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09-21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제일 하기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아의식이 생긴 이후에 내 마음대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보면 너무나도 예쁩니다.
그렇게 예쁜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싫어'입니다.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가 엄마가 이제 집에 들어가자 하면 '싫어'라고 하죠.
저녁이 되어서 이제 씻고 자자 하면 싫어라고 말을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부모님 말씀에 불순종해야 한다라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자동적으로 불순종합니다.
자아의식이 생긴 순간부터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몇 살입니까? 7살입니까 17살입니까?
아니면 27살입니까?
나이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자녀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밤에 늦게 잡니다.
7살도 늦게 자고, 17살도 늦게 자고, 27살도 늦게 잡니다.
늦게 자니까 아침에 못 일어나죠.
부모가 깨워줘야 합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에 순종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순종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 귀에 솔깃한 유혹은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멘,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실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내가 정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그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타락한 본성을 가지게 된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자 하는 성향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순종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남성들이 군대에서 느끼는 기분입니다.
군에 가면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상관의 명령에 질문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요즘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라고 합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이 200만 원 나옵니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 많이 올랐죠.
여러분 20년 전 불과 그때 병장 월급이 4만 4천 원이었습니다.
월급이 많이 올랐으니까 여러분은 다시 군대에 가시겠습니까?
200만 원 준다고 하면 다시 군대 가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무조건 순종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주어도 그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순종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 그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베드로전서 2장 후반부와 3장 초반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2장 후반부만 읽었는데, 설교에서는 3장 초반까지 함께 다루고자 합니다.
2장 13절과 18절, 3장 1절과 5절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하라' 입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 13절에 보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순종하라고 하고요.
18절에 주인들에게 순종하라라고 하고, 3장 1절에 남편에게 순종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제도에 순종하고 주인에게 순종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 말씀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주인에게 순종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에게 거역하는 종은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거역하는 아내도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위에 있는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이 당연한 일을 하라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21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아멘,
겉으로 볼 때에는 다 순종합니다.
주인에게도 순종하고, 상사에게도 순종합니다.
대놓고 거역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는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왜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13절에 보니까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순종합니까?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권위자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권위가 최종적이었습니다.
왕이 명령하면 무조건 해야만 했습니다.
지금처럼 이유를 묻거나 따질 수 없었습니다.
왕이 명령하면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왕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종 권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왕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를 그 자리에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총독이 특별해서도 아닙니다.
그를 그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위하여 권위에 순종합니다.
본문 18절에서는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원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아멘,
어떤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두려움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누구를 두려워야 할까요?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권위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권위와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따르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따르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입니다.
최근에 이제 프랑스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긴축 재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재정 적자 상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국가 부채가 20년 전에는 GDP의 60%였는데 지금은 GDP의 114%가 되었습니다.
시간당 국가 부채가 180억 원씩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 적자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폭력과 방화를 하며 격렬하게 시위했습니다.
제가 정치 전문가는 아니니까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유독 프랑스에서는 시위를 할 때 폭력과 방화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미국, 영국, 독일에서 이 정도로 격렬하게 시위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스턴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프랑스에서는 시위를 하면 상점을 부수고 불을 지를까요?
프랑스 정신 중에 유명한 걸로 '톨레랑스'가 있지 않습니까?
다른 생각과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톨레랑스 정신인데, 왜 프랑스에서는 폭력적인 시위가 많이 있을까요?
저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왕정을 타파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셨던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남아 있고, 후손들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폭력을 사용해서 뜻을 이룬 사람은 또 다른 폭력에 의해서 내려오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정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왕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혁명을 했는데,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 중에 하나가 더 높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계속되는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몰락했고, 그 이후 다시 부르봉 왕정이 복구되었습니다.
저는 이 역사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사에게 붙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죠.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아멘,
칼을 가진 자, 칼을 의지하는 자는 칼로 다 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력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군사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그분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억압자인 사탄을 무찌르셔야 했다. 그분의 손은 검을 움켜 잡은 것이 아니라 못 박히기 위해 펼쳐졌다. 그분은 창을 드신 것이 아니라 창의 옆구리를 찔리셨다. 그분은 심판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으러 오셨다. 우리를 위해서'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길과 예수님의 길은 너무나 다릅니다.
세상은 힘과 권력으로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한 가지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순종일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아담의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본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있으면서 베드로는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절대로 그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말이 사탄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순전히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는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각대로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다 망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하나님께 제안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이후에 베드로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자기 생각대로 자기 열심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베드로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순종하고 순종하고 순종해라라고 말합니다.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와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고난은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어떤 고난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발생한 고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고난은 선을 행하는 중에 당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고난은 똑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종류의 고난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아멘.
