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1월 2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1. 4. 09:21
너의 성장을 보이라
디모데전서 4:11-16 | 문대원 목사
2025-11-02
 

여러분은 사람의 능력이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의 중학교 때 지적인 능력과 고등학교 때 지적인 능력이 똑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달라질 수 있겠죠.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는데 고등학교 때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그러면 대학교 입학할 때의 지적인 능력과 그 이후의 지적인 능력은 어떨까요?
똑같을까요? 아니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당연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학교 입학 때까지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 이후로 게을러져서 능력이 쇠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입학 성적이 그 사람의 최종 능력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학벌로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벌이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깨달았습니다.
보스턴에서 공부할 때 최고의 대학을 나온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대학, 조금 안 좋은 대학 나온 사람도 만났습니다.
이 중에서 누가 유학생활을 잘할까요? 

당연히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이 잘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 중에서 박사 학위를 못 마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안 좋은 대학 나왔는데 박사 학위를 마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학부 성적과 대학원 성적이 바뀔 수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성적과 고등학교 성적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노력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제가 한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학벌은 그 사람이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노력한 것의 결과입니다.
그 이후에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다 알 때까지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캐럴 드렉 교수는 세상에 두 가지 마인드셋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고정 마인드 셋이고, 둘째는 성장 마인드 셋입니다.
고정 마인드셋은 탁월한 능력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성공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성공할 사람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반면에 성장 마인드셋은 사람의 능력이 변화된다고 믿습니다.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노력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고정 마인드 셋에게 성공이란 실수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기 원합니다. 

다분히 결과 중심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반면에 성장 마인드셋에게 성공이란 지속적인 배움과 성장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장했다는 칭찬을 받기 원합니다.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성장을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똑똑하다는 칭찬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성장했다는 칭찬을 좋아하십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종류의 칭찬입니다. 

전자는 결과에 대한 칭찬이고 후자는 과정에 대한 칭찬입니다.
미국의 작가 벤저민 바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 또는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배우려는 자와 배우지 않으려는 자로 나뉠 뿐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실패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장은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무역 도시였고,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대극장, 도서관, 아고라 광장이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또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있었습니다.
이방 문화와 종교의 힘이 막강한 곳에서 디모데가 사역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아멘.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행동으로 보여줄 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을 배우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린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문법과 규칙을 배우지 않습니다.
엄마가 말하는 것을 듣고 흉내내면서 배우게 됩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리란 행함의 문제이기 전에 봄의 방식이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가면 사람들이 출입문을 잡아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앞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고맙다고 말하고, 나도 뒷사람을 위해서 문을 잡아줍니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문화가 있으면 모두가 다 좋습니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보아야 합니다. 

배려하는 문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보아야 합니다.
규칙을 만들어서 벌금 내게 한다고 이걸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다운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윤리는 행함의 문제이기 이전에 보는 것의 방식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다운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리더는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모습, 경건한 모습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으실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에 관심이 많이 있고, 학교 교육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최고의 교육은 부모가 직접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죠. 

신앙 교육을 잘하려면 부모가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그 삶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 아내는 집에서 노래를 찬양을 많이 부릅니다. 

음식하면서도 찬양을 부르고, 설거지하면서도 찬양을 부릅니다.
한 번은 딸을 위해서 또띠아를 구우면서 손을 들고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저희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또띠야 구우면서 손 들고 찬양한 사람이 또 있을까? 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기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는 유튜브 보면서 아이에게 책 읽으라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행동을 봅니다.
그리고 부모가 한 대로 그대로 따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 부모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모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 보여주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다음 세대와 청년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아멘.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정이 깨어진 시대입니다.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부모님의 결혼 생활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엄마처럼 평생 고생하느니 그냥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기 위한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자상한 아버지, 신실한 남편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직원들을 사랑한다는 말도 누구나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직원들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직원들의 입장과 복지를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행동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 사장님들이 회사에서 우리 신우회에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직원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직원들은 사장님의 예배에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의 행동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주여, 주여 종교적으로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든 사람의 본이 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리더가 보여야 하는 중요한 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아멘.

한글 성경에는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라고 하는데요.


영어로 보니까 성숙함을 Progress 라고 했습니다.
Progress 하면은 성장, 진보를 뜻합니다.

성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성장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성장이 있고,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성장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성장에는 신체적 성장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잘 먹고 잘 자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의도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의도적인 성장에는 지적인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지적인 성장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다고 자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지 학습이 일어나고 성장이 일어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성장은 자연적인 성장이 아니라 의도적인 성장입니다.
성장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성장하기로 결단하고 성장을 위해서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성장입니다.

여러분은 성장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성장하는 것이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목표입니까?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결단하고 대가를 치르고 계십니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믿음의 진보 성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여기서 말하는 또 진보가 영어로 progress입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거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은 믿음의 변화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과거에 비해서 믿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믿은 지 30년 됐다고 무조건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도 믿음이 변합니다.

젊었을 때는 정말 신실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믿음의 성장이 일어날까요? 

15절에 보니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한글로는 전심 전력이라고 나와 있는데 영어로 보면 immerse yourself 라고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빠져서 몰입하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10년 동안 조깅을 매일 5km씩 했다고 합니다.
1, 2년도 아니고 10년 동안 했습니다.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기록이 이전보다 1초도 빨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심전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취미로 설렁설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취미로 하는 일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취미로 바이올린 하는 것과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죠.
바이올린 전공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전문가에게 집중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완전히 빠져서 몰입해야지 비로소 연주 실력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취미입니까? 

전공입니까? 

여러분은 그냥 적당하게 취미 선에서 믿으십니까?
아니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전심전력하십니까?

