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2-22
오늘부터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 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상 숭배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상숭배를 금지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도 살펴보겠습니다.
우상 숭배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궁극적인 안전을 위해 당신의 마음이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오직 마음의 신뢰와 믿음이 하나님도 만들고 우상도 만든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궁극적인 안전을 줍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면 안정감을 느끼십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창고에 가득한 식량이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올 겨울에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으면 든든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통장에 있는 잔고가 안정감을 줍니다.
노후에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이와 같이 궁극적인 안전을 위해서 우리 마음이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과거에는 신의 형상 앞에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들이 있습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고, 학벌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합니다.
한창 자라야 할 아이들이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음식을 먹습니다.
아이들에게 외모의 기준이 아이돌 가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쁜 아이돌 가수들처럼 보이려면 더 날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롭게도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바로 우상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금지하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우상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 의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부모님의 유품이나 사진을 우리가 보관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 소중한 물건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배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카톨릭에는 여러 가지 성상과 성화가 있습니다.

십자가상도 있고 마리아상도 있습니다.
유럽의 성당에 가면 수많은 성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습니다.
카톨릭은 성상과 성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에서 성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칼빈은 성상 숭배를 비판했고, 그를 따르는 네덜란드 개혁주의자들은 성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성상이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신앙, 말씀 중심의 예배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는 어떠한 성상도 없고 성화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상숭배가 가득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아멘,
하나님께서 어떠한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형상은 다른 신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기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신의 형상 앞에서 절하고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만 신의 형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만드시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제2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다른 민족은 다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스라엘만 신의 형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하고 있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명절에 차례를 지내면 모두가 다 절을 합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절을 합니다.
불교도 절하고 천주교도 절하고 무교도 절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 절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절 때 절하지 않는다고 박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모든 민족들은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절하는 것이 그들에게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만 신의 형상이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만드시는 것을 금지하셨을까요?
영광과 능력이 무한하신 그 하나님을 어떠한 형태로든 형상화하는 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일부로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주로 한 지역에 국한했습니다.
그 신을 숭배하는 특정 민족에게만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열방의 심판자가 되시고, 또한 모든 민족의 구원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신성 모독입니다.
세계적인 고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이 우상숭배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의 구별을 흐려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그것을 통해 피조세계 전체가 그분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세계는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창조주가 절대로 피조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은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스티브 잡스는 절대로 아이폰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폰을 보고 스티브 잡스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능력과 인격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는 절대로 피조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피조세계의 일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조각할 수 있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우상숭배는 환원주의와 같습니다.
환원주의를 우리가 영어로 ' reductionism' 이라고 합니다.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것을 하위 단계의 요소로 세분화해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환원주의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생물학적인 요소로 나누어서 장기와 세포, DNA로 설명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세포와 DNA로 인간의 몸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DNA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까 유럽에서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생후 2개월 된 아기의 뇌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2개월 된 아기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잖아요.
그냥 누워서 먹고 자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경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생후 2개월 된 아기의 뇌에서 엄청난 인지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생후 2개월과 9개월 사이에 엄청난 인지 발달이 있다고 합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의 지성을 어떻게 DNA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인간을 단순화해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환원주의입니다.
환원주의는 대표적인 철학적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단순하게 생각해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엄청나게 축소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엄청나게 축소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상과 하나님은 완전히 다릅니다.

형상은 물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형상은 죽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물질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또 가장 대표적으로 형상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4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아멘.
하나님께서 호렙산 불길 중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현현' 영어로 theophany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불이 나타나기도 하고 구름과 연기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성서 가운데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불의 혀 같은 것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임재하실 때 불과 연기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분의 형상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4장 9절에 보니까 너는 스스로 삼가며, 15절에도 너는 깊이 삼가라.
또한 23절에 너희 희는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가라가 히브리어로 שָׁמַר(샤마르) 입니다.
영어로 하면 keep, watch 입니다.
파수꾼이 집중해서 성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가 집중해서 지켜야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19절까지 보면 다양한 종류의 형상들이 나옵니다.
남자와 여자, 육지의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해와 달과 별의 순서로 나옵니다.
이러한 형태로 우상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이 숭배의 대상은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정반대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해와 달과 별, 바다의 고기, 공중의 새, 육지의 짐승, 남자와 여자의 순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우상의 형상은 이와 정반대 순서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섬길 때 모든 것이 뒤집힌다는 사실입니다.
