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4월 05일 대구동신교회(부활주일)

마이코 2026. 4. 13. 14:46

베드로전서 1:23-25 | 문대원 목사

여러분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탄절 아니면 부활절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탄절과 부활절 중에서 어느 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는 예수님을 종교 사상가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탄절이 더 중요한 날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우리에게는 부활절이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뭐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에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흩어졌고 숨어서 지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의 다음 타깃은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대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러한 예는 많이 있었습니다.

AD 1세기 전후에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카리스마의 환호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운동은 사라졌습니다.
성경에도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최고의 율법사였던 가말리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함에 사람이 약 400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함에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칭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사람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무리도 사라졌습니다.
당연한 말이죠. 스스로 신이라고 한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그를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져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수천 명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이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자들은 이전과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에 고대 사본은 현재까지 약 5800개가 존재합니다.
성경은 동시대의 다른 그리스 문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서 미국의 빌리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실전했다는 기록과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에 사망했다는 기록보다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훨씬 더 많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줄리어스 시저가 실전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으십니까? 

수많은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기록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시저에 대한 기록,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기록보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 하는 것은 조금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시저의 존재, 알렉산더의 존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조와 부활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곧 부활의 능력이 되는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말씀이 곧 부활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라질 것과 사라지지 않을 것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썩어질 것이 있고 썩어지지 않을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오.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아멘, 

우리가 거듭난 것, 새 생명을 얻은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닙니다.
썩어지지 않을 씨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물질입니다. 

물질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고 썩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창조 아니면 진화입니다. 

현대 과학으로 창조와 진화 중에서 무엇이 옳은지 증명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단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100% 증명할 수 없습니다.
창조를 지지하는 증거도 있고, 진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도 있습니다.
현대 과학으로 100% 증명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창조론,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열역학 법칙 같은 법칙이 아니라 이론, theory인 것이지요.

그런데 꼭 생물학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진화론의 허점을 우리가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도덕 의식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도덕 의식입니다.
동물에게는 도덕 의식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수사자는 이전에 우두머리가 낳은 새끼들을 다 물어서 죽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암사자는 새끼를 키우는 동안에 발증기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끼가 죽으면 다시 발증기가 오기 때문에 새로운 우두머리가 짝짓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짝짓기 하기 위해서 기존에 있는 아기 사자들을 다 물어서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잔혹한 일이지만 수사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자에게는 도덕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는 인격이 없고 오직 본능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에게는 그분의 형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도덕 의식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인간의 양심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도덕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말싸움입니다. 

말싸움 논쟁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논쟁을 하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양쪽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공유해야 합니다.
양쪽이 동의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어야지 우리가 논쟁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한쪽은 야구 규칙을 따르고, 한쪽은 축구 규칙을 따르면 양쪽이 경기를 할 수가 없죠.
양쪽이 동일한 규칙을 따라야지 경기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논쟁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가 공유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에 기록된 하나님의 도덕 법칙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논쟁할 수 없습니다.
강아지도 논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논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도덕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는데 왜 인간에게만 도덕 의식이 있는지 진화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창조와 진화는 단순히 과학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우주를 이해하는 세계관입니다.
세상의 기원과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세계관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움직임에는 반드시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무언가가 움직였다면 그것을 움직이게 한 힘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서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순간까지 이르게 됩니다.
태초에 생명의 운동을 시작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가리켜 부동의 원동자, Unmoverd Mover 라고 불렀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가 제1 원인이 되어서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것은 타당한 말입니다. 

다만 그 부동의 원동자가 누구인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게시해 주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라면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선언이고 도덕적인 선언입니다. 

 또한 이것은 존재론적인 선언이고 목적론적인 선언입니다.
우리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는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인격적인 창조주는 인격을 가진 존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물질 세계를 넘어서 영혼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영원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와 언어와 상관없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말해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입니다. 

