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2월 28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1. 3. 12:48


오늘은 202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했던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2025년은 어떤 해였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떠한 변화와 성장이 있었습니까?
제가 지난 올해 첫 주일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하든지 아니면 더 나쁜 모습으로 변화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반성하는 사람만이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실패의 경험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왜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될까요?
과거의 경험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 26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아멘.

성경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을 가리켜서 미련하다라고 말씀합니다.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평가된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과거의 경험을 평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서 우리가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하는 태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의 완성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뭐 새해가 되어서 리딩 바이블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성경 통독을 완수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시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완성하는 것은 소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전직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문제를 잘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매듭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끈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인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완주할 수 있는 태도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따르면 바울은 AD 65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이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던 노 사도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아멘, 

여기서 전제는 drink offering, 포도주를 붓는 제사입니다.
민수기 28장 7절에 보니까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포도주가 붉은색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붓는 것은 나의 피를 붓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의 인생, 나의 생명을 하나님께 다 드린다는 상징적인 제사입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이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다해서 주님을 섬겼다는 귀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후회 없이 내가 봉사하고 헌신했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어떻게 고백하시겠습니까?
주님 부족하게나마 전제와 같이 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올해도 제가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라고 고백하겠습니까?

바울은 낭비도 없고 후회도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다 드렸습니다.
전제와 같이 부어지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울이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떠날 시각이 다가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일에는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정년이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호흡하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날이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은 내가 정할 수 없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여기서 떠남을 뜻하는 헬라어 analysis는 영어 단어 analysis의 어원이 됩니다.
영어로 analysis 하면은 '분석' 이라는 뜻이지요.


모든 사람에게는 떠남의 순간이 있고 바로 그때 그 사람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있습니다.
제가 보스턴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지도 교수님께서 해 주셨던 조언이 하나 있습니다.
지도 교수님은 예일 대학에서 박사를 하신 탁월한 역사학자였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존한 인물에 대해서는 절대 전기를 쓰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존한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한 인물에 대해서는 절대 박사 논문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떠난 이후에 그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어떤 신앙을 가졌는가? 지금은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떠난 이후에 그것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은퇴 장로님, 시무 장로님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은퇴 장로회에서 시무 장로님들께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거꾸로 됐죠. 

시무 장로님들이 어르신을 대접한 것 아니라 어르신께서 시무 장로님들, 저를 포함해서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원로 장로님께서 은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은퇴가 한자로 숨을 은 (隱) , 물러날 퇴 (退), 라고 하시면서 '물러나서 숨는 것이 은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멋진 말씀이었습니다. 

공로를 내세우고 대접받는 것이 은퇴가 아니라 물러나서 숨어 있는 것이 은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은퇴 장로님들께서 이렇게 멋진 분들이십니다.
그에 대한 답사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은퇴 장로님들께서 물러나 숨어 계시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들께서 세우신 교회의 문화와 전통은 우리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저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건강한 신앙이 필요하고, 

둘째로 건강한 관계가 필요하고, 

셋째로 건강한 문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바라야 하고, 또한 우리의 관계가 견고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건강한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고 서로서로 격려하는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하나 됨을 위해서 서로 양보하는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문화가 있어야지 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교회의 문화를 만들까요? 

선배 장로님들, 선배 권사님들께서 교회의 문화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이 은퇴하셔도 그분들이 만들어 놓은 교회의 문화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건강한 문화와 전통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떠날 날이 있습니다. 

맡은 바 직분에서 떠나게 될 날이 있습니다.
저도 지금은 젊지만 은퇴할 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떠날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문화와 전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전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 서로 세워주고 양보하는 그 문화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모두 떠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일평생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달려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리적인 싸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대 올림픽의 레슬링 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달려갈 길을 간다는 것은 육상 경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금 올림픽 경기에 임하는 운동 선수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고린도 전서에 보면 바울이 운동 선수의 이미지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운동 선수에 비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름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아니하며 

 

오늘 본문과 동일한 이미지죠.
달리기 하는 육상 선수의 모습이 나오고, 힘으로 서로 겨루는 레슬링 선수의 모습도 나옵니다.
운동 선수의 모습과 신앙생활의 모습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 앞절에 나옵니다.
25절에 보니까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 선수는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합니다. 

승리를 위해서 그들은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게 훈련을 합니다. 

식단 관리도 철저하게 해서 몸에 나쁜 음식은 먹지 않습니다.
승리를 위해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승리를 위해서 우리도 절제해야 합니다.

프로 선수들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배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날씨가 추우면 교회 안 옵니다. 

어떤 교회는 장마철이 되면 예배 출석이 확 준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프로가 있고 아마추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일에는 프로가 있고 아마추어가 있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전문성, 열정, 헌신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한 단어로 '절제'라고 표현합니다.
영적으로 프로인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 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 하지 않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습니다.
유익하지 않은 말, 덕이 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성숙한 사람입니까? 

신앙의 연수가 길면 성숙한 사람입니까?
중직으로 임명되면 성숙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의 절제가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행동에 절제가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잠언 10장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아멘.

누구든지 이제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말하게 되고요. 