우상숭배는 모든 관계를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원칙도 없고 질서도 없는 뒤죽벅죽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바벨론 지역에서는 점성술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점성술사들은 해와 달과 별을 신격화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그리하여 내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아멘.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을 배정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신이 아닙니다.
그저 피조물일 뿐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상 숭배의 결과는 질서가 없고 원칙이 없는 혼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 진리와 규범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면 이 세상의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이 사람, 그다음이 물질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고, 돈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주 자리에서 빼면 이 모든 질서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에 사람을 예배하게 됩니다.
특정 목사, 특정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추정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심지어 목회자라 하더라도 여러분 절대 맹신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다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권성수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목사를 하나님처럼 존경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도 맹목적으로 추정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연약하고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돈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따르는 자는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이용합니다.
돈을 위해서 얼마든지 사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돈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상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이야기죠.
저희 어머니 친구 중에서 서울에 아파트가 15채가 있는 분이 계십니다.
아 너무 부럽죠 서울에 아파트 하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열다섯 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없을까요?
친구가 없습니다.
왜 친구가 없을까요?
친구보다 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친구 중에서 한 분이 큰 병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수술비를 도와주자고 했습니다.
이분이 얼마를 냈는지 아십니까?
5만 원 내셨습니다.
아파트가 15채 있는데 수술받는 친구를 위해서 5만 원 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0년 전에 자기 남편 수술받을 때 그때 5만 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년 전 5만 원하고 지금 5만 원하고 똑같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5만 원하고 부자의 5만 원하고 똑같습니까?
이분은 돈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변에 친구가 없습니다.
여러분,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상입니다.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돈보다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세상의 질서는 하나님, 사람, 돈 순서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이 앞설 수 없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빠질 때 모든 질서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질서와 원칙이 흔들릴 때 우리는 큰 혼란과 혼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 우연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에서 하나님을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절대 진리와 절대 규범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곧 우상숭배의 결과와 마찬가지입니다.
포스트 모던 사회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사 시대와 똑같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아멘.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질서에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자기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마음대로 법을 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식으로 하면 이 사회는 작동할 수 없습니다.
각각 개인이 법을 정하는 주체가 되면 이 사회는 마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성애 문제가 최근에 대두된 것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동성애는 지난 2천년 동안 계속해서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최근에 대두되었을까요?
과거에는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사회의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동성애는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래도 우리 마음에 부끄러운 마음이 있죠.
무언가를 훔치면서 당당하게 훔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사회의 규범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지 사회가 정할 수 없고 내가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회가 정할 수 없고 내가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세상의 질서에서 하나님을 빼면 질서가 없고 원칙이 없는 혼란만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주님께서 뜻하신 평안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로 사람들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창조주를 섬기는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질투라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제 질투는 미덕이 아니죠.
속이 좁고 이기적인 사람이 주로 질투를 합니다.
마치 하나님도 그런 분인 것처럼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인정,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어로 질투가 ‘카나(קָנָא) 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질투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의 열심, 여호와의 열심' 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이사야서 9장 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열심이 질투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질투'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향해서 열심이 있으십니까?
그분의 약속을 향해서, 그분의 영광을 향해서 열심히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열심히 있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모든 부모는 우리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합니다.
너무너무 사랑하죠.
나는 못 입고 못 입어도 내 자녀는 나보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를 나쁜 길로 인도하는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같이 도박하자고 하고 같이 마약하자고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를 따라가면 사랑하는 자녀의 삶은 망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그 나쁜 친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겠습니까?
그 친구를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삶을 망치는 나쁜 친구를 축복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향한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그 친구를 막을 것입니다.
절대 그런 친구하고 어울리면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친구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바로 우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질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질투하십니다.
헛된 우상을 따라가면 우리의 삶이 망가지고 불행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질투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향한 불타오르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애타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해서 돈을 내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지 말고, 헛된 것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좋은 것과 기름진 것으로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그 어떤 누구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영어로 이런 표현이 있죠.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이죠.
공짜로 점심을 준다고 해서 갔지만 가면 뭔가를 꼭 해야 됩니다.
무슨 설명회를 듣든지 세미나를 듣든지 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상대방이 원하는 거 하나 해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 말 믿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자는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럼 여러분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그 주인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주인은 우리를 학대합니다.
과거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듯이 세상의 모든 주인은 우리를 학대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우리를 억압합니다.
세상에서 오직 한 분만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아멘,
다른 신에게 절할 때 우리는 그 신의 노예가 됩니다.
그 신은 우리를 학대하고 억압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속이 좁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향한 불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Edr_kTq5u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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