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8월 31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9. 22. 16:19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성 (2) 한낮에 꿈꾸는 사람
베드로전서 1:13-21 | 문대원 목사
2025-08-31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타국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을 권면하기 위한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정차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쇠약해지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유업은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미래를 현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주일 뒤에 시험을 앞둔 학생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요. 

아직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고 아직 시험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일주일 뒤에 있을 그 일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시간이 일주일이나 남았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합니다.
일주일 후에 일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은 미래를 현실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꿈꿀 수 있습니다.
결혼을 꿈꿀 수 있고 행복한 가정을 꿈꿀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연애하실 당시에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ROTC 장교로 복무하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모으신 돈으로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신혼집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살림살이까지 어머니가 다 준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결혼할 때 아무것도 없이 몸만 오셨다고 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런데 어머니는 너무너무 행복했다고 하십니다.
매달 월급을 타면 하나씩 하나씩 살림살이를 장만하셨습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미래의 일을 현실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영국의 군인이자 작가였던 T.E 로렌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꿈을 꾸지만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밤에 먼지 쌓인 마음의 한 구석에서 꿈꾸는 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낮에 꿈꾸는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밤에 꾸는 꿈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꿈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낮에 꿈꾸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꿈을 갖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아멘, 

여기서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말은 '소망을 고정시켜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영광에 고정시킴으로써 우리의 소망을 그분께 두는 것입니다.
소망은 내가 원하는 소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시선을 집중할 때 우리의 소망이 굳게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로 마음에 허리를 동이게 되고, 둘째로 근신하게 됩니다.
이 두 단어는 현재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의 약속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 행동을 계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의 허리를 동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근신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이는 것은 즉시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허리를 독인다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팔을 걷어붙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가 팔을 걷어붙이지요?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시작할 때 그렇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문화에서 허리를 독인다 하는 말은요.
적극적으로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모습이 처음 등장했던 것이 출애굽기였습니다.
12장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히 먹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밤에 애굽 왕이 너희를 보내줄 테니까 즉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빵을 발효시켜서 먹을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먹고 애굽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표현이 허리에 띠를 띠라입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즉시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표현을 사용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잘 훈련되어서 즉시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논쟁, 실천 없는 논쟁하지 말고 당장 실천하기 위한 그러한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논쟁, 이념적인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행동하기 위한 그러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당장 실천하기 위한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유튜브에 가면 시험 공부 잘하는 법에 대한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영어 공부는 이렇게 하시고 수학 공부는 이렇게 하라는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영상을 많이 보면 시험을 잘 볼까요? 아닙니다.
실제로 공부를 해야지 시험을 잘 봅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실천하지 않는 지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한 지식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인생에서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순수 지식이 아니라 현실에 적용되는 실천 지식입니다.

생명사역, 제자 훈련에서 머리 지식, 가슴 지식, 생활 지식을 구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아진다고 자동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그 지식을 실천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이 등장했지요. 

유교적인 전통도 중요하지만 실제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학자들입니다.
이익, 정약용 같은 신학자들은 사회 개혁과 기술 개발을 통해서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때 신학자들이 강조했던 것 중에 서학이 있는데, 이것은 서양 학문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의미합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마테오 리츠 선교사가 쓴 천주실의를 접한 신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의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정약용 같은 신학자가 유배를 갔던 이유는 천주교 신앙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만약에 이 실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아마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근거해서 현실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는 스스로 근대화에 성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실학자들을 탄압하고 억압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요. 즉시 실천하기 위해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행동하기 위한 지식, 실천하기 위한 지식을 가질 때 그때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근신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는 그 말씀을 영어로 보면 sober-minded 입니다.
영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면 침착한 냉정한 술 취하지 않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또렷하고 아주 멀쩡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근신하라라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은 술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술을 마십니까? 

물론 뭐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힘들어서 마십니다.
힘든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면 술을 마시면 현실이 변화됩니까? 

술을 마시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 냉정하게 말해서 죄송하지만 술 취하는 것은 소망 없는 사람들이 택하는 도피처와도 같습니다.
그냥 잠시 현실을 잊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고 근신하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청년부 특새가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제가 특제 설교를 하고 아내와 함께 콩나물 국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저희 뒷자리에 어떤 중년 여성분들이 앉으셨습니다.
그분들도 콩나물 국밥을 시키고 막걸리를 하나 시키셨습니다.
아침 8시부터 막걸리를 시키는데 심상치 않았는데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걸리 흔들지 마세요. 

절대 흔들지 마세요. 

무언가 전문가의 느낌이 났죠.
막걸리를 흔들면 왜 안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침 8시에 술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아 뭔가 힘든 일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는 일본인 오타니 쇼웨이입니다.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투수와 타자를 병행하는 정말 천재 중에 천재입니다.
작년에는 홈런 50개와 도로 50개를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124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였습니다. 

