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루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우리의 자녀들도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육체적인 질병, 심리적인 문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영적으로 다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연약함을 마주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최대한 숨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져와서 기도하십니까?
미국 볼티모에서 태어난 조니 에렉슨 타다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과 외모를 가진 그녀는 17살의 나이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이빙을 하다가 목이 부러져서 전신마비가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그녀는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치료 기간이 너무나 힘들어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조니 당신의 삶에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조니 당신의 믿음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으세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손을 꼭 잡아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같이 울어주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조니가 이 시간을 어떻게 믿음으로 이겨냈는지 그녀의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저는 조니 에릭슨 타다의 희망 노트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녀는 4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비록 전신마비가 되었지만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 법도 배웠습니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할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남편을 만나서 결혼해서 40년 넘게 현재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니와 친구들이라는 국제 장애인 단체를 설립해서 수많은 장애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인도, 쿠바, 우간다, 카메룬 등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조니는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련이나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의 대용품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된다.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을 더해준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죄로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연약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분명하면 좋겠는데,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의 연약함을 마주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잘 알고 계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놀라운 선교적 열매를 맺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복음이 유대 문화를 넘어서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없었으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 다음으로 바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바울의 신앙과 사역 또한 바울의 편지를 읽으면서 감탄의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있구나 감탄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영적인 공격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관계적인 어려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가시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신체적인 연약함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학자가 제일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육체의 연약함이 있다라고 고백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아멘.
바울의 육체에 사람들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없신 여길 만한 연약함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잘 띄는 연약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글은 잘 쓰는데 말은 잘 못한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보니까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으나 그의 말은 시원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 대한 조롱입니다.
저 목사님 글은 참 잘 쓰는데 말은 잘 못해
신체적으로 핸디캡이 있으니까 설교에 집중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그런 핸디캡이 있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 저의 신체적인 연약함 때문에 방해가 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가 이러한 연약함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죠.
이것만 없으면 내가 더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멋있게 자신을 포장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SNS에 올리는 사진은 다들 멋지고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요즘은 사진 보정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동네 스튜디오에 가서 사진을 찍어도 정말로 예쁘게 보정해 주죠.
사진을 찍고 보정된 모습을 보면 나도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멋지게 생겼나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시대에는 외모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성경에서 외모가 가장 출중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제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딱 한눈에 봤을 때 너무너무 멋진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생각해 보니까 사울 왕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엘 상 9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오.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집니다.
모든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는데 남들보다 키도 큽니다.
이건 반칙 아닙니까?
얼굴이나 키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모두 다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외모가 출중했던 인물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이렇게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우리의 왕이라고 하니까 환호했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에는 힘이 있습니다.
대형 집회에 가거나 대형 콘서트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있습니다.
대중에게 환호를 받는 사람은 힘과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사울 왕도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해서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겉모습 이미지를 보고 열광하기 때문에 그들을 의식하게 됐죠.
사람을 의식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될까요?
잠언 29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아멘.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가게 됩니다.
심지어 그 의견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양심대로 하지 못하고 그들의 의견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무에 걸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열광, 사람의 환호를 추구하면 안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이미지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감추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다 오픈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연약함을 최대한으로 숨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믿으면 나의 연약함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영국 선교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영국 복음주의 단체 CMS 처치 미셔너리 소사이어티를 이끌었던 맥스 워렌이라는 사람입니다.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독실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부모님처럼 신실한 선교사가 되고자 영국 최고의 대학 캠브리지에서 공부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24살의 나이로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갔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그의 인생을 다 바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건강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아프리카 풍토병에 걸려서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송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꿈이었던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절망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막막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영국에서 대학생 선교 운동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케임브리치7 이후에 영국에서 대학생 선교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맥스 워렌은 14년 동안 캠브리지 대학에서 체플린으로 그 일을 섬겼습니다.
그 이후에 영국 최대 선교 단체 CMS를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21년 동안 CMS 대표로 사역하면서 영국 선교 운동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별히 1950년대 후반에는 WCC가 영국에서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맥스 워렌은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WCC가 영국 선교 단체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아주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제가 보스턴에서 박사과정 공부할 때 지도 교수님께서 이 맥스 워렌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복음주의자가 고등 교육을 받으면 세계 선교를 위해서 놀랍게 기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좋은 모델이 맥스 워렌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가 꿈꿔왔던 필드 선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아주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생각했을 때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그를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에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19편 71절 함께 읽겠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아멘.
지금 고난 당하는 분들에게 제가 이 말씀으로 섣부르게 위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이제 고난 가운데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고난의 유익까지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 아래에서 참된 위로와 평강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냥 한 번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성경에서 3은 완전수입니다.
