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7월 6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7. 8. 10:09

 

세계관 이야기 (7)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디모데전서 6:6-10 | 문대원 목사
2025-07-06

 

세계관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모더니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모더니즘의 핵심은 인류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잘 활용하면 이 땅 가운데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모더니즘은 1914년까지 유럽에서 큰 힘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914년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던 유럽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민족 해방을 위한 전쟁도 아니었고, 야만인들과의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이성적인 유럽인과 이성적인 유럽인들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1차 대전을 통해서 모더니즘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인류 사회가 계속해서 진보한다는 믿음이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더니즘의 시대가 점점 끝나갔습니다. 

 

지금은 모더니즘의 시대가 아니라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입니다.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 규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가치는 다 상대적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기준대로 살고 나는 내 기준대로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기준을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궁극적인 목적, 거대 담론을 부정합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 비전에 대해서 말하면 고리타분하다고 여깁니다.
예전에 티비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이 가수가 초등학생과 대화하던 중에 나중에 커서 그 아이가 뭐가 되고 싶은지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연예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말이 요즘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라는 점입니다.
청년들이 이 화면을 캡처해서 SNS에 많이 공유를 해서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고 그냥 너 편한 대로 마음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서점은 점차 사라지고 쇼핑센터와 맛집만 가득한 시대입니다.
과거 모더니즘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을 따라가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의미, 역사의 방향을 고민하기보다 그저 이 순간 행복하길 원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단순하고 더 원초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맥주 감사 주일입니다.

상반기 동안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감사가 어려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족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소비주의 문화가 다스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티비와 인터넷에서 우리가 접하는 광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제품을 가지면 당신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고, 당신은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비주의에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영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소비주의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줍니다.
돈으로 학벌도 살 수 있고, 커리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랑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주의의 핵심은 한마디로 '손님은 왕이다'입니다.
돈을 내는 사람이 왕이고 그 사람을 왕처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소비주의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식당에 평점을 매기듯이 교회에 평점을 매길 수 있습니다.
예배, 찬양, 설교, 주차, 교회, 학교 등 여러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점수를 매겨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church shopping이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교회를 찾아서 쇼핑을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가서 돈 낼 테니까 나에게 최고의 영적인 서비스를 해 달라는 생각입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대하듯이 교회에 와서 교역자들을 대합니다.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이 소비주의는 영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돈에 대한 집착과 갈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가져야 하는 그 마음을 재물에 대해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재물이 나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신학자 존 스터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돈은 약물과 같고, 탐심은 약물 중독과 같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상당히 이제 과격한 표현이죠.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말입니다.
성경은 돈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이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안전한 집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돈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 탐심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탐심을 가져도 괜찮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십계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내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성경은 탐심이 분명한 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탐심은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일방적인 죄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탐심이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옷 사고, 좋은 자동차 사서 자랑하는 건 아무 문제없습니다.
이번에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양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이번에 이런 사람 만났고 다음에 저런 사람 만날 거라고 자랑하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탐심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대한 시대입니다.
돈을 자랑하고 명품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돈 자랑하면 어떨까요? 

만약에 제가 이번에 주식으로 5천만 원 벌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이상하죠?

무슨 목사가 돼가지고 돈 자랑하고 있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돈 자랑하는 게 이상하면 성도가 돈 자랑하는 것도 이상한 겁니다.
목사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라면 성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돈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멘.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동시에 섬기면 안 된다가 아니라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섬길 수 있습니다.
둘 다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돈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돈이 나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자족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아멘.

자족은 소유가 풍성할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소유가 풍성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자족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고,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그것을 채우신다는 믿음이 바로 자족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저절로 얻을 수 없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아멘.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맥주 감사 주일은 상반기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감사는 영혼의 비타민과 같습니다. 

우리 삶에 활기가 돌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감사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많이 왔습니다.
한국에서 부룬디까지 오는데 24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이지만 단기 선교를 통해서 청년들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교훈이 무엇이었을까요? 

아프리카 현지 사람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뭐가 감사할까요?
그들에게는 에어컨도 없고 냉장고도 없습니다. 