오타니는 야구 실력도 실력이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합니다.
그동안 프로 생활하면서 단 한 건의 스캔들도 없었습니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오로지 운동에만 전념했습니다.
예전에 일본에 있을 때 오타니가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고 합니다.
경기 후에 운전기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나가서 술 한 잔 해야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오타니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술을 마신다고 패배가 없어지지도 않고 내 일이 바뀌지도 않습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인터뷰를 보고 오타니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술 취하지 않는 것은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식하되 압도 당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확실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현실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팔을 걷어붙이고 지금 당장 행동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시선이 항상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신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확실한 소망 되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늘 깨어 근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아멘 

거룩은 구약 성경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베드로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어로 거룩을 카도스라고 합니다.
다 같이 해볼까요? 카도스

문자적인 의미는 분리입니다.
영어로 separation

그럼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까?
첫째로는 죄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죄를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심심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불쌍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다른 신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다른 모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너희 조상의 헛된 행실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헛되다라는 표현은 주로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습니다.

 

요나서 2장 8절에 보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이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상은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마치 속이 빈 공갈빵과 같습니다.

여러분, 공갈빵 아시죠?
겉으로 볼 때 엄청 큰데 그 속이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갈빵 먹어봐야 별로 배부르지도 않습니다.
우상 숭배가 이와 비슷하다는 거죠. 우상은 거짓되고 헛된 신이기 때문에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에게 기도해 봐야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응답되지도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런 헛된 우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십니다.
그 다름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 죄가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 땅의 헛된 우상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아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너희를 구원하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도 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속이 빈 공갈빵 같은 존재가 아니라 겉과 속이 동일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인테그리티를 갖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의 영성입니다. 

나그네의 영성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 영성이 바로 나그네의 영성입니다.
기독교 영성. 기독교 경건의 핵심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이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돈을 위해 살아가지만 우리는 다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지만 우리는 다르기를 기대하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헛된 우상들과 다르시니까 우리도 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를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 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당시에 세상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와 노예를 학대했습니다.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죠.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성과 어린이와 노예를 존대했습니다.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존중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느 마을에 전염병이 생기면 환자를 버리고 다른 마을로 떠났습니다.
그 전염병 걸린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 다른 지역으로 갔다가 그들이 다 죽으면 그때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복잡하게 계산하면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랐던 것입니다.
전혀 다른 가치관과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앨런 크라이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이교도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질문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떤 질문을 할까요?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똑같다고 생각을 할까요?

 

미국 시카고 출신의 윌리엄 버든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최고의 명문 예일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돈과 명예와 학벌 모두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그는 학생 자원 운동 SVM에 참여해서 선교회 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언어 훈련을 받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다가 2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도유망한 100만 장자 청년이 20대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다가 너무나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유명한 일간지 시카고 트리뷰는 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러한 삶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문장은 진정한 신앙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능력입니다. 거룩의 능력을 상실한 성도는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거룩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으십니까?
아니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귀하게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그릇이 귀한 그릇일까요? 

금으로 만든 그릇이 귀한 그릇일까요?
큰 그릇이 귀한 그릇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곳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아멘.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주인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될 때, 깨끗하게 될 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이 능력입니다. 

여러분, 돈이 능력이 아닙니다.
학벌이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거룩이 능력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거룩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거룩은 죄로부터의 분리, 특별한 목적을 위한 구별인 것을 기억하면서 말과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대 사회는 방종과 무절제의 시대입니다. 

어느 누구의 훈계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자녀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자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였죠. 

자녀에게 신체적인 폭력, 언어적인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쪽 극단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요즘 부모들 중에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가 친구를 때리고 무례하게 해도 아이를 훈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즘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존재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죠. 

훈계를 받지 않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절제를 배우지 못합니다.
여러분 절제를 배우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절제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중독에 빠집니다.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은 다른 게 아니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중독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일어나자마자 술을 찾습니다. 

코인 중독자는 일어나자마자 코인 차트를 봅니다.
SNS 중독자는 일어나자마자 SNS를 확인합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엇을 제일 먼저 찾으십니까?
그것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방종과 무절죄를 이길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일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은으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아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말씀합니다.
본국이 아니라 타국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현재적인 훈육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동시에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죠.
이것은 건강한 두려움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두려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두려움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두려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방종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있죠 권력 서열 1위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통령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람 없습니다.
대통령은 승인을 하는 사람이지 누군가에게 승인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도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대통령은 좋은 대통령이 아니라 위험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에게도 건강한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권력 서열 1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대통령은 그의 권력이 위임된 것을 기억하고 권력을 위임한 자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를 권력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없으면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가 제한된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영원한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5년이라는 임기가 있고 임기가 끝나면 일반 국민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제한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건강, 돈,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시간, 재능 건강, 돈을 위임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시간이 제한된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임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올여름이 많이 무덥고 길었는데 이제 여름이 곧 끝나고 얼마 있으면 가을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몇 번의 가을이 남아 있을까요?
10번의 가을이 남아 있을까요? 

스무 번의 가을이 남아 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아 있는 시간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동시에 심판자가 되십니다.
저는 우주의 심판자가 우리의 아버지이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정의를 적용하실 때 최대한 너그럽게 최대한 은혜롭게 적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똑같은 규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규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규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규정을 사용합니다.
규정은 똑같은데 그것으로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너그럽게 사용하고요.
아주 엄격하게 적용하면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규정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율법으로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 즉 사랑하는 아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곳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아멘,

하나님은 돈 많은 자, 학벌 좋은 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 거룩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은 자로서 늘 깨어 근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그릇,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께 귀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jF0Yg77_0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