 

요즘 유튜브에 가면 동기부여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영상을 보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동기부여가 인생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동기부여는 어떤 일을 시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도전할 수 있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한 번의 도전으로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인생은 꾸준함 자기 훈련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진정한 변화는 동기부여로 일어나지 않고 자기 훈련으로 일어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한 말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동기부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마다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동기부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훈련의 핵심에는 꾸준함이 있습니다. 

한두 번 하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전심전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빠져서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영적인 일에 전심전력할 때 그때 신앙의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유튜브 설교 많이 듣는다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천천히 조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지 성장이 일어납니다.

제자 훈련, 사역 훈련, 성적 훈련 같은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지 그때 성장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녔어도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그토록 교육과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본적으로 전심 전력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훈련을 잘 받아서 그렇습니다. 

뭐 하나를 해도 대충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이 전심 전력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어제는 지역사회를 위한 만촌 페스티벌이 있었습니다.

 


왜 행사 이름을 동신 페스티벌이 아니라 만촌 페스티벌이라고 했을까요?
우리 동네가 만촌동이니까요. 

지역 주민들이 더 친근하게 느끼고 더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존의 바자회는 교회에서 물품을 준비하고 교회에서 판매합니다.
교회가 주관하는 행사죠.
하지만 이 플리마켓은 교회가 장소를 제공하고 셀러들이 와서 자기 물건을 판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소를 제공하는 플랫폼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어제 이 참여했던 셀러들 중에서 사회단체, 장애인 단체, 실버 단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수익금은 취약계층을 위해서 사용되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일 한다고 근처 식당에 왔다가 오신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사실 작은 규모로 하려고 했는데 준비팀에서 열정적으로 임해서 이렇게 성대한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뭐 하나를 해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의 정신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에 뭐 하나 해도 대충 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임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장도 나타나고 교회적인 성장도 나타납니다.

 

여러분, 개인이 성장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교회는 회사와 다르기 때문에 반응에 대한 변화에 대한 반응이 느립니다.
회사는 변화하지 않으면 바로바로 매출의 직격탄을 받습니다.
당장 매출이 떨어지기 때문에 회사는 끊임없이 변화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변화되지 않아도 계속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교회는 변화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교회 건물도 변화되지 않고 예배 형식도 변화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변화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간단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다 떠나게 됩니다. 

교회가 변화를 거부하면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변화와 성장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취미 활동하듯이 해서는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노력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 안일해지는 순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전심전력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임해서 날마다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삶과 교리를 모두 살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은 하나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내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내 자신과 내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아멘.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가 있고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가 있고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요?

교회의 전통 문화의 차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의 차이이고 신학의 차이입니다.
기도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이 사역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가끔 보면 교리가 뭐가 중요하냐, 신학이 뭐가 중요하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삶이 중요하지 신학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념은 중요하지 않고 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치인들이 어떤 정책을 제안하고 펼쳐 나갑니다.
부동산 정책, 외교 정책을 펼쳐 나갑니다. 

그러면 정책과 이념이 무관할까요?
보수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이 진보적인 정책을 펼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념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정책을 펼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고 있는 교리에 따라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삶과 교리는 나눌 수 없습니다. 

올바른 교리,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정통 교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경우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이단이 활개를 쳤습니다. 

특히 기독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단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아리우스 이단이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보다는 영광과 신성이 더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면 아버지에게 더 큰 권위가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죠.
아리우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영어인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혼부터 영원까지 계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아리우스가 주장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예수님께서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뒷구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그때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 사상은 잘못된 이단 사상입니다.
아리우스가 AD 4세기 사람인데요.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을까요?
전체 교회의 절반 정도가 그를 따랐습니다.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이단이었습니다.
지금도, 21세기에도 아리우스의 사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등한 신성과 영광을 가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입니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 교인 수가 기독교 전체의 약 1% 정도 됩니다.
그런데 4세기에는 아리우스를 따라가는 사람이 절반 정도 되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여호와의 증인이 전체 교회의 절반 정도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동네마다 교회가 다 있고 엄청 큰 여호와의 증인 교회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입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을 따라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성도들은 엄청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잘못된 그런 기독론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신학을 가지면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논리적으로 행위 구원에 빠지게 됩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말씀을 지켜야지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행위 구원에 빠지게 되면 그 논리적인 결과는 율법주의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이것도 해야 된다.
정확하게 이단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죠. 

여호와의 증인이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한국에서도 열심히 하고 외국에서도 열심히 합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도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도 아닙니다.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과 율법주의에 빠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아리우스의 이단 사상을 지적했던 것이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목숨을 걸고 이단 사상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아리오스 사상이 활개를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올바른 교리는 중요합니다.

올바른 신학도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듣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내 생각에 동의되는 것만 받아들이면 우리가 건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0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아멘.

바울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전했습니다.


영어로 the whole counsel 이라고 하는데요.

모든 계획, 모든 목적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계획을 전했는데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중에 일부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 전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있는데 나의 생각과 경험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경험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지금까지 읽은 책이 총 몇 권이나 되십니까?
한 천 권쯤 되십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가봤던 나라가 총 몇 개국이십니까?
한 100개국쯤 가보셨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경험은 너무나도 작은데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둘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 제일 좋고 내 경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계획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 모든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그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 하는 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성경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사랑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고, 정의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고, 사회 변화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둘 중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전도 종족에게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회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은 정의와 구제를 강조합니다.
비즈니스 선교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치우친 태도는 자기 생각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이 두 가지 모두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 구원이 중요한 만큼 사회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정의와 구제가 중요한 만큼 복음 전도도 중요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 모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나 옛날에 다 해봤다라고 말하지 않고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나아갈 때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아멘,

성공은 내가 이룬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경험한다 하더라도 배움과 성장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M2aOqvccv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