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09-07
예전에 보스턴에서 공부할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데니 교수님이 쓰신 Quest for Belonging 이라는 책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소속되고자 하는 추구'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1936년 아프리카 진바보에서 네덜란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프리카는 유럽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인들의 종교였고, 하나님은 유럽인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제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쇠퇴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과거 식민 통치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프리카의 독립 이후에 그곳에서 기독교가 쇠퇴했을까요 아니면 성장했을까요?
학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빠른 속도로 교회가 부응했습니다.
여러분, 학자들의 말이 다 맞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미래를 예측하는 학자들의 말은 틀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독립 이후에 아프리카 교회는 어떻게 해서 성장하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 Quest for Belonging 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아프리카 교회가 독립한 이후에 성장한 것은 진정한 공동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유럽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1차적인 목표는 정치적인 독립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독립을 이루고 보니까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진 국가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 단일 문화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이런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이지리아의 경우에 250개에서 300개에 달하는 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한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종족이 250개가 더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른 문화와 다른 전통에서 온 사람들에게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주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바로 그때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독립 이후에 아프리카 교회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그렇게 아프리카화된 교회는 현지의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정체성을 찾게 됩니다.
집에서 혼자 예배 드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 교회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더 큰 은혜와 감동이 있습니다.
요즘 프로야구의 인기가 정말 뜨겁습니다. 특히 대구 분들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라이언즈 파크는 연일 매진이고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대구 사람이 되려면 라이언즈 파크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죠.
제가 대구에 온 지 6년 차가 됐는데 올해에야 라파에 갔습니다.
지난 봄에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야구장에 갔습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한 팀을 응원할 때 느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내 몸에도 파란 피가 흐르는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속감의 힘입니다.
나보다 더 큰 공동체에 소속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드라마 보고 혼자 예배 드리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큰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찾기까지 우리는 방황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속한 자리는 모퉁이돌 대신 예수님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입니다.
버린 돌, 보배로운 돌, 산 돌, 모퉁이 돌, 돌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돌이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돌들을 모아서 중요한 건물을 세우고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아멘,
여기에 보면 두 가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이 있고, 하나님께 택함 받은 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보배로운 산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퉁이 돌로 사용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1장 42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오,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아멘,
이 말씀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이 시편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 귀한 역사인데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의 인기가 아주 높았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말씀을 전했으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몇 명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신실한 여인들 몇 명만 남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의 믿음이 더 좋습니다.
그 여인들도 십자가 가까이에 있지 못했고, 저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슬퍼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거절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버림받은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택하셔서 가장 귀하고 보배롭게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건축 계획과 하나님의 건축 계획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과 지혜를 따라서 계획을 세웁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그것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에 대한 확신, 과학에 대한 확신, 진보에 대한 확신, 이 세계관을 한마디로 계몽주의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테니하우워스는 계몽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몽주의는 지금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힘, 과학의 힘을 믿는 세계관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여러분 합리적인 것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합리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절대로 이성과 합리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합리주의, 계몽주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제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왜 이 시대에 태어났는지? 왜 이 지역에서 살게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저는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가 왜 대구에 와서 살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해서 동신교회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을 살겠다고 계획한 적은 없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이 최선의 삶인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가 왜 발전했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과 러시아, 이 4대 열강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서 급속도로 발전했는지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 국민이 똑똑해서 발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똑똑해서 발전했다면 이전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강력했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강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난 5천년 동안 우리나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중국의 조공을 바치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렇지만 140년 전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로 우리나라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 가운데 우리나라가 놀랍게 발전된 줄로 믿습니다.
케이팝 드라마, 케이팝, 케이 드라마 이것이 왜 미국에서 인기가 있는지 여러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시골, 유럽 시골에 가도 왜 한국 라면을 팠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겠습니다.
인도의 인구가 14억 5천만이고, 중국의 인구가 14억 천만입니다.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입니다. 인도와 중국의 30분의 1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 청년들이 따라가는 문화는 인도나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입니다.
세상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계획 또한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세계관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학에는 열광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존재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면 그것으로 자신의 욕심만 채울 뿐입니다.
그 결과 타락한 인간은 선을 버리고 정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가장 선하고 가장 정의로우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예수님을 택하사 성전의 모퉁이 돌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지켜본 사람은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거절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예수님 역시 동일한 거절과 박해를 당하셨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생각이 다른지 보여주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7장 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아멘, 세상의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절대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많지도 않았고 용맹스러운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의 자금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 반지의 제왕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이 반지의 제왕에 보면 세상을 구하는 것은 위대한 종족이 아니었습니다.
전투에 능하고 용맹스러운 종족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호빗이 세상을 구했습니다.
이 소설을 쓴 J.R.R 톨킨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가 이 호빗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신명기 7장 7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에서 중간계 매들 어프를 구원한 호빗은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작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사람의 선택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전을 직접 지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집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성전의 모퉁이돌로 삼으셨습니다.
모퉁이돌은 건물의 기초가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돌입니다.
모퉁이 돌 없이는 제대로 된 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돌로 삼으셨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을 또한 산 돌로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아멘
이 말씀은 사실 놀라운 구절입니다.
베드로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도 산 돌 같은 존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직전 구절에서 산 돌, living Stone은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산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 또한 산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죠.