덕이 안 되는 말 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입술을 제어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특별히 연차가 올라갈수록, 직분이 올라갈수록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가 된 이후에 제가 노력하는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잔소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제가 잔소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리더는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사단장이 잔소리하면 안 됩니다.
잔소리는 하사 중사가 하는 거죠. 

리더가 앞에서 불평하고 잔소리하면 공동체 전체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절제입니다.
운동 선수들은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날마다 절제합니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의 절제, 행동의 절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니까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을 많이 받았죠.
우리의 생명 시간, 은사, 달란트, 건강,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선물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되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아끼고 가장 귀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이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과 경주를 완주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그때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서 '결승점에서 기다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믿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떨 땐 계시고 어떨 땐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하나님은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 지켜보고 계시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준다고 하셨을 때 놀라운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의의 원칙이 작동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내가 행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인생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나의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스위스에 있는 로잔 비즈니스 스쿨에서 가르치는 마이클 왓킨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략적 사고는 단순한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을 볼 수 있는 지혜이다. 체스 전문가는 하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내다볼 수 있다.개별 사건이 모여 일정한 패턴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생에서 전략적 사고는 아주 중요하죠. 

전략적인 사고가 없으면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장도 없고 발전도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죠.
전략적인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개별 사건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스 전문가는 하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그것을 미리 보는 사람입니다.
바둑이나 채소에서 한 수 한 수가 모두 다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나와 오늘의 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갑니다.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단기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항상 경쟁자를 의식합니다.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면요 나에게 주어진 경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저명한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 따르면 미국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이 급격히 줄었다고 합니다.
1950년대 미국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61년이었습니다.
한 번 기업이 성공하면 60년은 계속 가는 거였죠.
하지만 지금은 평균 수명이 16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일반 기업이 아니라 SNP 500 대기업을 뜻합니다.
미국 최고의 기업들도 16년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에 따르면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 장기적인 가치를 세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기적으로 경쟁사를 이기는 것이 목표이고, 이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경쟁자를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내가 베드로를 이겼다.

내가 바나바보다 더 큰 열매를 맺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은 빨리 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찾으시는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끈기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 인내는 사실 우리의 어떤 결단과 의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그렇게 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인내와 끈기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멘,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충성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나타나심 재림에 관심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만족과 행복을 누리기 원하죠.
이 땅에 있는 것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쩌면 주님의 재림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분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로 절묘한 표현인데요.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내 마음대로 죄를 짓기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주님의 재림을 원하지 않는 주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기를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이 세상에서 편하게 즐기면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은 마라나타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아시는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마라나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였고 그들의 찬양이었고 그들의 인사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나면 서로 서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하지만 중세 시대 이후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핍박도 없고 그냥 살기 좋기 때문입니다.
너무 신용하게 살지 말고 그냥 적당히 즐기면서 살다 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라나타라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을 들을 때 저에게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원로 선교사님이셨던 고 김환영 선교사님의 모습입니다.
제가 이제 후임 목사로 청빙되던 해에 투병 중이셨던 김환영 선교사님을 찾아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아영 선교사님은 필리핀 선교사로 35년간 사역을 섬기셨습니다.
우리 교단 선교회 GMS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셨고요.
교단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신 분이십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바친 너무나도 귀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찾아뵈었던 것이 선교사님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이미 쇠악해지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제대로 말씀도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찬양을 한 곡 다 같이 불렀습니다.
그 찬양이 마라나타라는 찬양이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선교사님께서 너무나 우렁찬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말씀도 제대로 못하셨던 분이 온 힘을 다해서 찬양을 부르셨습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ㅠ라고 찬양을 부르셨습니다.


제가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 마지막 힘을 다해서 고백한 것이 바로 마라나타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가 생각하니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아직 저는 너무 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나에게 주어진 이 책임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은 주님의 나타나심과 연관이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고 계십니까?

신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하나 있습니다. 

내세 중심의 신앙이 옳은가?

현세 중심의 신앙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내세 중심의 신앙을 가지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차피 다 천국에 갈 텐데 굳이 열심히 일하거나 굳이 열심히 공부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현세 중심의 신앙을 가지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잘 되고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이룬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세와 현세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는 내세를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현세를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과 영광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에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세와 현세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세에서도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 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아멘, 

제가 장례식장에서 이 말씀을 자주 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도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있을 때에도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되시고,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세와 현세는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현세를 살아가는 그 방식이 내세에도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세에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은 내세에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현세에서 이 세상만 사랑한 사람은 내세에 가며 받을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직후에 이제 바울이 데마를 언급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한 반면에 이 대만은 이 세상 현세를 더 사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주님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 인생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충성했는지 누가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제 사역 일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행정 목사님입니다.
하지만 행정 목사님도 제 가정에서의 일은 다 모릅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고민은 다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충성하십니까? 

사람에게 충성하십니까?
교회에 충성하십니까? 

우리가 충성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헌신하고 수고했는지, 그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한 모든 수고와 헌신을 잊지 않으시고 그대로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아멘,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다 드러내십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공이 있고 어떠한 과가 있는지 하나님은 다 드러내십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만 드러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숨어 있는 그 마음의 뜻까지 다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어떤 동기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날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날에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헌신을 갚아주실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VxCmPsmquQ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