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1월 25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1. 25. 20:03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경쟁적인 사회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이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파이는 정해져 있고 누가 더 큰 조각을 가져갈 것인가를 가지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국가적으로는 더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져서 실제 우리의 삶은 더 각박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에는 카페를 한다고 하면 옆에 있는 카페와 경쟁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진 프랜차이즈와 경쟁해야 합니다.
요즘은 뭐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가 많이 생겼죠?

커피 가격은 엄청 저렴한데 모델은 BTS입니다.
일반 카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마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경쟁은 동네 단위가 아니라 이제 전국 단위, 전 세계 단위로 커졌습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실패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10대와 20대 우리 젊은이들이 실패감을 많이 겪는다고 합니다.
2023년 한 언론에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한국인인 것이 좋은지, 싫은지?' 를 가지고 인식 조사를 했습니다.
뭐, 전 세계의 케이팝이나 케이 컬처 영향을 생각하면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대의 30%가 한국인이라서 싫다고 답을 했습니다.
10대도 비슷한 수치였습니다. 

연령이 높을수록 어르신이 될수록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유독 10대와 20대는 한국인이라서 싫다고 말한 비중이 높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경쟁적이다, 복잡하다, 피곤하다 와 같은 이유를 많이 들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발전했지만 개인의 삶은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정을 잃어버리고 공동체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각자 도생해서 개인이 알아서 살 길을 찾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냉정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 교회들에게 우리가 힘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자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좋은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니아 교회들의 사랑을 모델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과 2절 함께 읽겠습니다. 

  •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아멘 

여기에 나오는 마게도니아 교회들은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를 뜻합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과 희생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마게도니아 성도들도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말씀합니다.
문장의 앞뒤가 맞지 않죠?

풍성한 연보를 하려면 상황이 좋고 돈이 많아야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라는 말 있죠. 
돈이 있어야지 헌금을 하지, 돈이 없는데 어떻게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게도니아 성도들은 상황이 어렵고 가난한 가운데 헌금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2절에 보니까 그들의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성도들에게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냥 적당한 기쁨이 아닙니다. 

흘러넘치는 기쁨.
영어로 하면은 overflowing joy 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기쁘고 너무너무 감사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결혼하고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난임 클리닉도 가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서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때 부모가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치료를 받았을 때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어렵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경우를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죽음의 문턱에서 회복되어서 건강하게 생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때 느끼는 기쁨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기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죄의 결과는 정죄와 심판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에 정죄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양자로 삼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께서 대신 버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친구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 안에 확고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자유일까요?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돈이든 뭐 외모이든 학벌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죽으실 만큼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돈, 외모, 학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적당한 기쁨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기쁨, 오버 플라잉 조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가지게 되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내 소유, 내 생명, 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의 깊이는 주님으로 인한 기쁨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만큼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헌신하는 척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오랫동안 헌신할 수 없습니다.
헌신의 깊이는 기쁨의 깊이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많이 들었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나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았으면 한국에 와서 편하게 교수하면 되지,

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선교사로 갔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렇다 쳐도 왜 딸까지 고생시키냐? 는 질문도 받았습니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보스턴에 조기 유학을 보냅니다.
초등학생 때 보스턴으로 유학 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은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저희와 함께 부룬디로 갔습니다.

제가 사역하던 한인 교회 성도 중에서 저희 딸과 나이가 같은 손녀를 가지신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부룬디 선교사로 파송을 받을 때 그분이 저희 딸을 정말로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너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좋은 곳을 떠나는구나 하는 마음을 제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왜 브룬디 선교사가 되었을까요? 

부룬디 선교사로 가면 나중에 동신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청빙될 줄 알았을까요?
당시에 저는 권성수 목사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왜 부룬디 선교사로 갔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헌신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바라보는 그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흘러넘치는 기쁨으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고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인 사랑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선 먼저 사랑을 받아보아야 하는 거죠.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충만할 때, 흘러넘칠 때 비로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것, 여러분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것, 이것도 사랑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살펴보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동기로 이 행동을 하는지 주님은 다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동기로 하는 행동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희생 그 이상입니다. 