작고 연약한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산돌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께서 살아계신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진정한 생명을 보여주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주님의 그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 진정한 생명에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산돌이신 것처럼 그분 안에 거하는 우리도 산돌이 되어 갑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은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몇 가지 기독교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하다가 헬라어로 매노인데 '함께 거주하다 함께 살자'는 뜻입니다.

잠깐 같이 있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잠깐 데이트하는 연인 관계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는 부부 관계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렇게 인격적으로 연합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된 것처럼 다른 성도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각각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집을 이루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사명은 혼자의 힘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혼자 힘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연합될 때 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미국의 크리스천 정신의학자 커트 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 신앙생활하고 개별적으로 생명 사역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다른 성도들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진 시대입니다.
집에서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성경 통독하고 혼자 훈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향한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몸된 교회 안에 속하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 대신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들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신령한 집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초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멘
이 구절에서 중요한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과 '함께 지어져 간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수동태 현재 진행형으로 되었습니다.

영어로 보면 being joined together, being built together 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동태이니까 내가 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을 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어가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가게끔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선택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성전으로 삼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단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믿을 때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제까지는 성전이 아니었다가 오늘 갑자기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경직된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되는 유기체입니다.
우리가 흔히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야말로 진정한 생물입니다.
교회는 정체된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좋은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처음부터 좋은 교회이고 처음부터 건강한 교회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교회, 처음부터 건강한 교회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신실하게 사역할 때 그 교회가 점점 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과거에 건강한 교회였지만 신실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역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신교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헌신된 남자 성도들이 많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는 보통 여성들이 주로 사역을 주도하는데, 우리 교회는 여성 성도님도 많지만 각 부서마다 너무나도 신실한 남성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 교회에는 헌신된 남성 성도들이 많이 있을까요?
남성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많이 해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원로 목사님 때부터 신실하게 말씀으로 훈련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종교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되,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의 틀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하시는 분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순결한 마음을 지키고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것 너무나도 힘든 일이죠.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교회에서 뜬구름 소리 잡는 소리 하면요.
그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치밀하게 현실을 파악하되 확고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훈련하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형통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 단기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은 한 번의 예배, 한 번의 뜨거운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기간의 예배와 기도, 오랜 기간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모퉁이 돌 대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성전을 이루어가는 다른 성도들과도 연결되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조각은 제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제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성전을 함께 이루어 갈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정체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과거 시내산 언약에서 선포되었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교회의 정체성으로 확장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세 개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아멘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으로는 '내 소유'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로 보면 my treasure possessio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나의 특별한 소유, 내가 아끼는 보석같이 아끼는 나의 소중한 소유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의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죠.
거룩은 문자적인 의미로 분리를 뜻합니다.
죄로부터의 분리, 특별한 목적을 위한 분리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교회 전체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전체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시니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집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두 가지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역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딱 두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예배와 선교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서 존재하고 또한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미국의 신학자 더글라스 젠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배는 성령의 들숨이고 선교는 성령의 날숨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들이마시는 것은 바로 예배이고, 성령을 내쉼으로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선교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 올 때의 마음과 예배드리고 나갈 때의 마음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배가 살아있지 않는 교회는 절대 부응할 수 없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오늘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 절대 대충 드리지 마십시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대신해서 찬양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열어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십니다.
중학생 저희 딸이 저에게 굿나잇 키스 할 때 물론 몇 번 안 해주지만 전 너무나도 기쁩니다.
우리가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십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봉사하느라 사역하느라 예배에 소홀한 것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봉사 안 해도 좋으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야지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시고 고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소망을 잃은 사람이 복음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교회는 더욱더 성령을 의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과 지혜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혜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습니까?
전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논리로 불신 가족을 교회로 데려올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힘쓰는 교회는 더욱더 성령을 의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전도는 다단계 판매와 다릅니다.
다단계 판매를 하면 누가 좋을까요?
물건을 사는 사람이 좋을까요? 물건을 파는 사람이 좋을까요?
당연히 파는 사람이 좋겠죠.
하지만 전도는 다릅니다.
전도를 하면 누가 좋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좋습니까?
교회에 오는 사람이 좋습니까?
당연히 복음을 듣고 교회에 오는 사람이 유익합니다.
진정한 전도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친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방법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노방 전도도 있고 관계 전도도 있고 사회 선교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상담 센터를 설립하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성대학교 앞에 있는 은혜관 5층을 상담 센터로 사용하고자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합니다.
요즘 청소년들, 청년들 중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고, 자녀 양육으로 고민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성경적인 진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계명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교수님을 책임자로 모시고 전문적인 사역을 하고자 합니다.
이 사역은 우리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유익을 위한 사역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지역사회에 나타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담 사역, 회복 사역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정차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나그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UoGbAFxn0YQ
'문대원목사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5년 9월 21일 대구동신교회 (0) | 2025.10.22 |
|---|---|
| 2025년 9월 14일 대구동신교회 (0) | 2025.10.22 |
| 2025년 8월 31일 대구동신교회 (0) | 2025.09.22 |
| 2025년 8월 24일 대구동신교회 (3) | 2025.09.22 |
| 2025년 8월 17일 대구동신교회 (0) | 2025.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