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0월 12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0. 22. 13:51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성 (8) 겸손이라는 전통
베드로전서 5:1-11 | 문대원 목사
2025-10-12



여러분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리더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주장이 강해서 자기 말대로 해야 하는 그런 리더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리더와 함께 일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카리스마가 강한 것을 보고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리더십이 아닙니다.
리더십은 한마디로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존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향한 인격과 신앙을 향한 존경심이 있어야지, 우리가 그 말을 따라가게 됩니다.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고 무서워도 존경심이 없으면 그 말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존경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과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힘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이 리더십은 아닙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상대방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서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베풀어서 사람들을 매료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기적에 열광해서 그분을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영향력을 끼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던 제자들은 모두 다 자발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누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가정을 떠났고, 자발적으로 배를 버리면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미국 100대 기업의 임원 1만 6천 명 중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룬 사람들에게 임원들에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직원들을 사랑했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들이 더욱 성장하기를 꿈꾸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대방을 소중히 여길 때만이 그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를 이끌 수 있다. 무능한 리더는 때로 목표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망각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는 리더가 훌륭한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리더입니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훌륭한 리더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역사상 누구도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교회에 가장 중요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본문은 개인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물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무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고 교회에 속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먹잇감을 사냥할 때 그냥 아무렇게나 하지 않습니다.
공격할 대상을 특정해서 딱 그것만 노립니다. 

사자가 노리는 그 대상은 무리에서 떨어져 있거나 무리의 가장 외곽에 있는 동물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리에서 떨어져서 혼자서 생활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에 사자가 등장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전에 하나님의 양무리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리더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머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합니다.
누구의 양무리입니까? 

하나님의 양무리입니다.
이것은 양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자와 리더들의 책임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장로는 지금의 장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리더를 의미합니다.
목사와 장로뿐 아니라 교사와 순장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리더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책임을 받았습니다.
나의 양이 아닙니다. 

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정말 훌륭한 목회자는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자기 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합니다.
자기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정말로 훌륭한 목회자는 은퇴한 이후에 진가가 발휘됩니다.

권성수 목사님께서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은퇴하신 이후에 더 빛이 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일에 증인이 되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라디오를 들으십니까?
출퇴근길에 차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진행자가 바뀌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5년 동안 진행했던 DJ가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왔습니다.
그럼 한동안 새로운 진행자가 고생을 합니다. 

이전 진행자를 그리워하는 청취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죠.
예전 진행자를 좋아하는 사람, 지금 진행자가 좋다는 사람 이렇게 반반 나뉘게 됩니다.
5년 동안 진행했던 라디오 디제이가 떠나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하물며 20년 동안 설교했던 담임 목사가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예전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 지금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 교회에서 권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 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권 목사님을 좋아했던 분들이 저를 가장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예전 목사님과 지금 목사가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전 목사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지금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전 목사님도 양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지금 목사도 양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이 아니고 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이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리더가 바뀌어도 오직 하나님만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과 사랑은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했을 때 그에게 생각났던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심으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아멘.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양을 먹이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은 그분의 양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양을 돌보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시지요.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의 소원은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고, 베드로가 그의 편지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명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의 양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해설하면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유의해야 하는 세 가지 악은 게으름, 이익 추구, 권력욕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교회의 리더는 게으르면 안 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해도 안 되고 권력을 추구해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디다케라는 문서가 있습니다.성경은 아니지만 교리 문답, 교회 의식, 교회 조직에 대한 지침서입니다.
이 문서에 보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순회하는 사도와 전도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전도자가 너희에게 왔을 때 주님처럼 영접하라. 하지만 그는 하루 이상 혹은 필요하다면 이틀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가 사흘 동안 머문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사도와 전도자는 먹을 빵 외에는 아무것도 받으면 안 된다.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을 요구하는 사역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을 본다면 거짓 선지자이다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최근에 통일교가 정치권과 연루되면서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나 통일교나 똑같은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기독교에 대한 모욕입니다. 

통일교는 교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목사를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만약에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얼마든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저를 비판해도 좋습니다.
통일교와 같은 이단은 재정적으로 투명하지 않습니다.
교주가 수백억으로 도박을 해도 아무도 제재할 수 없습니다.
교단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니까 검찰이 나서서 조사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10만 원을 사용해도 영수증으로 다 보고해야 합니다.
제가 외부 손님에게 식사 대접을 하면 영수증의 날짜와 장소, 만난 사람을 기록해서 제출합니다.
아무리 담임 목사라 하더라도 당회의 결의 없이 마음대로 재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재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의 리더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더러운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은 교회의 중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사역을 통해서 더러운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은 교회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아멘.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덕적인 성품을 배우는 일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우리는 말을 가르칠 때 먼저 문법의 규칙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흉내냄으로써 말을 배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갓난 아기에게 문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냥 계속해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아이가 그 말을 이해하게 되고 그 말을 따라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어떤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100가지 계명을 가르쳐서 이것을 매일 외우고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윤리는 복음의 언어를 말하고 그것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가 그것을 이해하게 되고 언젠가 따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리더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문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강압적인 자세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대로 양무리의 본이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리더들에게 권면을 한 베드로는 또한 젊은 자들에게도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젊은 자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연수가 길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이들에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아멘,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겸손으로 옷을 입어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덕목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 겸손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 옷을 사거나 새 자동차를 사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누구도 우리 중에서 본성적으로 겸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거할 때 그때 우리는 겸손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기도할 때 우리는 겸손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입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는 말은 이제 팔을 걷어붙이고 섬길 준비를 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대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대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는 이 표현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4절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는 말은 바로 이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겸손을 미덕으로 소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어느 누구도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겸손은 힘없는 자들의 비굴한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겸손을 헬라어로 타페이너스 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는 나약하고 비굴하고 수동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명예와 평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자서전을 보면 자신에 대한 자랑이 너무나도 많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겸손은 있으면 좋고 뭐 없어도 되는 덕목입니다.
학벌이 좋고 똑똑한 가수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꼭 겸손해야 하나요 겸손하면 좋지만 겸손하지 않은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야말로 겸손에 대한 세상의 관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겸손은 필수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겸손하면 좋지만 꼭 겸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학벌 좋고 능력 있으면 굳이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겸손이 선택 사항이지만 교회에서는 겸손이 필수 사항입니다.
세상에서는 돈 자랑, 학벌 자랑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교회에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좀 이상하게 쳐다봐도 됩니다.

