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0-05
인생에서 중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었다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제한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사실 이것만큼 공평한 것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하루가 30시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적다고 해서 하루가 20시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시간이 제한되었다 하는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욱 빠르게 지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습니다.
예전 유행가 가사 중에 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참 느렸었지 늘 지루했지 시간아 흘러라 흘러 그땐 그랬지'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는 말이지만 이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죠. 시간아 흘러라 흘러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교 수업도 빠지고 밤새 노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년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까지만 놀고 다음 학기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12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권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아멘.
공동 번역을 보니까는 이렇게 말합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는데요.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오기 전에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일을 기억하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르신들이 자주 하는 말씀이 있죠.
좋은 날 다 지나갔구나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아직 젊었을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번 주 본문은 지난주와 이 이어집니다.
지난주에 복의 상속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은 상속자가 되는 훈련의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의 상속자를 다른 말로 하면은 선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복과 은혜를 나누어 주는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아멘.
베드로는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의 목록을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란, 술 취함, 방탕, 향락을 따라 살았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지은 죄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잘못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대극장에서는 온갖 음란한 공연을 했습니다.
술집에서는 음주 가무가 성행했고, 잔인한 검투사 경기가 유행했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신전 기생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방탕과 향락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방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갔던 그 죄가 충분하니까 이제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은 죄로 충분합니다. 그동안 했던 잘못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더 이상 똑같은 죄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젊었을 때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실수해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는데도 계속해서 똑같이 실수하면 안 됩니다.
40대가 넘었는데 계속해서 실수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실수가 영적인 죄, 도덕적인 죄라면 더욱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 규범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규범이 없는 사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욕구는 모두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가져야 하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너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다 가져라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습니다.
이 말이 정당하려면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의 충동은 올바르지 않을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충동을 따라가는 인생은 무책임한 인생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욕구하는 충동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 시험을 앞둔 학생이 놀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 충동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당뇨병을 가진 사람이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탕 입힌 단팥 도너츠를 먹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는 그 충동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장로님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설탕 입힌 단팥 도너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뇨병을 가지고 있으셔서 절대로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충동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혼한 유부남이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교제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그 충동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충동을 따라가는 인생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충동을 따라가는 인생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타락한 충동은 우리의 건강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영혼을 망칠 뿐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은 충동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충동을 따라가고 타락한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에 저항하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본문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다름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세상은 죄와 방탕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기들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같이 죄를 짓자고 합니다.
우리가 거절하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저희 학교가 남녀공학이었고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유스 호텔에 머물렀는데 2층에는 여학생 방, 3층에는 남학생 방이 있었습니다.
큰 방에서 20명 30명 같이 자는 그런 구조였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밤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밤에 일찍 잘 리가 없겠죠.
친구들이 2층에 있는 여학생 방에 놀러 갔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 들어야 되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여자 방에 가자고 해도 저는 거절했습니다.
당시 제가 반장이었기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에 친구들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어서 잠깐만 가기로 하고 2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여학생 방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께서 들이닥치셨습니다.
이 방에 있는 남자들 다 나와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엄청 억울했죠.
저는 그렇게 거절하다가 방금 왔는데 딱 그 순간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다 똑같았습니다.
밖으로 불려가서 몇 시간 동안 기압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에 제가 다짐했습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나쁜 짓 하자고 해도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나쁜 일에 대한 책임은 친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죄를 짓자고 유혹하지만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지게 됩니다.
성경은 인생의 끝이 있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 자체가 심판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데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죽음은 큰 사건이고, 비록 다 알고 동의했다 하더라도 부당한 폭력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죽음을 가리켜 부당한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에 감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폭력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세상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전부가 아니지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았는지 아니면 나의 정욕을 따라 살았는지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인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죽음과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만물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영혼의 관점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중요한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나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내 뜻대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가 영어로 sober-minded, 근신하라가 영어로 self-controlled 입니다.
직격하면 맑은 정신으로 술 취하지 말고 절제하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술에 취하면 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됩니다.
전두엽은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하고 충동을 억제하게 합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전두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맑은 정신으로는 하지 않을 말을 하게 되고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됩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충동 절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명절에 모이면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그럼 처음에는 좋은 얘기하다가 기분 좋게 하다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죠?
꼭 옛날 얘기하다가 싸웁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기분 좋게 술 마셨는데 꼭 마지막에 가면 싸웁니다.
그리고 나가면서 말하죠.
내가 다시는 명절에 내려오나 봐라 하면서 나가십니다.
왜 어르신들은 술만 마시면 싸울까요?
제가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 과학의 도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되어서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쁜 말하면 나도 똑같이 받아칩니다.
그렇게 나쁜 말이 오고 가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술을 완전히 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선함의 문이 나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게 되겠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현실에 맞는 지혜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가면 우리의 영혼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 우리의 마음, 우리의 관계, 이 모든 것이 잘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유익과 형통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술 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맑은 정신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본문 7절 우리 빨간색 글씨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아멘,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 유한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는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예레미야 23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아멘,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게 되면 국가안보회의가 소집됩니다.