정말로 가진 것이 거의 없는데 도대체 무슨 기쁜 일이 있어서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너무나도 큰 도전이 됩니다.
아니 부룬디 사람들은 저렇게 감사하고 있는데 왜 나는 감사하지 못하는가라고 돌아보게 됩니다.


인생의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과거에 가진 것이 적을 때에는 우리가 적은 것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감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지난 20년 전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20년 전이면요 2002년 월드컵 때인데 여러분 인터넷에 가서 2002년 월드컵 때 사진을 한번 보십시오.
엄청 촌스럽습니다. 

건물도 촌스럽고 길거리도 촌스럽습니다.
식당도 별로고 위생 상태도 별로입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더 세련되고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20년 전보다 지금 더 감사하고 계십니까?
사회는 더 풍요로워졌는데 우리는 그때보다 더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이 더 행복한 것일까요?
풍요로운 인생이 더 행복한 인생일까요? 

아니면 감사하는 인생이 더 행복한 인생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감사를 배우고 자족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자족을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음에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욥기에 보면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욥기 1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다 하고 

 

우리가 알몸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우리는 알몸으로 떠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존 스터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소유에 관해서 우리의 입구와 출구는 동일하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벌과 벗은 두 순간 사이에 짧은 순례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벌거 벗은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했고, 벌거 벗은 상태로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여러분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면 어떻게 느낄까요?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요?
이것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내용이 뻔한 영화, 가벼운 영화를 다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깊은 영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줄거리 다 알고 있죠.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영화를 다시 보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주인공에게 가서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 잡아야 된다고,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면 분명히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겁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전도서 7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아멘.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나을까요?

초상집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나도 세상을 떠날 날이 온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한 미국 목사님이 장례식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부유한 사업가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겼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차마 아무도 그 질문을 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갈 무렵에 누군가가 유가족에게 질문했습니다.
정말 실례지만 고인은 얼마의 재산을 남겨두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유가족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났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답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게 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인생의 종착점에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지,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이 던지는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사로잡고자 합니다.
순간적인 즐거움과 쾌락에 빠지게 해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고자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아멘.

사탄은 우리에게 시험과 오일물을 던집니다.
우리가 좋아할 만한 죄의 유혹을 던지고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순간 올무에 빠지게 합니다.
여러분 올무에 한 번 빠지면요 헤어나오려고 할수록 더 강하게 묶이게 됩니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라고 할 때 사용된 영어 단어가 'plunge'라는 단어입니다.
plunge 하면요. 바닷속 깊은 곳에 빠지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빠지면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파멸과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파멸에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올무에 갇힌 상태입니다.

 

예전에 한 다큐멘터리에서 카지노 도박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원래는 강원랜드 경비 직원이었는데 그만 도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고 폐인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원랜드에서 하도 난동을 부려서 영구 출입 정지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친절하게도 그 바로 옆에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설 도박 업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의 나이가 80대입니다.
가족과 연을 다 끊고 사는데 그래도 어쩌다가 딸이 한 번쯤 용돈을 보내줍니다.
아버지 식사라도 제대로 하시라고 용돈을 보내줍니다.
하루는 딸이 용돈 30만 원 보냈다고 이분이 너무너무 행복해 했습니다.
곧바로 사설 도박 업장에 가서 2시간 만에 다 잃었습니다.


여러분, 딸이 아버지에게 어떤 마음으로 그 돈을 보냈을까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신나게 도박하러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올무에 갇힌 모습입니다. 

죄의 유혹에 빠져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깊은 바다에 빠진 모습입니다.
그곳에서는 파멸과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뭐 나는 도박 안 하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여러 가지 종류의 죄 앞에서 무기력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벌이나 명예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쇼핑 중독, 게임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입니다.
그중에 하나라도 붙잡으면 우리는 사탄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고, 중독의 늪에 빠져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지금의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고 또한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 쇼핑할 때 기쁨이 있죠. 

