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9월 14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0. 22. 11:49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성 (4) 자유의지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11-17 | 문대원 목사
2025-09-14



인류의 역사는 무작위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해석하는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자유의 확대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았을 때 점점 더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분 제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철폐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남녀 간에 차별이 있었는데 그것도 철폐되었습니다.
자유가 확대된 만큼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졌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지금이 더 행복해 보입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여러 가지 제한과 속박이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경제 활동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과거보다 지금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연 과거보다 지금이 더 행복할까요? 

더 자유로워지면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이것은 역사적인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인 질문이고 또한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심오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대구에 살지, 서울에 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에 대한 아주 피상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일까요? 

예를 들어서 알코올 중독자는 내 마음대로 술 마시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술 마시지 않을 자유가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 취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있을 자유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중독자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술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정한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우리는 그 죄의 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아멘, 현대 의학은 이것을 중독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반복하면 거기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중독되는 것은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의지를 가지고 선택했지만 중독되는 순간 내 의지를 박탈당하게 되고 그것에 노예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 성공의 노예, 명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미에서 내가 선택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의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우십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자유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베드로전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그러면 그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희는 이제 긍휼을 얻은 자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도 이와 동일한 구조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항상 전반부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후반부에 가서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직설법으로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명령법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직설법 indicative 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명령법 imperative 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반드시 직설법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명령법이 나와야 합니다.
명령법이 먼저 나오고 이렇게 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렇게 하면 행위 구원에 빠지게 되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아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로서 살아갈 때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서로 전쟁을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삐뚤어졌다 왜곡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활이 똑바로 되어야지 제대로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삐뚤어진 활로는 제대로 화살을 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본성으로는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위해서 특별한 결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정말로 죄 짓기 싫은데 억지로 죄를 짓기로 결단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은 다 죄입니다.

 

지난 가정의 달에 부부 사이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집에 와서 편하다고 그냥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죠.
이 설교를 하고 나서 많은 남성분들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은혜를 받았다 하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70대 이상의 은퇴 장로님, 은퇴 집사님들이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보신 분들이 가장 많이 공감해 주셨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 없이 말하면 우리는 배우자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대로 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을 거슬러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모든 게 다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육체의 정욕을 거슬러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아멘.

육체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 성경이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습니다.
음행, 호색, 술 취함, 방탕 등 온갖 더러운 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떳떳하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의지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마음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가? 

내 마음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마음이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마음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지는 항상 가장 큰 동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의지와 욕구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결코 자기 욕구에 상반되는 것을 하고 싶어 하거나 자기 의지에 상반되는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욕구와 의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희 딸은 해산물을 먹지 못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제 아내가 원래는 해산물을 좋아했는데 임신했을 때 해산물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기하게도 저희 딸도 해산물을 먹지 못합니다.
우리 교역자 중에서도 해산물을 먹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한 번은 교역자들이 회를 먹으러 간 적이 있는데 그분 혼자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것도 해물 라면이 아니라 그냥 일반 라면을 드셨습니다.

해산물을 못 먹는 사람은 해산물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없죠.
욕구가 없으니까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욕구와 우리의 의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갈망하십니까?
여러분의 욕구와 여러분의 의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것이 기독교 제자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올바른 것을 갈망하고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선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 성경을 따라가는 조직 신학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조 훈련은 우리 교회만의 독특한 훈련이죠.
신학교에서 다루는 조직 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우되 성경을 필사해서 성경 중심으로 배웁니다.
아주 중요한 훈련이기 때문에 저도 직접 강사로 섬깁니다.

 

지난주에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예정론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정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정해놓으셨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자유 의지를 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고를 당해서 날개를 잃어버린 새와 같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린 새에게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원래는 하늘을 날 수 있었는데 사고 이후에 그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인간은 선을 택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본성이 타락했고 도덕적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택하고 하나님의 뜻을 택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대로 뭐 할까요? 

내 마음대로 죄를 짓습니다.
술을 마시든 도박을 하든, 바람을 피우든 내 자유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 의지는 내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유 의지는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선과 악이 있을 때 딱 보고 선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구와 우리의 의지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택하기 위해서는 선을 갈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을 갈망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을 때 그때 여러분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내 정욕대로 사는 것을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지, 우리가 그때 자유 의지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호하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선한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선한 행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의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실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뜻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우리 또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멘.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를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1등의 자리에 올라가서 인터뷰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조금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람들 앞에서 착한 행세를 할 때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자녀가 서울대에 갔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기뻐서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아들 서울대 갔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그럴 때 영어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Good For You 라는 말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좋으시겠습니다' 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대구에 있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매주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지도합니다.
무료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한두 번 가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이것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요즘에도 그렇게 착한 애가 있어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동신교회 청년부에서 훈련을 잘 받아서 그래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그럼 친구가 말하겠죠. 

