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3:19-26 | 문대원 목사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니까 어느 정도의 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음주운전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나만 그랬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음주운전 많이 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이야기합니다.
폭행이나 사기 등 다른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시대입니다.
사법적인 처벌을 받았으니까 다 끝난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사실입니까?
죄에 대한 사법적인 처벌을 받았으면 그 죄는 사라지는 것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이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는데 가해자가 감옥 갔다 왔으니까 끝났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으십니까?
죄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멀쩡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분노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은 사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마음에 상처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배우자로부터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큰 아픔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비관적이고 우울할 수 있습니다.
죄가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파괴적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그 죄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죄에 대한 올바른 관점, 성경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복음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해야지 그때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지 그때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학습 세례식이 있는 날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멤버가 되는 귀한 예식입니다.
학습 세례식이 있는 날에는 제가 구원에 대한 교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1년에 한 번 행복 나눔 잔치 때 복음 설교를 듣습니다.
저는 이 시간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모든 사람은 정기적으로 복음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는 정기적으로 교리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구원론에 대한 올바른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매년 학습 세례식이 있는 날에 저는 교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개혁주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교리를 가져야지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이념이 잘못된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교리는 잘못된 신앙생활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구원론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핵심 구절입니다.
로마서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가장 사랑했던 성경이 로마서였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잘못된 구원론에 빠져서 잘못된 성례를 행할 때 루터가 이것을 비판했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비판했습니다.
그때 루터가 사용했던 성경이 바로 로마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포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HIV에 감염된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자동적으로 HIV에 감염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는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 HRB 검사를 먼저 합니다.
제가 예전에 우간다에 있을 때 현지인 부부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습니다.
혼인 신고를 위해서 HIV 검사를 하고 기다렸던 그 순간이 얼마나 떨렸는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 죄입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다 나쁜 말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이죠.
주일에는 이렇게 경건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고 싶으면 배우자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나에 대해서 나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배우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 저희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해 주셨습니다.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감찰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말이 정말 맞는 말씀이라고 제가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고 직위가 올라갈수록 내가 잘못했다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문제죠.
내가 잘못하고 있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문제입니다.
그럴 때 딱 한 사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배우자입니다.
배우자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평소 생각, 평소 모습, 평소 성격 다 알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배우자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배우자입니다.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감찰자다라는 말이 맞는 말이죠.
여러분의 배우자를 귀하게 생각하고 배우자의 말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내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지적할 때 배우자가 그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자에게 너무 날카롭게 지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에베소서에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했죠.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따뜻하게 말해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영국의 신학자 핸들리모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살인자와 매춘부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산 아래에 있고 당신은 산 정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하늘의 별에 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살인자도 아니고 매춘부도 아니죠. 저렇게 나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산 정상에 있는 사람과 산 아래에 있는 사람이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늘의 별에 닿을 수 없다는 면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사람이나 간음을 행한 사람이나 다 죄인입니다.
형제를 저주하는 말을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해친 사람이나 다 죄인입니다.
잠언 21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아멘,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죠.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이기적으로 바라봅니다.
내가 잘한 것은 확대해서 바라보고, 내가 잘못한 것은 축소해서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볼 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동기로 이 행동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길 때 우리가 어떠한 동기로 하고 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중직이 되기 위해서 헌신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저도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과 의인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십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악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로마서 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내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내게 쌓는도다.
아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우리의 범죄에 대해서 화를 내신다는 뜻이죠.
며칠 전에 저희 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는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딸이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화내는 것보다 아빠가 화내는 것이 더 무섭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추가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선한 분이십니까? 악한 분이십니까?
선한 분이시죠.
하나님은 화를 잘 내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화를 잘 안 내시는 분이십니까?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화가 많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면 정말 무서운 거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가득한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로막는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그 죄악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죽음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서 만든 그 모든 우상은 우리를 해칠 뿐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돈이든 명예이든 학벌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자녀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오로지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녀가 우상같이 되는 거죠.
장성한 자녀는 결혼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자녀가 부모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결혼하면 자기 인생 살아갑니다.
바로 그 순간에 부모는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만든 모든 우상은 반드시 우리를 배신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우상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을 잠시 맡아서 돌보고 사랑하고 키우는 그런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 자녀가 가장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그 자유를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탈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와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가가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로마서 3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아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 외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과 구별되는 새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약속, 세 가지 언약이 나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행위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에게 완전한 순종, 지정의를 다한 인격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담은 그 언약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순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세계관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실수가 아닙니다.
