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2-01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기도는 즐거운 일입니까? 아니면 힘든 일입니까?
누가 기도하자고 하면 기대가 되십니까? 아니면 부담이 되십니까?
누군가 기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피트니스 센터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피트니스 센터에 가는 것이 어렵지만 일단 가면 운동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기도하러 가는 것은 어렵지만 기도하고 나면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경건을 육체의 연단에 비유한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훈련과 영적인 훈련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확실한 사실은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튜브 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영적인 훈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의 모델이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모토가 있습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곧 노동이다' 라는 말입니다.
육체적인 연단과 영적인 연단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게으르면 영적으로도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베네딕트 수도원의 또 다른 규칙이 있는데,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가롭게 노는 것이 우리 영혼에 해롭' 다는 뜻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죠.
일하지 않고 놀면 좋은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영혼에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이 나태하고 게을러지면 우리 영혼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기도를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마 올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나를 가장 아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을 노동이라고 한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조금 서운해하실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결혼한 자녀가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경우가 있죠.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잘 지내시는지 대화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부모님이라면 그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녀가 그 시간을 노동으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하기 싫고 귀찮은데 억지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자녀와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녀가 그 시간을 노동으로 여긴다면 아마도 서운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기도가 노동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게으르면 영적으로도 게을러질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노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은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할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기쁨을 잃어버린 기도도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기도 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도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무엇인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아멘,
여기에 나오는 '그날' 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마지막 날입니다.
선지서에 보면 '여호와의 날'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날이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구하지 않고 아버지께 직접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나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 사람을 좀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음식이 없으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음식을 좀 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고 음식이 없는 상황 가운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떤 문제가 있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에게는 큰 염려와 걱정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있으면 예수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안 계시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23절 우리 빨간색으로 된 부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아멘,
그동안에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서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전까지는 문제가 생기면 예수님께 나왔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노력이나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천국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서 중봉하시는 그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로 만위의 주인 되시는 그 예수님의 이름에 담긴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잘 지켰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직접 나올 수 있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우리 교회에서 수성구청에 가서 불로 이웃 돕기 성금을 기탁합니다.
여러분께서 드린 그 성탄 헌금으로 우리 관내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교회의 사랑을 전해왔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성금을 기탁하러 갈 때 우리가 아무 때나 가지 않습니다.
사전에 약속을 다 정하고 딱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갑니다.
사실 교회에서 부탁하러 가는 거 아니고요.
성금을 전달하러 갈 때에도 그렇게 합니다.
하물며 고대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왕에게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프로토콜을 거쳐서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왕에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런던에 간다고 해서 마음대로 영국 국왕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함부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유한한 인간이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지 못했고 제사장을 통해서 나아갔습니다.
그것도 1년에 한 번 속죄의 일에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기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보증을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인감도장 찍으면 보증하는 의미가 있죠.
미국에서는 서명을 하면 보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개인 수표를 사용합니다.
내 수표에 금액을 적고 서명을 하면 내가 이 금액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보증을 받아서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가 없지만 예수님의 보증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멘.
종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주인의 징계를 두려워하고 주인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로 아버지께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징계는 사랑의 징계입니다.
자녀를 해치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자녀의 성숙을 위한 징계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정상적인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특권입니다.
전 세계 어느 종교도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은 무서운 존재이고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무슬림들에게 알라는 전능한 존재,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코란에 보면 알라를 칭하는 이름이 99개 나옵니다.
창조주, 절대자, 왕 같은 칭호가 99개 나옵니다.
하지만 그중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저절로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줄로 믿습니다.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번 기도합니다.
쇼핑센터 가서도 기도하고, 공항에 가서도 기도합니다.
철저하게 시간에 맞춰서 기도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그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이 성숙하신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 먼저 기도합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고 우리의 필요를 마지막에 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은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십니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환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필요를 채움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움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0편 12절 우리 빨간색 글자만 함께 읽겠습니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아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새롭게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잘못된 일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거 전혀 잘못된 일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파는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그 안에 물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 대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힘과 지혜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서 도움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에서 하는 기도나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나 다 비슷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갓바위에서 하는 기도나 교회에서 하는 기도나 똑같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기도는 전혀 똑같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학, 내가 원하는 응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큰 돈을 바쳐가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궁극적인 해결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부모라면 우리 자녀가 이 수능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대학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해결, 궁극적인 응답,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대학 나왔는데 힘들게 사는 사람 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많이 봤습니다.
보스턴에 있을 때 좋은 대학 나온 사람 많이 봤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다 행복하게 살까요? 그런 경우도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 나왔지만 그다음 진로가 꼬여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 교수 하다가 조교와 불륜 문제가 터져서 해임된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 나왔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해결, 궁극적인 응답,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녀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는 갓바위에서 하는 기도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멘, 주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방식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가져올 그 마지막 시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입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사람들은 혼란과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그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6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오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는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사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진정한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까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이고 다시 만날 그때에는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요.
주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면 그때 진정한 기쁨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것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본문 2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아기를 처음 낳는 여성에게 해산의 고통은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요즘이야 진통제가 있지만 고대 사회에는 진통제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해산의 고통과 두려움이 있지만 태어난 아이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모든 고통과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인생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로 인식될 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을 느끼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최근에 이제 갑자기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갑자기 천국에 가신 것이지요.
부부가 함께 주일에 교회에 오시다가 이제는 혼자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외롭고 쓸쓸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제 아내가 그분을 뵙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과 천국을 믿는 성도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말할 수 있고 평강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심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 일치한다는 그 말씀을 이제 우리가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런 분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렇지만 지금은 안 그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타락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악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현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LMTC 선교 훈련을 받으신 분들은 퍼스펙티브라고 불리는 두꺼운 이 교재를 다 읽으셨을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문화적 관점을 다룬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미국 신학교에서도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기도에 대한 아티클이 있습니다.
미국 고든코넬 신학교의 데이빗 웰스 교수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 중에 한 분이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분의 수업을 들었는데, 제가 만나본 신학자 중에서 생각이 가장 깊으신 분이었습니다.
데빌 웰스 교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반항이다. 완전히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래 세우신 표준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의제, 모든 계획, 모든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문장은 정말로 통찰이 있는 문장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세상의 본 모습을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니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죠.
내 마음의 욕심이 문제니까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사물을 그대로 바라보는 명상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악에 대해서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공격하는 죄악에 대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명상을 강조하지 않고 기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반대로 가는 이 세상에 저항하라고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간청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아멘,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있고 사탄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속에 가서 명상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악한 현실에 체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하며 간청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자녀가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잘 키우고자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이 상황에서 그냥 체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상황을 체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현상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데이빗 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간청하는 기도는 왜곡되고 타락한 비정상적인 세상에 대한 반역이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일관되게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반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그냥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목회자 연합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지역과 교단을 넘어서 많은 목회자들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7.14 기도 운동에서 주관해서 정말로 뜨거운 기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에 수영로 교회 이규현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수준 높은 설교는 원하면서 수준 높은 기도는 원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준 높은 설교를 원합니다.
요즘 어떤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수준 높은 기도는 원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열기, 기도의 부를 사모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금요 기도회 모이자고 하면 모이는 교회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아예 금요 기도회를 없앤 교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무기력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기도는 현상에 대한 반역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내가 순응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여러분 다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편 37편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내 마음의 소원을 내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아멘.
궁극적인 해결, 궁극적인 응답, 궁극적인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환란 중에 함께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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