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9월 28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0. 22. 12:49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성 (6) 상속자들
베드로전서 3:8-16 | 문대원 목사
2025-09-28



여러분은 복수 드라마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용서 드라마를 좋아하십니까?
몇 해 전 넷플릭스에서 최고의 흥행을 했던 한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서 복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인공을 괴롭혔던 친구들이 너무나도 악랄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편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주인공이 당했던 그대로 친구에게 복수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드라마의 결말이 나오기 전에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이 많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절대로 가해자를 용서해 주는 결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용서가 아니라 정의를 원합니다라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용서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정의를 원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정의를 원하고, 나에게는 용서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정의대로 하고, 내가 잘못한 것은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나에게 원하는 기준과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일관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이죠.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도 완전한 정의와 공평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분 제도에 근거해서 평민과 귀족의 케이스가 달랐습니다.
196조를 보면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으면 그의 눈을 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198조를 보면 귀족이 평민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으면 은일민화를 치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민의 케이스와 귀족의 케이스가 다릅니다.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뺏으면 그의 눈을 똑같이 뺍니다.
그런데 귀족이 평민의 눈을 빠지게 했으면 돈으로 배상할 수 있었습니다.
신분 제도에 근거해서 서로에게 배상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도 완전한 정의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악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의는 상을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대부분의 동화책 내용이 권선징악 아닙니까? 

악인이 벌을 받아야지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용서를 원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의를 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독특한 가르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도 말한 적이 없었던 가장 독특한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비현실적이고 지키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아라 정도입니다.

 

불교의 경전인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원한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떤 갚으려고 하면 그 원한은 끝내 그치지 않으리, 오로지 참음으로 원망은 쉬나니 이 법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한으로 원한을 갚지 말라고 합니다. 

결코 그 원한이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세상에서 아주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갑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의 DNA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죄인에게 마땅히 내려야 하는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의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또 우리가 노력해서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 가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악한 마음으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왜 그대로 갚아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악한 사람, 나쁜 사람에게까지 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감정적으로 좋아해라 하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공격하는 그 원수와 가깝게 지내면서 계속해서 학대를 당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모두 다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15개의 동사를 사용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원수를 감정적으로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진심으로 그의 유익을 바라라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 사람이 평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원수가 잘 되기를 바래야 할까요?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인데 나쁜 사람인데 그냥 망하기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 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아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 일반 은총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일반 은총, common grace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하는 은혜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생명을 받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음식과 물과 공기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대기에 있는 산소를 위해서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은혜로 숨을 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특별 은총 special grace 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 역시 공짜로 임하는 은혜인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임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모두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사실 일반 은총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악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시는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악한 자들이 농사 짓지 못하게 햇빛을 막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악한 사람의 밭에는 비가 안 오고, 착한 사람의 밭에만 비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합니다.
이것은 악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악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또한 건강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이 마음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이 선한 마음을 우리 또한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악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악에게 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멘, 

악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선한 마음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악한 사람을 볼 때 그를 저주하며 공격하고 싶은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선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정말로 미워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말 누가 정말로 미워서 그를 향한 쓴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한국의 새 박사로 불리는 윤무부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에겐 방광이 없다. 노폐물이 생기면 몸 밖으로 바로 배출한다.버려야 산다는 것이다. 미움과 욕심을 마음 바깥으로 버릴 때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을 품고 있으면 나에게 좋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건강에도 좋지 않고, 우리 육체의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 곧바로 배출해야 합니다.
새가 노폐물을 바로 배출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바로 배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악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악한 생각, 악한 감정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상하게 되고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면 멀쩡한 사람도 이상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 중에서 멀쩡했는데 마음 가운데 분과 원망이 있어서 표정이 변하는 경우가 있죠.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한 말입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오랫동안 시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면 또한 당신 속을 들여다볼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악한 사람을 미워할 수 있지만, 그 미움이 내 마음을 또한 해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철학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아들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아들은 집 안을 부수고 가족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 맞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했던 아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아버지를 닮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대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대할 때 그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또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미워하면서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 9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상속자로 부르셨습니다.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업에서 후계자를 훈련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기업의 회장이 은퇴할 때 아무나 후계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후계자로서 자질과 성품을 가진 사람을 선택해서 오랫동안 훈련을 시킵니다.
기업의 전통과 가치를 가르치고, 관리자로서 가져야 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르칩니다.
이 훈련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대 회장이 피땀 흘려 일군 기업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후계자로서 자질을 갖추고 훈련을 잘 받은 사람만이 리더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항공우주 방위 산업체 로키드 멀핀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유명한 f16 전투기를 개발한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전신인 로키드사를 설립한 로버트 그로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일과 회사를 세우는 일은 다르다. 회사는 곧 사람이고, 회사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사람보다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행기, 헬리콥터,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든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훈련, 혹독하고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을 잘 통과한 사람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운영하시는 그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 사랑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착복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에서 어떤 구제 사역을 한다고 했을 때 아무나 책임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교회 돈을 자기 돈 쓰듯이 하는 사람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고 투명하게 재정을 사용하는 사람을 세울 것입니다.
구제 사역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사람, 자기 명예에만 관심 있는 사람은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을 세울 것입니다.
교회에서 리더를 세울 때에도 이런 기준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상속자로 받을 때에는 훨씬 더 높은 기준이 있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업에서 후계자 훈련을 하듯이 하나님도 상속자 훈련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품,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하는 훈련이 아닙니다. 

