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0월 19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0. 22. 15:54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성 (9) 참된 은혜를 증언하는 나그네
베드로전서 5:12-14 | 문대원 목사
2025-10-19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짧은 성경인데 아주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까지 포함해서 총 9번 설교를 했는데 다루지 못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번에 다루지 못한 내용은 다음 번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던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늘의 법과 문화를 따라가는 나그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백성, 

예배와 선교를 위해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 선을 갈망하고 선을 행하는 자유,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선을 위한 고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한 과정, 

올바른 선택을 위해 맑은 정신으로 기도, 하나님의 양머리를 돌보기 위한 겸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중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특별히 다가왔던 부분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우리의 욕구와 의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이 다가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100%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맑은 정신으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라는 부분이 다가왔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전서의 키워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그네이고, 둘째는 고난입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는 나그네로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를 따라가지 않는 이들을 이 세상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있는 십자가의 흔적으로 인해 영광과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셨지만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의 편지에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라가는 것이 나은혜로 살아가는 성도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적으로 연결한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시는 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선포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가운데 인내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놀라운 영광과 상급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증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아멘. 베드로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가짜 은혜를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은혜가 귀하고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가치를 가진 명품일수록 가짜가 많이 있습니다.
시시한 제품에 모조품을 만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조품이 있다는 것은 원본이 아주 귀하다는 증거입니다.
세계 최고의 예술품 감정사이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이었던 토머스 허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예술 작품의 40%가 가짜라고 합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죠.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예술품의 40%가 가짜입니다.
이것은 2025년 7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큰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짜 작품을 만들고 가짜 명품을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이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켜서 사이비라고 부릅니다.
사이비가 어떤 종교 집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사 과학, 유사의학처럼 겉으로 볼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켜 사이비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도 진짜 선지자가 있고 가짜 선지자가 있습니다.
가짜 선지자에겐 특징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가짜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합니다.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고 어떠한 불편함도 주지 않습니다.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외칠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의 문제가 있고,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평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외치는 은혜는 진짜 은혜가 아니라 가짜 은혜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증언한 참된 은혜란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5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오,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아멘.

베드로가 증언하는 참된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현재 성도가 따라가야 하는 본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장차 성도가 받게 될 구원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나은혜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아야 하고, 동시에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말하지 않고 영광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고난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예수님 믿으면 이 땅에서 재물과 건강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영 신학의 문제입니다. 

번영 신학, Prosperity Gospel 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형통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또 아니죠.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예수님 믿지, 고난만 받으려고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유하는 자에게 하늘의 복과 이 땅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번영 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타이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이 현세에서 다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이 땅에서 재물의 복과 건강의 복, 완벽한 행복과 평안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번영 신학에 대해서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번영 신학의 문제는 타이밍에 있다. 그들은 지금 당장 하나님의 복을 받길 원한다. 그들은 지금 당장 재물과 건강을 원한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이 형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21세기 번영 신학을 대표하는 j 오스틴이 쓴 책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Your Best Life Now 입니다.

당신의 최고의 삶은 지금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now에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죄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입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개인의 영역에도 나타나고 또한 사회의 영역에도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를 보시면서 100%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대통령을 보면서 지금 국제사회를 보면서 완벽한 정의가 시행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 않고 국제사회도 정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개인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 모두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최고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조금만 해봤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땅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경험하는 행복은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행복의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이 땅, 사탄의 공격이 있는 이 땅에서 완벽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땅에서 완벽한 행복을 경험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실한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겠지만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에 비한다면 그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현재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있고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도 아닙니다.
이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영광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한 고난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갚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고난과 영광을 함께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잠깐이지만 장차 받게 될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고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광만 이야기합니다.
오직 축복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고난을 말하지 않는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비교, 종교학자들, 세계에 있는 모든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살기를 원한다면 모하마드를 따라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엄청나게 돈을 벌었고 성공한 상인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성공한 상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난을 이기사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왕권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No Cross No Crown' 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내게 주리라.

 

아멘.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지금이 아닙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완벽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기쁨은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광의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완벽한 정의와 사랑, 온전한 구원이 있는 그 천국을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의 처음과 마지막을 동일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인클루지오, 한국어로는 수미상관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동일한 표현을 적어서 그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1장 2절에 보면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라는 표현이 나오고, 

마지막 5장 13절에도 택하심을 함께 받은 교회에게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핵심 구절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는 대상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가 사랑으로 권면하고 참된 은혜를 증언하는 대상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이스라엘을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신명기 7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여호와 내 하나님의 성민이라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개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누구누구누구 이렇게 개인적으로 선택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선택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택하심은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나타내는 예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택하심을 보여주는 예식이 두 개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를 행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구약에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예식이었습니다.
남성의 포피를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성경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만 할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인 외국인도 할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번에는 둘 다가 아닙니다.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고르셔야 합니다.