딱 한 번 어쩌다가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의도적인 반역이고 배신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탕자의 모습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함께했던 신실한 아내를 버리고 창녀와 결혼하는 남편의 모습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 결과 모든 인류는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제는 행위 언약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은혜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 구약에 있는 모든 언약은 다 은혜의 언약입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은 구약의 언약이 은혜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조금 낯설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구약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벌을 받으니까 은혜의 언약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모세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주신 언약, 이 모든 것이 다 은혜에 기반한 은혜 언약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 언약이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향한 믿음에 근거한 언약이었습니다.
세 번째 언약은 예수님의 보혈로 성취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 성령의 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된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행하신 순종이 있고,
두 번째로 당하신 순종이 있습니다.
행하신 순종은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셨고 완전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당하신 순종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과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속량은 값을 치르다, 대가를 치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의를 우리가 믿을 때 그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
땅 땅 땅 재판장에서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이제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선포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 루터가 강조했던 칭의라는 개념입니다.
칭의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declared righteous 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의 구원론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포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톨릭은 믿음과 선행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오늘처럼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된다고 믿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는 거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행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주입된 하나님의 은혜로 선행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점점 더 의롭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카톨릭이 말하는 구원은 declared righteous 가 아니라 made righteous 입니다.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존재가 되어 간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기준을 넘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만큼 선행 공로를 쌓았는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카톨릭 전통에서 자기의 구원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로를 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성인들 saint 입니다.
초대교회 중세 교회 성인들은 대부분 다 순교자들입니다.
카톨릭 전통에 보면 수많은 성인의 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 베드로의 날은 6월 29일입니다.
성 바나바의 날은 6월 11일입니다.
이러한 성인의 날은 그 사람들이 순교한 날입니다.
전통에 따라서 베드로가 6월 29일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날이 이제 베드로가 천국에 입성한 날이죠.
혹시 여러분 중에서 6월 29일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수호 성인은 성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성 베드로에게 기도하는 거죠.
천국에 있는 그분의 공로를 나에게 좀 나누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혹시 내 공로가 부족해도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의 구원론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세 카톨릭 교회는 사람의 선행, 사람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한 일 선행이든 공로든 내가 한 일을 통해서 나를 받아주신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나를 받아주신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언약을 말합니다.
첫째로 아담에게 주신 행위 언약,
둘째로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언약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스위스의 개혁주의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위 언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었던 것들이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완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내줌으로써 그것을 세운다' 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만 믿고 따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위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을 합쳐서 옛 언약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이전에 지었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죄를 간과하셨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25절 본문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아멘,
죄를 간과한다는 것은 심판을 보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즉각적으로 그 죄를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구약의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가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뿌린 그 집을 보고 넘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애굽 사람과 똑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그 집을 넘어가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함에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영어로 하면 Passover패스 오브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을 패스해서 지나갔다는 뜻이죠.
이것은 그들을 향한 심판을 유예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죄의 용서가 임했을까요?
유월절에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심으로 용서가 가능해졌습니다.
여러분 죄 용서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그 심판을 대신 받을 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죄인이면 안 되고 죄가 없는 분이어야만 합니다.
죄 없고 흠 없는 분이 우리가 받아야 하는 그 심판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새 언약의 시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죄 용서의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죄를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치러야 하는 그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두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간과와 죄 용서의 이 차이를 어떻게 하면 좀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좋은 예가 떠올랐습니다.
은행 대출로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은행에 가서 10억을 대출받았습니다.
인생 일대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업에서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대출 만기가 다가오는데 갚을 돈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될까요?
모든 재산이 다 압류될 것입니다.
집도 압류되고 통장도 압류됩니다.
그럼 얼마 후에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하게 은행에서 대출금 상환 연장을 해줬습니다.
대출금을 20년 후에 갚으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너무너무 기쁜 소식이죠.
당장 파산할 수도 있었는데 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간과입니다.
죄의 간과는 대출금 상환 연장과 같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유예해 준 거죠.
빚을 다 없애준 것은 아니지만 상환일을 아주 늦추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는 무엇일까요?
죄의 용서는 대출금을 대신 갚아주는 것입니다.
어떤 독지가가 나와서 10억의 대출금을 다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빚이 다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빚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하는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다 치르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빚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죄 용서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7장 3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러분,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간과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제 죄 용서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죄 용서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에게 명하사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죄를 바라보며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이렇게 회개를 정의합니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아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여 그 모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학습과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주인을 바꾸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에 신분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심판과 저주 아래에 살았지만 이제는 영광과 유업을 받을 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칼빈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고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그 의를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E-VV_CKS8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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