며 그 이상일 수 없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passion 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현대 영어에서 passion 은 '열정'을 뜻합니다.
그런데 18세기에서 패션은 감각적인 욕구, 욕망을 뜻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인간의 특징을 reason, '이성' 이라고 했고요.
동물의 특징을 passion, 감각적인 욕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상당히 이제 도발적인 말입니다.
인간이 대단히 이성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데이빗 흄은 경험주의 철학을 대표합니다. 

경험주의 철학은 합리주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의 최고의 능력이며 이성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데이빗 흄은 '이성은 욕망의 노예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대단히 이성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우리가 살면서 이성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현대인의 40%가 지방간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지방간은 술을 마셔서 생기는 알코올성 지방간이 있고, 술과 상관없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이 있습니다.
비알코올성 지방간을 치료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체중을 7% 감량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이성적이라면 지방간을 없애기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체중에서 7%를 감량하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성인 남성이 70kg라면 5kg를 빼야 됩니다.
여러분 5kg 빼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5kg는커녕 1kg 빼는 것도 어렵습니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면 건강을 위해서 5kg를 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성을 따라 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욕망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맛있는 거 먹고 싶은 욕망, 게으르게 지내고 싶은 욕망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성으로 우리의 욕망을 정당화합니다. 

이성은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욕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6장 5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2026년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찬양 시간에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4시간 내내 주님만 생각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아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뜨거운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 이상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반복하실 정도로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 이라고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똑같은 말 세 번 하는 거 흔하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같은 장에서 똑같은 말씀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본문 21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아멘,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말로만 주님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의미가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건 아무 의미 없습니다.
행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는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들죠.
나도 좀 저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제가 동신교회 만난 이야기, 파송 선교사로 허입이 되고 담임 목사로 청빙된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도 좀 저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귀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생각에서만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겠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돈보다 학벌보다, 성공보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흥미로운 그림을 하나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험한 길입니다. 

가기 어려운 길이고 조롱을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신실하게 걸어갈 때 그 끝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부흥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3년 동안 세계 5개 대륙에서 70개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미국 애즈베리 대학 부흥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잘 담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부흥이 있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신실한 기도가 나옵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이르면 그때 부흥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가 증거하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부흥에서도 그랬고요. 

한국과 아프리카의 부흥에서도 그랬습니다.
모든 부흥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보기 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부흥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서 부흥의 결과는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부흥이 내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안락함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게 될 것이고, 영적인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갈망하지 않은 것을 공짜로 얻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시편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9편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아멘, 

하나님의 계명이 순결하여서 우리의 눈을 밝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지혜가 생기고 분별력이 생겨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AI 시대입니다. 

AI 시대라서 편리한 점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죠.
이제는 웬만한 영상을 다 AI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지난주 신문에 보니까 AI가 생성한 저품질 영상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있다고 합니다.
AI Slop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lop 하면은 더러운 물, 구정물을 뜻합니다.
AI가 만든 저품질 영상, 심하게 말하면 쓰레기 영상을 가리켜서 AI slop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전 세계에서 AI slop을 가장 많이 시청한 나라가 어디일까요?
한국입니다. 

 

2025년 국가별 AI 슬롭(AI Slop) 소비 현황 (Top 10)

순위 국가 총 조회수 (est.) 주요 특징 및 지표
1 대한민국 84.5억 회 조회수 세계 1위. 쇼츠(Shorts) 위주 소비형태
2 파키스탄 53.4억 회 급성장하는 신흥 시장, 다수의 슬롭 채널 보유
3 미국 33.9억 회 스페인어 기반 AI 채널(Cuentos Facientes 등) 인기
4 스페인 25.2억 회 구독자 수 세계 1위 (약 2,022만 명 보유)
5 이집트 21.0억 회+ 약 1,800만 명의 높은 구독자 층 형성
6 인도 20.0억 회+ 단일 채널 기준 최고 조회수 기록(3 Minutes Wisdom)
7 브라질 18.5억 회+ 약 1,350만 명 구독자, 남미 최대 소비국
8 베트남 12.0억 회+ 콘텐츠 제작과 소비가 동시에 활발한 지역
9 프랑스 9.8억 회+ 유럽 내 주요 소비국 중 하나
10 인도네시아 8.5억 회+ 동남아시아 지역 내 빠른 확산세