National Security Council 죠.
그렇게 카운스들이 모여서 현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카운스들이 모입니다.
온 세계를 운영하시는 여호와의 회의 카운스로부터 로드가 모입니다.
그 회의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관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그 회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게 될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지 내 마음속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관점을 깨닫는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라면 태도가 고도를 결정한다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생명 사역의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인생의 고도, 인생의 높이를 결정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태도를 결정합니까? 관점이 태도를 결정합니다.
인생에 대한 관점이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미래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지 그 관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관점을 결정할까요? 기도가 관점을 결정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게 될 때에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기도가 관점을 결정하고 관점의 태도를 결정하고 태도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기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인생에서 기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가 없으면 우리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것입니다.
물론 합리적인 선택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합리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내가 계획을 다 세웠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실 수 있을까요?
방법은 딱 하나뿐입니다.
내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은 안전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선택은 반드시 최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관점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합리적인 시대가 언제였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자기 기준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했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사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아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기도하지 않았고 자기 눈에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황금기였습니까?
아닙니다.
사사 시대는 암흑기였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생각대로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게 될 때에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우리 교회가 만촌동 부지를 구입했습니다.
교회가 동인동 시내에 있는데 왜 개발되지 않은 만촌동 땅을 샀을까요?
이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요?
당시 우리 교회 성도가 약 5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니 성도가 500명인데 왜 만 2500평의 부지가 필요했을까요?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요?
별로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창렴 목사님과 성도님들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앉아 계신 이 본관을 건축하셨습니다.
이 결정이 없었으면 지금의 동신교회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가장 오래 섬기셨던 원로 장로님께서 항상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만촌동으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동신교회, 대구를 대표하는 동신교회는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목사님과 성도님들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결과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이전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한 것의 열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교회를 섬기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앞으로 동신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면 좋겠습니까?
인간적인 기준으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원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합리적인 것 결코 나쁜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술 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골레소서 1장 9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아멘,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우리에게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와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서로서로 섬기고 교회를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아멘.
여기서 은사가 헬라어로 '카리스마(charisma)' 입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뭔가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카리스마는 카리스(charis) 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발음이 비슷하죠. 카리스는 은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은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아무런 값 없이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은사를 주신 이유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재능,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돈 주고 시간을 산 사람 없습니다.
돈 주고 건강을 산 사람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 선물을 주신 목적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봉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선한 청지기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복의 상속자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기 위해서 상속자가 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도 청지기가 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복의 상속자와 선한 청지기는 서로 연결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은 주님의 복을 받아서 주님의 뜻대로 그 복을 나누어 주고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2절부터 4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아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소유를 맡아서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축복하시고 온 세상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그 현장에서 떡을 나누어 주었던 제자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굶주린 5천 명을 먹이는 일에 여러분이 동참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어쩌면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동참했던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가난한 한 5천 명을 먹이려고 하지 않고 혼자서 5천 명 분을 다 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혼자서 5천 명 분을 먹을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결국에 먹지도 못할 거면서 끝까지 안고 죽는 것이 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지내면서 우리는 힘들게 지내면서 다른 사람만 나누어 주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다만 혼자서 다 가지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데 동참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데이빗 브룩스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정말 좋은 책인데, 이 책에 보면 이력서에 들어가는 항목과 추도사에 들어가는 덕목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력서에는 사회적인 성공과 성취를 위해 필요한 능력이 언급됩니다.
반면에 추도사에는 도덕적인 성품과 영성 관계를 위해 필요한 덕목이 언급됩니다.
장례식에서 고인의 학벌이 어땠으며 재산이 얼마였는지 말한 사람 없습니다.
고인이 얼마나 정직하고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는지 말할 뿐입니다.
데이비드 브록스는 이력서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아담 1,
추도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아담 2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 1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하다.
아담 2는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희생한다.
아담 1은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반면, 아담 2는 세상을 섬기라는 소명에 순종하기 원한다.
아담 1의 좌우명이 성공이라면 아담 2의 좌우명은 사랑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아담 1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아담 2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정복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섬기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좌우명은 성공입니까 아니면 사랑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아담 1의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아담 일의 삶을 위해서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성공하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아담 1은 경제적인 논리를 따라갈 뿐입니다.
하지만 아담 2는 다른 논리를 따라갑니다.
그는 영적인 논리, 도덕적인 논리를 따라갑니다.
아담 2는 이 땅의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하늘의 신학적인 논리를 따라 갑니다.
사실 데비 브룩스 이 저자가 크리스천입니다.
그가 말한 아담 2는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둘째 아담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오늘 본문은 심판에서 시작해서 선한 청지기로 끝납니다.
언뜻 생각하면 별로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중요한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세상에서의 성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좋은 대학 못 간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것은 더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것은 더 선한 청지기로서 살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시간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물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 선물들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오셨습니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은 남은 생애 첫날입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하나님 앞에서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날, 어떠한 후회도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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