세 번 간구했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세 번 기도했다는 의미보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간절하게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세 번 하나님께 간과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의 기도이죠?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44절 함께 읽겠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요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잔 십자가가 지나가기를 위해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바울이 원하던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연약함 가운데서 온전하게 이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 라는 의미의 헬라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마지막 말씀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 보면 테탈레스 타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을 위한 모든 의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한 모든 대가가 완벽하게 다 지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완성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너의 연약함 가운데서 나의 능력이 다 완성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완성한 구원 안에서 그냥 안식하면 된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아멘.
제가 오늘 설교 2번 대지 제목을 '그리스도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어떤 분은 예수님을 약하다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신학적으로 의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약함과 그리스도의 약함이 오버랩 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적 아픔이 있었듯이 예수님께도 그러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관계적 배신이 있었듯이 예수님께도 그러한 배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억울한 재판이 있었듯이 예수님께도 그러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종교적 정죄가 있었듯이 예수님께도 그러한 정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아픔과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기준으로 정죄당하고 저주받으셨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라고 분명히 성경이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죠.
하지만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잘못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픔과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다 경험해 보셨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아픔이 무엇인지, 인간의 약함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약하심 가운데 세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여러 가지 아픔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시 세우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 9절 말씀 빨간색으로 된 부분만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기서 머물다'라는 말은 잠깐 같이 있는 게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함께 '거주하다, 함께 장막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힘들 때만 잠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그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줄로 믿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은 베토벤을 향한 존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했고,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음악을 열었다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엄청난 일이죠.
엄청난 안목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1770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에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이동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음악가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베토벤은 10대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연주회를 하고 작곡을 해서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가 베토벤은 20대 후반이 되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뒤를 이을 음악가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앞날에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30세가 되던 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귀가 울리는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잘 안 들리고 성악가의 고음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귀에 들리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작곡하고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청력을 상실한 그는 결국 피아노 연주를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없으니까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난관도 작곡을 향한 그의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먼 상태에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교향곡 제9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은 모든 인류에게 바쳐졌다. 인간 감정의 모든 단계를 포용하고 범위와 개요가 기념비적이며, 지적인 이해력과 정서적 웅변이 어마어마하다. 이 교향곡은 오늘날 모든 교향곡 중 가장 위대한 곡으로 우뚝 서 있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2011년 영국 왕립의학회는 베토벤이 20대 시절 작곡한 작품 중에서 1568 헤르츠 이상의 고음이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왜 이런 분석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이 젊었을 때에는 고음을 많이 사용했는데, 40대 이후로는 고음의 비중이 20% 이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청력이 쇠퇴함에 따라서 그의 작곡 스타일도 변화된 것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의 영향을 덜 받고 스스로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베토벤은 낭만주의 시대를 연 음악가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약점이라고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그 약점을 통해서도 더욱더 놀랍게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연약함 가운데 온전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자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 항상 인상을 쓰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잘생기고 멋진 친구였는데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제가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답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도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에게 직접 배운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지만, 바울은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0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데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아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하죠?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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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약한 모습 그대로 사랑받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약한 모습 그대로를 안아주시고 용납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부모님께 진정한 사랑을 받는 자녀에게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성취를 하든지 못 하든지 상관없이 부모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희 딸이 중3인데 지금도 제가 꼭 안아줍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날이면 더 안아달라고 합니다.
시험을 잘 봐도 안아달라고 하고, 시험을 못 봐도 안아달라고 합니다.
저희 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시험 성적과 상관없이 아빠가 나를 항상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 못해도 나를 향한 아빠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63장 3절에 이런 가사가 줄을 함께 불러볼까요?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여기까지만 부르겠습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왜 더욱 귀히 여기실까요?
착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 되고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할 때에는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약할 때 더욱더 귀하게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 시간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를 귀하게 바라보십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밝고 형통한 날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날은 어둡고 힘든 날이었다.
단 1분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에 계셨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의 신비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할 때에는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만족을 누릴 때 우리는 굳이 보이지 않는 것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에서 이제 어려움을 만나게 되죠.
생각지도 못했던 연약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구하죠.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안심해라. 내가 함께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아멘.
두 구절이 함께 있는데 17절과 18절은 서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란이 영광을 이루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여 보는 것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보이는 것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가정, 눈에 보이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구하게 될까요?
여러 가지 환란을 당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마주하게 될 때 보이지 않던 것을 우리가 바라보게 됩니다.
환란 당할 때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일시적인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 잘 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우리 정신없이 살아가죠.
그러다가 환란을 만날 때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일시적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했던 수많은 환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고, 수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돌에 맞기도 하고 세 번이나 파손을 당했습니다.
춥고 굶주리고 목마른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일시적인지 생각했습니다.
그가 당하는 환란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받을 그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7절에 보면 환란이 영광을 이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룬다라는 단어가 영어로 prepare, produce 입니다.
환란이 영광을 준비하고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이 준비되고 만들어진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난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기 때문에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욱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 나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EYMPanO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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