19:06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이니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구약 시대에도 타국인 외국인도 할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방인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 그분의 백성으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그 순간부터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언약적인 사랑을 믿으면 누구든지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할례가 했던 그 역할을 신약 시대에는 이제 세례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세례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예식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세례는 개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또 예수님과 연합하여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단지 개인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예식입니다.
세례 받는 사람은 혼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보면 새 예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덧붙여진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만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만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종, 성별, 문화, 언어,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선포했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통해서 이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의 사도가 선포합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하나님의 택하십은 개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부르심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테니 하워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가장 크게 실패할 때는 바로 고립된 개인으로 살 때이다. 모든 기독교 윤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를 전제로 하고 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개인의 삶 안에 제안하면 여러분 이 사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정의로운지 보여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갚지 말고 용서해 주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사회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잘못한 사람 용서해 줬는데, 상대방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이 말씀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작동하기 위해서 모두가 다 순종해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윤리입니다.
이 윤리가 작동할 때 얼마나 아름답고 정의로운지 보여주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 스위스에서 선교회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놀랐던 사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당시 스위스에서 시내버스를 타려면 이 정류장에서 버스 티켓을 사야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누구도 그 티켓을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기사에게 보여주지도 않았고, 기사도 티켓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라 전체의 정직이라는 문화가 깔려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정직하다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될 때 이렇게 정직한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중에 10%라도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이러한 시스템을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규칙을 지켰기 때문에 표를 검사하느라 드는 사회적인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직이라는 규범을 지키면 훨씬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입니다. 

돈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성경적 가치를 실천하는 나라가 바로 선진국입니다.

 

미국의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위대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당신보다 더 위대한 것에 일부가 되어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멋진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더 위대한 것에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개인이 아니라 그분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를 공동체로 택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사명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는데 이 땅에서는 나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은을 댄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들은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아갔습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 성도들은 바벨론으로 상징화된 로마 제국에서 나그네로 살아갔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구절에 보면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우리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무난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교회가 바벨론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벨론은 실제 지리적인 바벨론이 아닙니다.
1세기 로마 시대에 바벨론은 거의 폐허가 되어서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바벨론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로마에서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 바벨론, 로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제국이었습니다. 

경제, 과학, 문명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로마의 나그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보잘것없고 비천한 신분일 수 있습니다.
화려한 세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하늘의 문화를 따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죠. 

세상 문화는 근사하고 화려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세상 문화에 비하면 교회는 조금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세상의 문화를 따라가지 않고 하늘의 문화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올바른 종말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세상의 그 마지막 모습이 어떠한지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아멘.

주의 날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이 땅의 모든 것이 불에 풀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는지 그 관점이 세상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는지 그 관점이 인생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론, 세상의 끝을 보는 관점이 윤리관, 옳고 그름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고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결국 종말론에 근거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화나 소설 중에서 이야기를 마지막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건의 종말을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에 거꾸로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야기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끝에서부터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인생의 종착점에서 우리 인생을 처음부터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종착점에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이 짧다는 사실을 왜 나는 몰랐을까, 나는 왜 그렇게 헛된 것을 추구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끝에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이것을 기억하고 이제 지금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주 짧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으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지의 발행인인 마이콘 포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죽은 사람이 승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생은 빨리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경주가 아닙니다.
인생은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주입니다.
제가 예전에 인생은 유한 게임이 아니라 무한 게임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유한 게임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목표를 먼저 달성하는 쪽이 이깁니다.
유한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하지만 무한 게임은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지고 명확한 종료 지점이 없습니다.

결승점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이긴다는 개념도 없습니다.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이 이길 뿐입니다. 

누군가와 경쟁해서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수치와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궁극적인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죽음 앞에서도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목표가 있으십니까?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는 그러한 목표가 있으십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힘과 나의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작년의 은혜,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고단한 인생길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벨론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나은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가을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을 귀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특새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간에 온 가족이 함께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교회와 태신자를 위해 기도하고, 개인과 가정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는 낙은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39편 12절 말씀 다윗의 고백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셔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아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고백합니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바벨론, 로마에서 나그네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로운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였습니다.
주와 함께 있는 나은에는 참된 은혜를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흔적을 자랑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인생을 완주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날마다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DMEoVxWz89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