신구약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3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야고보서 4장 6절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아멘, 

신구약 성경은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태도입니다.
교만의 핵심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이 하지 않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고 상대방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덜 생각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생각에 초점이 자기에게만 있습니다.
내가 좋아야 하고 내가 편해야 합니다. 

내가 집중을 받아야 하고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생각의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내가 좋고 편안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고 편안한지를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지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하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나를 생각해 주고 나를 배려해 주기 때문에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자기 이야기만 하십니까? 

아니면 상대방에게 질문하십니까?
저는 '복음과 도시'라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께서 시작하신 교회 개척 운동이자 교회 개혁 운동입니다.
지난 로잔 대회를 준비할 때에도 이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이재훈 목사님, 이인호 목사님 등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 복음과 도시 모임에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절대로 자기 교회 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사역을 했다, 

우리 교회 새 신자 이렇게 많이 왔다 이런 식으로 절대로 자기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근데 한 번은 어떤 목사님께서 단톡방에서 자랑을 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새 가족 행사를 했는데 수백 명의 새 가족이 왔다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도 그 말에 대꾸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과 도시에는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5만 명 모이는 교회도 있고 5천 명 모이는 교회도 있고 500명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만약에 서로 자랑하는 분위기라면 큰 교회만 자랑할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큰 교회 앞에서 자랑할 게 없겠죠.

하지만 자랑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교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겸손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섬기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교회에 섬기러 오는 경우가 있고,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섬기러 오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 중심입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합니다.
반대로 교회의 섬김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나 중심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올 때 손님 마인드로 옵니다. 

여러분 손님 마인드로 교회에 오면 어떨까요?
불평할 게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주차도 불편하고 화장실도 불편합니다.
안내도 친절하지 않은 것 같고, 식당도 친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손님이 많으면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청지기는 다릅니다. 

청지기는 교회를 섬기기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 불편한 사람 없는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본당이 비좁아서 비전관에서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봉사자들과 중직들은 비전관에서 예배를 많이 들으십니다.
새 신자들이 본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본당에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새 가족을 위해서 양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마음입니다. 

교회에 청지기가 많으면 교회가 평안합니다.
반대로 교회에 손님이 많으면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교회에 손님으로 오십니까?
아니면 청지기로 오십니까? 

여러분은 교회의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십니까?
아니면 교회에 섬기러 오십니까? 

 

청지기는 주인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진심을 다해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 여러분 이 마음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통이고 가치입니다.
겸손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이고 언어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가르칠 수 없는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본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우리의 모든 마음을 감찰하신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기억하시고 높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 겸손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사탄의 훼방과 공격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어떻게든지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근신하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장에도 나오고 4장에도 나오고 5장에도 나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근신하라는 말은 침착하고 냉정해라.
술 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침착하고 냉정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 사탄의 존재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탄을 믿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전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내 형제를 굳게 하라.

 

아멘, 

사탄이 베드로를 소나기에 넣기 위해서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탄의 공격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는 사탄에게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는 사자 하면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는 사자 하면 로마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에 있던 사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아서 성도들이 원형 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던져졌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달려들어서 그들을 찢고 뜯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 전쟁과 같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기도가 필요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이 평탄하고 단조로우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기도하지 않아도 모든 게 다 좋은데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전쟁과 같습니다.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교회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교회가 감당하는 생명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신실한 교회에는 기도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삶을 훼방하는 사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그 사탄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사탄을 대적한다는 것은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를 공격하는지 우리가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동적이고 결의에 찬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악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탄이 주는 그런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얼마나 악하고 그가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과 완성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서 직접 본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고난이 다가오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의 큰 공격을 앞두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탄의 공격 이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공격이 왔을 때, 고난이 왔을 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이 오기 이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 관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프고 나서 건강 관리를 하는 경우가 있죠.
그런가 하면 아프기 전에 건강 관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아프기 전에 건강 관리한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 몸에 통증이 있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병이 진행되었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아프기 전에 건강 관리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공격이 있기 이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탄의 유혹과 계략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인간보다 훨씬 더 똑똑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있었기 때문에 모든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보다 훨씬 더 똑똑하지만 하나님보다는 훨씬 더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기 때문에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는 줄로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탄의 본성은 교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으로 옷 입는 것입니다.

 

우리 본문 6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겸손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통이고 가치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가르칠 수 없는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무리를 돌보되 겸손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본을 보이시기를 축원합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겸손으로 옷 입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NF_8NyDVP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