새로운 옷을 살 때 기쁨이 있지만 두 번, 세 번 입으면 헌옷이 됩니다.
그러면 옷장에 가득한 옷을 보면서 뭐라고 말하죠?
입을 옷이 없네라고 말을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서 옵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이란 나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고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며 진정한 중요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족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새 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아멘.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종교 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닮아가는 사람이 곧 경건한 사람입니다.
제가 2년 전에 선교적 교회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했던 설교 중에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우리 교회 성도 중에서 한 가정이 아이를 고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분들에게 이미 아이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부모가 없는 그 아이를 입양하고자 결정했습니다.
한국에서 입양 절차와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렇게 입양한 아이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열흘 전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우리 교회에서 신애라 집사님을 초청해서 보육원 사역 나눔 집회를 했습니다.
정말로 은혜롭고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정을 잃어버린 그 아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날 우리 교회 집사님 가정에 입양한 아이가 도착했습니다.
신애라 집사님의 언급대로 야나라는 단체에서 국내에 200개 교회에 연락을 했습니다.
보육원 사역에 동참해 달라고 연락했을 때 단 3개의 교회만이 답을 했다고 합니다.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는 우리 교회가 유일하게 답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교회 유튜브 채널에 가셔서 신애라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부터 보육원 사역, 미혼모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담당 위원회가 없기 때문에 사회선교부라고 임시 부서를 통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청년들이 많이 헌신해서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고 그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에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왜 이런 사역을 할까요? 

해외 선교 열심히 하고 국내 전도만 하면 되지 왜 굳이 보육원 사역까지 할까요?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나에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마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이렇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가 참된 경건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선한 일을 위해서 기부하고 후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 많이 계십니다. 

1억 원 이상 기부한 어널소사이어티에 가입하신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여러분, 이분들이 돈이 남아서 돈 쓸 데가 없어서 기부하는 것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써야 하는 거 쓰지 않고 아껴서 기부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 포기하고 그리고 기부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희생이 따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으로서 저는 죄책감을 일으키는 펀드레이징에는 반대합니다.
뭐 이런 문구 있지 않습니까? 

하루에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5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식량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죄책감을 주는 말 싫어합니다. 

여러분 하루에 커피 한 잔 마셔도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아프리카 아이들 때문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 또 선한 일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요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월급이 많습니까? 

여러분이 사고 싶은 물건이 더 많습니까?
당연히 사고 싶은 물건이 훨씬 더 많습니다.
새 옷도 사고 싶고 새 차도 사고 싶고 새 골프채도 사고 싶습니다.
근데 그렇게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요. 

절대로 선한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순장 교육에서 제시했던 현실적인 방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 있죠.
거기서 한 단계만 아래의 것을 사면 됩니다. 

자동차이든 옷이든 핸드백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경제적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준에서 딱 한 단계 아랫 것을 사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아낀 재정으로 선한 일에 동참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소비주의의 시대 흐름에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는 이 시대의 세계관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준보다 더 좋은 곳을 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살 때 전문가들에 따르면 월급의 5배 정도가 적정한 자동차 예산이라고 합니다.
작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3인 가구의 중위 소득이 월 450만 원이라고 합니다.
월 450만 원을 벌면 월급의 5배인 2200만 원이 적절한 자동차 가격입니다.
그러면 월 450만 원을 버는 사람이 2200만 원보다 좋은 차를 탈까요?
나쁜 차를 탈까요? 

당연히 더 좋은 차를 탑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할부를 해서 좋은 차를 삽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은 한 번뿐이니깐요.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것이 더 빠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결혼한 남편들을 위한 말입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아내에게 허락받는 것이 어렵잖아요.
그럴 때 일단 사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락받는 것보다 나중에 용서받는 것이 더 빠르니까 먼저 사고, 나중에 용서를 구하면 된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소비주의 문화의 현실입니다.
사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일단 먼저 사고 보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역행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물건을 사고 또 사고 또 사는 소비주의 문화를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족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자족하는 마음,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자족하는 이 마음은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갖게 됩니다.


나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고 신실하게 채우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렇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경건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쓰임 받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아멘.

성실하게 일하고 자족하며 사는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의 일에, 선한 일에 참여하는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는 그 기쁨을 아는 사람은 더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소비주의 문화는 순간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강조합니다.
소비주의 문화를 따라가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탄의 올무에 빠져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돈에 집착해서 돈만 따라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기 원하십니다.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풍요로운 인생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인생이 행복하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자비로우신 성품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종교 활동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 떠날 때 가져가지 못하는 재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Dt72Yh3vZ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