두 가지 종류의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지어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을 행하는 중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인해서 오는 고난에는 칭찬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호 위반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징계를 받으면 거기에는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입시를 해서 징계를 받으면 거기에도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을 행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고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선을 행하는 중에 당하는 고난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추방당하는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이슬람 국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추방당하신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당하는 고난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주차 안내를 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심한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주방에서 봉사하다가 힘든 일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가운데 당하는 이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이 고난을 참고 인내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본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고난을 당할 텐데 어떤 모습으로 고난을 당할 것인지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 메시아가 고난을 당할 것인데 그의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잠잠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주님께서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이사야 53장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직접 연관시킨 것은 오늘 본문밖에 없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 전체에서 이사야 53장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것이라고 직접 말한 사람은 베드로가 유일합니다.
베드로가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사야 53장과 십자가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리더였던 베드로는 아주 오랫동안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지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고난 가운데 잠잠하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사야 53장에 예언되었던 메시아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여기에서 본을 뜻하는 헬라어가 휘퍼 그라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아이들이 글자 쓰기를 할 때 그 위에 따라 쓸 수 있도록 하는 견본을 뜻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아이들이 영어나 한글 배울 때 따라 쓰기 할 수 있도록 만든 교재가 있습니다.
점선으로 희미하게 적어놓고 그 위에 따라서 쓸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아이들이 따라 쓰기 교재 위에 쓰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선을 위한 고난 가운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에 보니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부탁하셨습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단어가 영어로 hand over 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거죠. 넘겨주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사람을 잡아다가 재판장에 넘겨줄 때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잡아서 공회에 넘겨주었습니다.
죄 없고 의로운 사람들을 붙잡아서 넘겨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고기로 심판하신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서 총독에게 넘겨주었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의를 위한 고난 가운데 인내할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판단과 심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고 불공평해 보이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믿으셨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너무나도 불공정한 재판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억울한 재판을 받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억울하게 공격당하고 억울하게 책임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와 같이 불공정한 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불리한 사람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그들을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고 잠잠히 계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인간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하늘에서 천군 천사가 내려와서 로마 군사들을 다 공격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의 무죄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무죄를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불공정한 재판 가운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부탁드렸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런지 하나님께서 판단해 달라고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최종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중에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부탁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도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 합당한 판결을 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아멘,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에 대한 욕구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자유 의지와 우리 마음의 욕구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죄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신랄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그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사랑합니다.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사랑합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랑하는 죄가 어떤 모습인지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요?
여러분 알코올 중독자의 삶이 어떤지 실제로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사람이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간이 다 망가졌다고 합니다.
간이 제 기능을 못하니까 자녀에게 간을 이식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간을 이식해 주었으면 이제 술을 끊어야 합니다.
새 마음으로 새 출발해서 나를 위해 희생한 자녀 앞에서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술을 마셨고 결국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죄가 이렇게 악하고 유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죄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 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죄가 얼마나 악하고 더럽고 추한지 알면 우리는 그 죄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의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서 사망에 이를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 의의 종이 되어서 생명에 이를 것이다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순종하듯이,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아멘.
사망에 이르는 길은 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게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순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순종 잘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순종은 매일매일의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순종할 수 있는지 확인하십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왕이 타는 말을 훈련하는 훈련 센터가 있다고 합니다.
킹 압둘라지즈, 라비엔 홀센터라는 곳이 유명한데요.

이곳에서는 매년 우수한 혈통의 말들을 선발해서 훈련합니다.
여러 가지 체계적인 훈련과 테스트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중에 마지막 훈련은 조련사가 호각을 불면 무조건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입니다.
장소와 상관없이 상황과 상관없이 무조건 호각 소리에 멈추는 훈련을 받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런 호각 소리에 멈춰 서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힘든 상황으로 말을 몰고 가서 거기에서도 순종하는지 살펴봅니다.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말에게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오아시스 근처로 말을 끌고 갑니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말들은 물을 마시러 뛰어갑니다.
갈증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빨리 가서 물을 마시고자 합니다.
바로 그때 조련사가 호각을 봅니다.
대부분의 말들은 너무나 목이 마르기 때문에 호각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대로 오아시스로 달려가서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간혹 한두 마리의 말은 호각 소리를 듣고 멈춰 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호학 소리에 멈추도록 훈련받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들이 왕을 섬기기에 합당한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왕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말이 왕을 섬길 수 있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크게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절박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호각 소리를 듣고 멈춰 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왕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은 죄의 욕구를 따르지 않고 선에 대한 욕구를 따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은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평소에는 내 마음대로 살다가 어쩌다 한 번 이벤트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향한 갈망,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그때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일상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아프리카 식수 사업을 위한 스케이 걷기 행사를 소개했습니다.
그날 다 신청이 마감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보내는 선교사로 살아가는 샌더스쿨을 소개했습니다.
그날 다 마감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보람된지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선을 향한 갈망, 선을 향한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6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불의의 도구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순종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선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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