역시 교회에 다니는 애들은 좀 다르네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꼭 1등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성공한다고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은 사람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서 그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저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1등 해야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을 닮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 말씀도 너무너무 멋진 말씀이죠.
우리의 선행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라고 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합니다. 

교회가 잘못해서 비난하는 것도 있지만 세상은 언제나 교회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냥 교회가 싫은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하고 논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말로 싸울 필요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선한 행실로 그들의 어리석은 말을 잠잠하게 해야 합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Pro-Life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낙태에 찬성하는 진영에서 존 파이퍼 목사님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저 사람은 중산층 백인 남성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짓밟고 있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과 중산층 백인 남성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진영 논리에 빠지면 인종과 성별로 갈라치기를 해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오랫동안 이 비판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중산층 백인 남성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짓밟고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났습니다. 

낙태에 찬성하는 진영에서 지금도 이런 말을 할까요?
Pro-Live 운동을 하는 교회를 향해서 이런 비판을 지금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안 하게 되었을까요? 

지난 40년간 수많은 미혼모 센터 위기관리 센터를 기독교 단체에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낙태가 옳은지 그른지 말로만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태어난 아기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을 누가 돌보는지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선한 행실을 할 때 교회를 비방하는 어리석은 말들이 잠잠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밖에 하지 않지만 교회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선교의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왜 보육원을 돕고, 왜 미혼모 센터를 섬깁니까?
낙태에 대해서, 인권에 대해서 말만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잠재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할 때에 교회를 비방하는 어리석은 말들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한 남전도회는 보육원 아이들과 1대 1로 결연을 맺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찾아가서 일 대 일로 식사하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부모 없이 자라는 그 외로운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사역을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남전도회에서 자발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분들도 다 사회생활하시고 직장 생활하시느라 바쁘신 분들입니다.
정작 본인의 자녀들과 1대 1로 시간 보내기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보육원 아이들을 섬김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해야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한 행실을 할 때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선을 행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회복될 때 우리는 선을 갈망하게 됩니다.
선을 갈망하는 사람만이 의지적으로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정으로 자유한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갈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아멘, 

우리의 자유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당신이 변화되기 원하신다. 예수님처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산속에 수도원에 가서 영적인 수련을 해야지 가능할까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큰 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아멘, 

세상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깁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권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를 주신 이유는 다른 사람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중직이 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연수가 짧으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권위 구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에 보면 새로 입교한 자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큰 사람이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지 장로가 될 수 있고 중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될 수 있을까요?
그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인종, 성별, 나이, 돈, 아무 상관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보면 뭇 사람을 공경하며 왕을 존대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한글로는 다른 단어로 표현했는데 헬라어는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그 단어와 왕을 존대하는 그 단어가 똑같습니다.
티아오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경의를 표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왕에게 경의를 표하죠.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모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종과 성별과 나이와 돈과 상관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대해야 합니다.

선진국에서 온 사람은 가난한 나라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큰 교회 다닐 사람은 작은 교회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난 금요일에 의성 중부교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의성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섬기시는지 도전이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난 여름에 우리 교회 청년들이 의성에 가서 그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연합 수련회를 진행했습니다.
농촌교회들은 청소년이 많지 않으니까 자체적으로 수련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교회 청년들이 가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연합 수련회를 잘 진행했습니다.
후기 영상이 있는데 우리 아포슬 유튜브 채널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그 의성 지역 목사님에 따르면 수련회를 잘 준비한 것도 좋았지만 정말로 좋았던 점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 사역자들의 태도였다고 합니다.
대구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왔다고 거만하거나 그런 고압적이지 않았습니다.
현지 목회자들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존대하는 모습에서 정말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청년부 디렉터 목사님이 정말로 겸손하게 섬겨서 큰 도전을 받았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 듣고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농촌 지역 아이들 섬긴 것도 기뻤고 탁월하게 수련회 잘 준비한 것도 기뻤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뻤던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긴 것에 가장 기뻤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역하신 최 선임 목사님이 가장 겸손하게 섬기셨다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생명 사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생명 사역자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섬기는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는 방법인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선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선한 것을 갈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모든 사람을 존대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여서 교회를 비방하는 어리석은 말을 잠잠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PGy8lwzIS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