성경은 자비를 행하라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비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멘

여기서 인자, hesed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단지 인자를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그 사랑을 따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에서 시작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경험한 그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게도니아 성도들의 사랑은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풍족하고 여유로운 가운데 드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환란 가운데, 극심한 가난 가운데 드린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본문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아멘

마게도니아 성도들은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드린 것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드린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께 자신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사랑을 드려야 할까요?
우리를 구원하신 그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에게, 장로님에게 충성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조직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선교 단체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 사람은 그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칩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즉각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바라보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영어로 보니까  previlege, 특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돌보시길 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특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우리 평생에 다시는 월드컵 4강에 올라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2002년에 온 국민이 국가대표팀에 열광했습니다.
우리 우리 선수들이 이룬 그 승리에 온 국민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쁜데 그 경기를 직접 뛴 선수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는 그냥 멀리서 관중으로만 기뻐할 뿐인데, 실제로 그 역사를 이룬 선수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들에게 구원과 사랑을 주기 원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회복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멀리서 그냥 관중으로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울까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니아 성도들이 누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역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환란이 있고 가난이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결정이었습니다.
여러분, 돈과 시간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돈과 시간에는 소비 기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한 내에 사용하지 못하면 영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젊을 때 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바쁘니까요.
나중에 시간 되면 그때 봉사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나중이 올까요? 안 올까요?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기 때문에 금방 우리가 건강과 힘을 잃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봉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전에 여러분 앉아 계신 우리 교회 본관 건축할 때 그때 이야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작았죠. 

희생적으로 헌금하고 헌신하신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여러분 그분들이 돈이 많아서 그렇게 헌금한 것 아닙니다.
각자 사정이 있고 힘든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힘에 넘치도록 헌신하셨습니다.
그 결과 동신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귀하게 헌신하는 교회 청년들이 몰려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분들이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헌신하셨던 원로 장로님들께서 저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자자손손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간증을 하십니다.

 

여러분, 돈과 시간에는 소비 기한이 있습니다.

나중에 해야지 하면요 결국에는 못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이 작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이러한 간증이 쌓여갈 때 그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 가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은 타인을 위해 선을 행하는 데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일 만큼 자기 마음을 넓힌다.따라서 타인이 행복할 때 자신도 행복해 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 멋진 말이죠.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자비롭고 너그러운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서 마음이 넓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드워즈의 말처럼 가장 자비로운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기쁨을 보면서 나도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이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촌이 잘 되면 배가 아프지 함께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은 내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주님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언제 기뻐하실까요? 

주님은 그분의 백성이 행복할 때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백성이 행복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기쁘니까 나도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은 오직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주님께 드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가까운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나도 좀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 감정이 내 마음대로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기뻐할 수 있는 방법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을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는 거니까 나도 그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행복해서 나도 행복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의 행복을 보기 원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의 유익을 구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행복보다는 나의 행복을 먼저 추구할 때가 있죠.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의 목적은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최고의 배우자인가 그것을 생각합니다.
결혼을 통해서 내가 섬김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기 원합니다.

 

여기에 청춘 남녀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섬겨주고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어떻게 될까요? 

섬김을 받으려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나의 행복을 주장하는 결혼 관계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간에 하루에 한 번씩 배우자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냈는지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행복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쑥스러우면 영어로 하면 됩니다. 

I'm happy that you're happy 라고 하면 됩니다.


여러분, 하루에 한 번씩 이 말을 하면요, 부부 관계가 좋아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에 살아도 부부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의 간증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기적인 동기로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그 주님의 마음을 품고 생명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근원 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대 사회는 계산적인 사회입니다. 

뭐 다 아시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내가 일한 만큼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리더십 아니면 조직 경영에 관한 책을 보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리더는 보상을 잘해주는 리더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는 직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우니까 이번에 좀 초과 근무 수당을 못 주어도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초과 근무를 했는데 수당을 안 주면 바로 노동부에 신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합당한 보수를 받기 원합니다.
보상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 옳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보상은 없습니다.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기적인 동기로는 절대로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는데 그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어떠한 동기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행위와 그 보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아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입니다.
하늘의 상급과 이 땅에서의 평안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이 되는 것은 '아들의 모습으로 닮아간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보상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 보상을 약속합니다.
명령과 보상을 동시에 주고 있습니다. 

명령과 보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사랑의 원형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사랑의 행위와 그 보상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보상, 합당한 보상을 바라는 그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연인에게 결혼은 합당한 보상이며, 결혼을 원한다고 하여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귀족 작위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장군은 속물이지만 승리를 위해 싸우는 장군은 속물이 아니다.
합당한 보상은 어떤 활동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부산물이 아니라 그 활동 자체의 완성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멋진 말이죠. 

제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청년 커플이 5년 동안 교제를 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 이제 교제했으면 결혼해야 하겠죠.
그래서 여성이 남성에게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성이 자기는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여성은 아니 결혼할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5년 동안 사귀었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진정한 연인에게 결혼은 합당한 보상입니다. 

남녀가 데이트하고 교제하는 것, 그것의 완성은 결혼입니다.
결혼을 위해서 데이트하는 것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보상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는 그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부여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국 보좌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면서 나도 함께 행복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해야지 이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일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뻐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학벌이든 자녀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제일 기뻐하는 그것이 나의 우상입니다. 

우상숭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우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만든 우상은 반드시 우리를 배신합니다.
제가 우상숭배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면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는 그 마음을 품고 당신이 행복해서 나도 행복하다는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Z4XQkzy1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