 

지난해 한국에서 AI 슬럽을 84억 회에 시청했다고 합니다.
2위 파키스탄은 53억 회, 3위 미국은 34억 회입니다.
한국이 미국보다 AI 슬로블 2.5배 많이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인구가 한국 인구의 6.5배입니다.
그러니까 1인당 시청 시간으로 하면요. 

16배 많이 받습니다.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AI로 만든 이 저급한 영상 쓰레기 영상을 16배 더 많이 봤습니다.


이런 영상을 보는 것은 우리 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만 될 뿐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괴한 영상, 과도한 설정이 우리의 뇌 기능을 저하시킨다고 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데, AI slop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무엇을 보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이 온전할 때 온 몸이 온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몸의 등불은 눈이라 내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오, 만일 나쁘면 내 몸도 어두우리라 

 

아멘, 

우리 뇌에 정보를 가장 많이 가져오는 것이 시각입니다.
전체 정보의 70% 정도를 시각 정보로 우리가 들여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정말로 유의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눈에 보인다고 아무거나 보면 안 됩니다.
AI slop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생각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묵상하고 행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새해에는 주님을 사랑하여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순종을 하나로 연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의지력으로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떨 때는 순종할 수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아멘.

여러분,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 보혜사라는 단어가 총 4번 나옵니다.
4번 모두 예수님의 고별 담화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에서 보혜사 성령을 네 번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etos) 입니다. 

이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그리스 법정에서 법적 자문을 해주는 대변인, 조언자를 뜻합니다.
법정에서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럴 때 옆에서 법적 자문을 해주는 사람이 대변인, 조언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의미인데, 

한글 성경은 이것을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앞에 '또 다른'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이미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죠.
원래 보혜사가 있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있는 그 원래 있던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대언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가 똑같은 단어 파라클라토스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보혜사와 요한일서에 나오는 대언자는 동일한 헬라어입니다.
우리를 대변해 주는 성령님의 역할과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예수님의 역할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가리켜 '예수의 영'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동일한 분이십니다. 

동일한 본성을 가지셨고 동일한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하는 대언자가 되시고,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가 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실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이 구절에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 단어 meno 가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오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단어가 바로 헬라어 meno입니다.

영어로 remain abide, '함께 거주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일만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주로 말미암아 삼고 주는 나로 말미암아 삼는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이와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일평생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요셉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 요셉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는데 불평하지 않았다라고 말씀을 드렸죠.
억울하게 노예가 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 요셉이 불평했다는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 라는 이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장에서 언제 불평합니까?

상사가 있을 때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상사가 없을 때 불평합니다. 

당사자 앞에서 내놓고 불평한 사람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불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거주하고 계심을 얼마나 자주 인식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말을 성령께서 다 듣고 계심을 인식하고 계십니까?


요즘 휴대폰에는 자동 녹음 기능이 있어서 여러분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최근에 말과 행동이 다른 정치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말, 순결한 말 덕이 되는 말만 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영'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전에 예수님은 사탄을 가리켜서는 '거짓의 아비'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사탄은 거짓의 아비' 입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대비이지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따르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속이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으로 지식인이 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 지혜자가 될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멋진 말이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것을 우리가 표절이라고 합니다.

논문 표절하는 경우가 있고 설교를 표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의 한 목사님이 제 설교를 똑같이 표절했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우리 부목사님이 알려주셔서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후임 목사 때 했던 설교 중 하나를 똑같이 표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훔쳐서 지식인인 척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논문을 표절할 수 있고 설교도 표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 지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지혜자는 내가 무엇을 알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견과 자만심을 극복한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로는 지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영 대신 성령과 동행할 때 지혜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면 우리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2026년 새해,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셨습니까?
작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새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여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닮아가는 새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mvWaNjtVuO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