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8월 17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9. 22. 12:28
추상적이라는 함정
누가복음 10:25-37 | 문대원 목사
2025-08-17

 

 

우리는 숫자와 통계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업은 지난 분기에 영업이익으로 성과를 판단합니다.
교회는 지난해에 등록한 세 가족의 숫자로 성과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물론 객관적인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집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추상화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학에는 장학금을 모집하는 모금하는 전담 부서가 있습니다.
펜실 대학교 대학에서 어떻게 하면 장학금을 많이 모금할 수 있는지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 뭐 경기가 좋지 않아서 모금액이 줄었다고 호소를 해도 참여가 저조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원들이 매일 똑같은 전화를 하는 데 지쳐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교수가 제안을 했습니다. 

모금을 잘 하려면 이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인지 직원들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할당된 실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면 너무 반복적이고 지겨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안다면 전혀 다른 자세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교수의 제안에 따라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을 학교 사무실로 초청했습니다.
장학금을 통해서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돌아가면서 5분씩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 모금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면서 장학금이 없었다면 자기 인생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생들의 이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원들은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하는 일이 단지 모금 활동이 아니라 학생들의 인생을 바꾸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태도로 모금 활동에 임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다음 달 모금액이 이전 달에 비해서 400% 증가했습니다.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 똑같은 사람이 이전보다 4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통계와 수치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된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만남,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우리 교회에서는 단기 선교팀을 파송합니다.
지난 여름에도 많은 팀이 전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단기 선교를 위해서 많은 재정이 들어가는데 차라리 단기 선교 가지 말고 그 돈을 선교지로 보내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선교에 대한 추상적인 접근입니다.
숫자와 통계만을 가지고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는 더 많은 돈을 선교지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많은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지에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천지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교회 주보에 보면 매주 선교 편지가 올라옵니다.
여러분은 이 편지를 얼마나 꼼꼼히 읽으십니까? 

어떤 분은 꼼꼼히 읽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대충 읽거나 아니면 그냥 안 읽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지난 여름에 다녀온 그 선교지에서 편지가 왔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난 여름에 일본 단기 선교를 다녀왔는데 일본 선교사님의 편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읽을 것입니다. 

내가 다녀왔던 지역,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일본을 추상적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그곳에 다녀온 사람은 일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추상화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중요성, 관계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데 있습니다.
숫자와 통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안타까운 말이지만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어린아이의 소식에는 많은 사람이 마음 아파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15만 명에 대한 소식은 그저 통계로 느껴질 뿐입니다.
숫자와 통계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무덤덤하게 만들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율법 교사는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여기면 신학교 교수에 해당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짧은 구절 안에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 교사는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질문의 의도 자체가 잘못되었죠.

 

둘째로 율법 교사는 무엇을 행하여서 구원을 얻는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입니다.
무언가를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우리가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무언가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능통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율법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을 다시 돌리셨습니다.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머리 지식으로 답을 했습니다.
본문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은 옳은 대답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전체가 가르치는 바를 아주 탁월하게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또다시 질문했습니다.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까?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 교사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이 질문을 했습니다.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둘째로 율법 교사는 추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요. 

율법 교사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결론적으로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실천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느라 정작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와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질문을 유대인이 사랑해야 하는 그 이웃의 범위에 대한 질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방인을 내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활동하던 에세네파의 문헌에 따르면, 빛에 속한 자들을 사랑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을 미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고, 율법을 잘 모르는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교사가 가지고 있었던 추상적인 신앙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삶에서 그는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범위를 정해주시면 내가 그 범위 안에 있는 자들을 섬기겠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추상적인 사랑입니다.
몇 가지 행동을 하고 몇 가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사람의 중요성,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 교회 성도님처럼 훈련을 잘 받은 신령한 성도님들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암송해 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라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올바른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신학적인 개념,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하면 저는 제가 받았던 사랑을 떠올릴 것입니다.
어머니께 받았던 사랑, 아내에게 받았던 사랑을 떠올릴 것입니다.
제가 받았던 용납과 배려와 섬김이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떠올릴 것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저의 딸을 향한 마음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영화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율법 교사의 문제는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인 개념, 신학적인 개념으로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사랑을 모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면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에 대한 큰 착각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있고 여리고는 평지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내려가다 보면 그 산지에 강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길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강도들이 그 사람을 공격하고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거의 죽은 상태로 기절해서 길가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본문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은 아론의 직계 후손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 피하여서 지나갔습니다.
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갔을까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빨리 지나가야 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내려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는 올라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다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그곳에 강도가 많으니까 위험하니까 빨리 지나가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도 가능한 추측이지만 본문에서 지지를 받지는 못합니다.
강도를 만날까 봐 두려워서 빨리 갔다는 말이 본문에 없기 때문에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아주 독특한 단어가 하나 사용되었습니다.
한글로는 피하여 지나갔다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passed by on the other side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안티, 파레코마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안티 하면 '반대'이고요. 파레코마이 하면 '지나가다'입니다.
그러니까 영어 성경이 번역을 잘 했죠.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갔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절대로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멀리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구절에 보면 레웨인도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32절에 보니까 레웨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 반대쪽으로 피해서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헬라어 안티프라코마이가 딱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 31절과 32절, 오늘 본문을 제외하고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아주 독특한 단어를 통해서 본문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공통적인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반대쪽으로 완전히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7일 동안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7일 동안 정결 의식을 치러야지 다시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당한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잘못 만지면 내가 격리되어야 하는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삥 돌아가서 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인간화의 위험입니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천지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박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독교 박해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 국가에서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에 대한 관심이 있으십니까? 