전 인격으로 받는 훈련입니다.
군대에서 훌륭한 장교가 되기 위해서 실전 경험이 필요합니다.
사관학교에서 공부 잘한다고 책 많이 읽는다고 좋은 장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전투에 참여해서 직접 현장을 경험해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 참모에 들어가서 병사들과 함께 고생을 해 봐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훈련을 잘 통과한 사람만이 훌륭한 장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상속자는 영광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으려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이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닙니다. 

나의 죄와 잘못으로 인한 고난도 아닙니다.
이 고난은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빌어주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타락한 세상에서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마음을 가지면 고난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선한 마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기준에 선한 마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증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선한 분이 누구였습니까?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 중에서 가장 선한 마음을 가졌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형은 사람을 가장 천천히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돌아가실 때 빨리 죽고 싶습니까?

아니면 천천히 죽고 싶습니까?
당연히 빨리 죽고 싶죠. 

 

여러분, 예전에 아프리카 로완다에서 인종 학살이 있을 때 유엔군이 개입하지 않고 철수했습니다.
그때 철수하는 유엔군을 붙잡고 총으로 죽여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체테'라고 불리는 칼에 맞으면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으니까 그냥 제발 총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총으로 쏴달라고 부탁하는 그 장면이 얼마나 비참한 장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주 천천히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느끼면서 천천히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선한 마음으로 사셨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문화와 달랐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문화와 다르게 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죄를 짓고 적당히 더럽게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살아가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아멘.

이 말씀은 나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교훈과 도전을 줍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로 살아가게 될 때,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박해를 받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신앙으로 인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오해와 박해를 받는 분이 계십니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박해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어떠한 오해나 박해를 받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내 인생은 너무나도 평탄하고 행복한 분이 계십니까?
혹시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두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문화와 가치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즘은 회사마다 회식 문화도 많이 바뀌어서 요즘은 뭐 회사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젊은 세대는 술보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점심 때 회식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학생 때만 해도 취업한 선배들이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회식을 해야 하는데 술을 마셔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직장 상사가 술을 따라주는데 그것을 안 마시면 완전히 찍히는 거죠.
s전자에 다니던 교회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에 상무님이 술을 따라주는데 안 마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문화와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기준에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에게 고난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있기 훨씬 더 전에 이미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4편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아멘, 

타락한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으려면 그와 함께 고난 또한 받아야 합니다.
선을 위한 고난, 상속자로 훈련되기 위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고난인 줄로 믿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과 성공을 좋아하지 고난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훈련되는 과정에서도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한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아멘, 

악을 떠나서 선을 행하는 중에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을 보면 두렵습니다.
나를 감옥에 가둘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두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비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현실로 깨달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인생에서 실제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다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몇몇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봤는데 그중에는 어린 여종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알아보는 그 여종이 무서워서 그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베드로가 공회 앞에 끌려갔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어린 여종을 두려워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똑같은 베드로가 당시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공회의 권위로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 보니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어린 여정을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놀라운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우리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외쳤습니다.
그 말에 격노한 공회는 베드로에게 채찍질을 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했던 것처럼 그의 제자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력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 가니라.

 

아멘.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살갖이 찢기는 채찍질을 당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오래 전에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아멘, 

고난은 복의 반대가 아닙니다. 

의를 위한 고난, 상속자로 훈련되기 위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그런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이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은 로마의 박해 가운데 살아갔던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옥은 선지자에게 광야가 했던 일을 해준다. 그곳을 감옥이라 부르지 말고 은거의 장소라 부르라. 육체는 갇혀 있지만 영혼에는 모든 것이 열려 있다. 마음이 하늘에 이르면 다리는 사슬을 느끼지 못한다' 라고 적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졌던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다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광야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도 아니었습니다.

의를 위한 고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 깨끗하게 정화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닮아야 합니다.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 축복하는 것 여러분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람, 나를 대적하는 사람까지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담긴 놀라운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을 본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어서 이 깨어진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누어 주는 귀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mwjAfG0QJ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