인간은 시간 안에 태어나서 시간 안에서 살다가 시간 안에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시간 바깥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은 시간 너머에 영혼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 인식합니다.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 태어나서 물 안에서 살다가 물 안에서 죽습니다.
그런 물고기에게 물 바깥에도 세계가 있다라고 설명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물 밖에 가면 죽음뿐인데 어떻게 물 바깥에 세계가 있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바깥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원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아멘.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영혼의 세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영혼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인간은 물질 세계 안에서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영원의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도 쉬운 일인데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죽기를 원하십니까?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히 영원히 살기를 원하죠.

이것이 더 합리적이고 더 정상적입니다.
죽음은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우리 중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물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물질 세계 안에서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영원의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장차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될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영원한 소망이자 살아있는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첫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보니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소리가 아닙니다. 

어떤 에너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입니다.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가 처음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것보다 예수님의 영광을 더 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보다 예수님의 신성을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통교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이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부활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됩니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이 마지막 날에 부활을 선포하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의 말씀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 모든 사람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예수님께서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역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처음과 마지막이오 시작과 마침이라 

 

아멘,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창조의 말씀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계실 부활의 말씀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와 부활의 모든 사역이 완성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 되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유진 피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사랑이 빚어내고 의도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대신 예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 본문 23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오.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아멘,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한다고 해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협력한다고 해서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다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오래전 영화 중에서 '굿 윌 헌팅'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놀라운 천재성을 가졌지만 힘든 환경에서 자란 윌이라는 청년과 그를 상담하고 도와주는 션이라는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상담자 션이 윌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가 있는지 질문합니다.
그러자 책을 많이 읽었던 윌이 대답했습니다.

셰익스피어, 니체, 프로이드 등 얼마든지 그런 소울메이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션은 죽은 사람 말고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만나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아무리 존경해도 죽은 사람하고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AI가 아무리 편리해도 AI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AI는 누적된 정보에 근거해서 가장 그럴싸한 대답을 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염려와 고민, 두려움을 다 그분께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간에 봄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비전관을 가득 메우고 본관에도 많이 오셨습니다.
아이들도 많이 왔습니다. 어린 아기, 유치원생, 초등학생도 많이 왔습니다.
특새 때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자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지 5년 반이 됐으니까 엄마 품에 안겨왔던 아이들이 이제 유치원생이 되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저희 딸도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에 왔는데 벌써 고1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되죠.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습니다. 

몸만 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도 함께 자라납니다.
매년 특새에 오는 아이들이 하는 그 기도와 찬양이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특새에 나올까요?
특새에 오면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나오신 분의 말씀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느끼는 감동은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의 20%도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대구 콘서트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워낙 유명한 분들이기 때문에 유튜브에 가면 실황 공연이 다 있습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집에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시간과 재정을 들여서 콘서트하우스에 갈까요?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은 유튜브로 느끼는 것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특색에 많은 분들이 오시는 이유는 온라인 예배에서 느낄 수 없는 은혜와 감동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말씀 가운데 기도와 찬양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기쁨과 슬픔을 이미 겪으셔서 다 알고 계십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감정을 다 이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항상 있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 보니까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매노'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헬라어 '매노'는 제자도의 핵심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매노라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이 한 절 안에 똑같은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안에 거하라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매노를 영어로 번역하면 remain, abide 입니다.
머무르다, 거주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주님과 함께 기뻐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주님께 위로를 받습니다.
살아계시고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최근에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뭐 큰 수술이든 작은 수술이든 상관없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은 떨리는 일입니다.
전신마취를 한 이후에 다시 깨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9% 안전하다고 해도 내가 그 1%에 해당되지 않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전신마취 수술을 앞두고 너무너무 무섭고 떨려서 운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혼란 앞에서 믿을 존재가 없기 때문에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수술실에 들어갈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항상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가시고 모든 과정을 주관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위해서 끝까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God with u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는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어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어떨 때는 잘 되고, 또 어떨 때는 잘 안 됩니다.
성공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실패만 계속되는 인생도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그러므로 성공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실패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의 성공, 한 번의 실패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아주 놀라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작은 일에 교만하거나 작은 일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 대신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창조의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계실 부활의 말씀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살아계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인격입니다.
본문 24절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아멘, 

영혼부터 영혼까지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신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들을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마음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그 하나님을 감사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QaWkkzbHH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