신앙으로 인해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서 여러분은 기도하고 계십니까?
많은 분들은 딱히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마음에 와닿지 않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크리스천들이 어떠한 박해를 받는지 모르기 때문에 별로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박해를 받는 사람을 만나면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이번 연구월 기간에 저는 미국에서 열린 국제 로잔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작년에 열렸던 4차 로잔 대회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향후에 세계 선교의 방향을 의논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세계 많은 리더들이 지난 로잔데이를 위한 한국 교회의 사랑과 기도에 큰 감사를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국제 로즈 이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편입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 중에서 한 중국 목사님이 있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가정교회 출신의 리더로서 지금은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지난 로잔 대회 때 중국의 가정 교회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중국 정부로부터 신상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분의 발표는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사진과 영상도 남기지 않았고, 이름도 가명을 썼습니다.
이분은 여러 가지 위협을 무릅쓰고 중국 지하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중국 교회 성도들의 깊은 믿음과 희생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발표를 하고 나서 2개월이 지나서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중국 공안들이 그 사람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협박했습니다.
부모님은 베이징이 아니라 저 시골 지역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을 찾아가서 당신 아들이 한국에서 있었던 한 컨퍼런스에서 부적절한 발표를 했다고 협박했습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하면서 앞으로 편안하게 살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로잔 대회에서 어떠한 사진과 영상도 남기지 않았는데, 중국 공안은 어떻게 이 사람을 알았을까요?
어떻게 이 사람의 부모님을 알아내서 찾아가서 협박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으로 인해서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간증을 하면서 야고보서 1장 말씀을 언급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 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아멘 이분이 말씀하기를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과 협박을 받아도 자기는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실현으로 인해서 온전한 인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박해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하는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인간화, 비인격화는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고난과 문제 가운데 있는 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숫자와 통계로 추상적인 개념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본문 3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여기서 불쌍히 여겨가 헬라어로 스플랑크, 니조마이입니다.


생명 서약 훈련을 받으신 분은 이 단어를 잘 아실 것입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나 하면은 우리 몸에 있는 내장 장기를 뜻합니다.
헬라인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의 마음이 내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하게 서양인들의 표현 중에서 사랑이 심장에서 나온다 하는 것과 비슷하겠죠.
고대 헬라인들은 긍휼이 내장 깊은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스플랑크, 니조 마이 하면 가장 큰 긍휼, 자비, 연민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총 11번 사용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의 주어는 항상 예수님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 주체는 대부분 예수님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9장 36절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아멘 목자 없는 무리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난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모든 재산을 탕진한 그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무나 죄송해서 도저히 아버지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느꼈던 감정이 있습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느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집으로 돌아오는 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가 느꼈던 그 감정이 바로 스플랑크 니즈마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단어가 바로 이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긍휼,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사마리아 사람이 가졌습니다.
그 마음으로 강도 당한 자를 돌보고 치료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과 사마리아인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왜 제사장은 강도 만난 자를 피해서 반대쪽으로 돌아갔고, 사마리아인은 왜 그를 돌보아 주었을까요?

강도 당한 자를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는지 아닌지의 차이입니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 수치와 통계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그 문제를 당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작년에 꿈너머 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가 이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대구 경북 지역에 있는 130개가 넘는 교회의 지원서를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중에서 40명이 넘는 목회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미자립 교회가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얼마나 힘들게 사역하고 있는지 직접 들었습니다.
그 시간이 저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자립 교회를 바라볼 때 어떤 수치와 통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수치와 통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 있는 수백만 명의 성도 중에 한 명, 동신교회에 있는 8천 명의 성도 중에 한 명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인격적인 존재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추상적인 개념, 비인간화된 개념을 내려놓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인격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 교사는 특정한 행동을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큰 오해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문 25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율법교사가 inherit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inherit 하면요. 아버지께 유산을 받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유업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유업을 받기 위해서는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올바른 관계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바로 '의' 영어로 rightness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의는 단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양심에 떳떳하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이 정한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비로소 의롭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적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의로우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깨달은 사람만이 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 교사의 질문은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유업으로 받습니까?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비인격적인 성취를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영생을 유협으로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서 내 아들이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아멘, 이것은 율법을 주시기 이전의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아들이 되었고, 그 신분에 맞게 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이 순서를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절대적이고 완벽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그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받음으로써 상속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소중한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고 인격적인 동행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수치와 통계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할 때에 수치와 통계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부룬디의 복음화율을 높이기 위해서 선교사로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살고 있는 실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제가 부룬디에 처음 갔던 것이 2006년도였습니다.
그때 부룬디 시골 마을에 가서 그곳에 살고 계신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살고 계신 움막집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흙으로 만든 집이었고, 흙으로 된 바닥에 돗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부엌도 없는 그 집에서 이분은 평생 동안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가 이분을 만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가난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제 아내는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고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아들을 현지 교회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수줍은 미소를 가진 한 아이가 제 아내에게 질문했습니다.
언제 다시 올 거예요, 언제 다시 와서 나를 만나줄 거예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아이의 질문을 통해서 제 아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부룬디에 와서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지 않겠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치와 통계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에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에 하나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환상 중에 무엇을 보았습니까?
마게도냐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사람을 통해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 철학적인 개념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비인격적인 목표, 비인간화된 목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생명 사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 사역은 수치와 통계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 사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격적인 존재, 인격적인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올해 10월 26일에 행복 나눔 잔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추상화된 신앙, 수치와 통계를 내세우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인격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LCsjiq5Lcx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