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0월 26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0. 28. 11:48


행복 나눔 잔치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 시간을 위해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찬양과 간증을 준비했고 또 다과와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어도 여러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다 헛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교회에 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이 시간의 주인공이십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뭐 여러 가지로 어색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잠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기억에 남는 선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 외삼촌께서 자전거를 사 주셨습니다.
아마도 어린이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6살쯤 되었는데 외삼촌께서 사주신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을 때가 기분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기분이 좋으십니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선물을 줄 때 기분이 더 좋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갔던 맛있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뭐 당연히 부모님께서 사주셨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가서 그냥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그 식당에 갑니다.
똑같은 식당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부모님께서 사주셨는데 이제는 제가 계산합니다.
부모님께서 사주실 때 기분이 좋을까요? 

아니면 제가 대접할 때 기분이 좋을까요?
당연히 제가 대접할 때 기분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모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기도 받으러 오는 예비 부부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하면 부모님들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대접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옆에 계신 부모님께서 더 크게 아멘 하십니다.
참고로 교회에서 아멘은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과 선물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도 선물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데 선물하지 않을 수는 없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기뻐합니다.
주고 또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계 경제는 불확실하고 물가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우리 자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걱정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어떨까요?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성공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아서 브룩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직위나 커리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직위와 커리어를 잃어버린 삶에 대한 두려움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하버드 대학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잘 왔다고 환영하면서 항상 자신의 명함을 주었습니다.
그 명함에는 하버드 대학 교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내 직위, 내 커리어를 나의 정체성으로 삼습니다.
나는 명문대학 교수이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이런 말로 자신을 규정하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직위와 커리어로 나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일을 영원히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직위에서 은퇴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80%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고, 나는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흔한 유혹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은 사탄의 아주 오래된 유혹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승진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업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처벌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불명예가 두려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이나 범죄,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두려웠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유교 전통이 있어서 한국 문화에는 수치에 기반한 문화가 있습니다.
개인의 실패가 가문의 수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큰 압박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죠. 

내가 잘못하면 우리 가족에게까지 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혹시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성경은 하지만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움에 빠진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사랑의 빛, 진리의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멘,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태어나서 어둠에서 태어나서 평생 어둠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사람은 어둠을 인식할 수가 있을까요?
아마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올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깨끗한 모습과 나의 더러운 모습을 모두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둠 가운데 있을 때에는 내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거할 때 내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깨끗할까요?
아니면 더러울까요? 

다른 말로 인간은 선할까요?
아니면 악할까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우리가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 자신만 보아도 어떨 때는 착하고, 또 어떨 때는 나쁩니다.
어떨 때는 힘든 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은 착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쁜 마음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인간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종교가 되려면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과 연약함 양쪽의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외에 그 어떤 종교가 그것을 알고 있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문명을 이루었고, 인간만이 예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그저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미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에게 거짓말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는 평생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쳤는데, 우리 아이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그 행동을 자동적으로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와 타락의 결과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작동하는 거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죄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대로 살지 못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모두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러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세상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밝은 진리의 빛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아까 읽었던 말씀 요한복음 12장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멘,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 하나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무엇을 얻는다고 하십니까?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예뻐도, 아무리 돈이 많고 학벌이 좋아도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으니까 사실 죽음은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죽음이 당연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싫어합니다. 

죽음을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끔찍하고 머리가 아픕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죽음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은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마음에는 죽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원래부터 우리의 일부였던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멘.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죽음을 생각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을 느낄 뿐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비정상적입니다. 

죽음은 비합리적입니다.
우리 중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초래된 결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종교에서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슬람, 불교, 힌두교 모두 그들의 창시자가 죽은 것을 인정합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부활이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부활이 비합리적입니까?
아니면 죽음이 비합리적입니까? 

조금 아리송하지요.
질문을 바꾸면 훨씬 더 쉽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죽기를 원하십니까?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히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더 합리적이고 그것이 더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적이 없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대가가 아니기 때문이죠.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주신 이를 자랑합니다.
선물을 주는 이의 선한 마음에 이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명의를 만나서 생명을 얻은 환자와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세계적인 의사를 만나서 수술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얻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할까요? 

내가 돈이 많아서 치료받았다고 자랑할까요?
내가 착한 일 많이 해서 치료받았다고 자랑할까요?
아닙니다. 

나를 치료해 준 그 의사를 자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고 아무런 대가도 없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고 바로 예수님께서 그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면 주님께서 완성하신 그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아멘,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1KYcNcgr-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