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돌아보며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경우가 있겠죠.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경우라도 아버지 역할, 어머니의 역할을 하신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삼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자라났습니다.
제가 한국과 미국, 유럽과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한 번은 미국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왜 그렇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가정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떠셨고 어머니는 어떠셨는지 이야기를 합니다.
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미국 친구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정하면 되지 왜 굳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인데 왜 자꾸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한국은 공동체 중심의 사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미국은 개인주의적인 사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말할 필요 없습니다.
나의 능력, 나의 꿈, 나의 성품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러면 개인주의와 공동체 주의 중에서 무엇이 옳을까요?
둘 중에 어느 한 가지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도 문제이고, 극단적인 공동체주의도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가족과 배경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태어날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사람의 가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좋든지 싫든지 상관없이 아버지는 나의 인격이 형성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들을 상담할 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아버지를 만날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 보니까 이분이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좋은 아버지를 만나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죠.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아버지를 만날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아버지가 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어떤 가정으로 만들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이 어떤 가정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간단합니다.
가정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용납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사랑과 용납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1서 4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 말씀을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두려움은 심판과 연관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벌을 받아야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물론 자녀가 잘못하면 우리가 꾸중하고 훈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심판과 징계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심판은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하다가 신호 위반을 했으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이 심판입니다.
하지만 징계는 그 사람이 성숙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신호 위반을 했는데 아버지가 벌금을 대신 내줍니다.
다만 부주의하게 운전한 것에 대해서 반성문을 쓰게 합니다.
이것이 징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징계의 목적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도록 훈계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종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순화해서 종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이죠.
두려움은 노예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주인과 노예는 겸상할 수 없었습니다.
뭐 겸상은커녕 신체적인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노예가 함부로 주인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노예를 때릴 수 있었습니다.
소와 말을 때리는 것처럼 노예를 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누구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노예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종의 마음은 무서워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멘.
종은 주인을 무서워합니다.
주인의 분노를 무서워하고 주인의 심판을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했어도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에게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서 자신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가정에서 꾸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눅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혹시 잘못된 말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현혹되는 경우가 있죠.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중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사기성 있는 것 같은데 쉽게 설득당하고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꾸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 그러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는 안전한 곳이고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두려움은 안전과 보호가 없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저도 예전에 이러한 두려움을 느꼈던 데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생활할 때 이야기입니다.
부룬디에는 한국 대사관이 없습니다.
한국 대사관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교통사고가 나도 아무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입니다.
부룬디 바로 위에 보면 르완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부룬디에는 한국인이 약 10여 명밖에 없지만, 르완다에는 한인이 300명 정도 있어서 한국 대사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1년에 한 번 르완다 대사관에서 대사님이 부룬디로 오십니다.
부룬디에 살고 있는 사람들 다 모아서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부룬디는 위험하니까 빨리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룬디에서 무슨 사고가 발생하면 르완다 대사관에서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저희가 떠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위험한 일 생기면 각자 알아서 잘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더 발전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여전히 많은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있지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 좋은 시대, 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 왜 여전히 두려움이 많이 있을까요?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항상 마음 가운데 두려움과 걱정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월터 브로그로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방식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고 그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안전에 집착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괜히 도와주었다가 내가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나중에 나도 돈이 부족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지배를 당하면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 동안 두려움의 지배를 받으면서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비로소 평안과 안정을 찾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두려움은 노예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자녀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자녀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요한 1서 3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아멘,
한글 성경에는 '어떠한 사랑'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니까 'what great love'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사랑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한 배신자였습니다.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1948년 여순 사건 때 공산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목사님의 두 아들을 살해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자녀를 죽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솔직한 마음으로 똑같이 복수하고 싶을 것입니다.
복수하지 않고 선처해 달라고 편지만 써도 그 사람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목사님 역시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배신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죽게 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가장 완전한 사랑이고,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대함입니다.
본문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아멘,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심판날이 다가와도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날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저희 딸이 저에게 버림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못 보았다고 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사춘기 자녀의 눈치를 보지, 사춘기 자녀가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두 사람이 있을 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세상에서는 힘세고 돈 많은 사람이 갑입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다릅니다.
가정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 됩니다.
부모와 자녀 중에 누가 더 사랑합니까?
당연히 부모가 더 사랑하겠죠.
그러니까 부모가 항상 을이 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모가 자녀 눈치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더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을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아들을 키우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어린 아들은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그 아들의 소원은 그 지역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야구장에 가는 것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어디에서 야구 티켓을 구했습니다.
직장에서 누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너무나 기뻐했고, 함께 야구장에 가기 위해서 어머니는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야구장에 갔는데 알고 보니까 이 티켓이 무료 티켓이 아니었습니다.
정가에서 할인해 주는 할인 티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 나머지 금액을 지불할 돈이 없었습니다.
실망한 아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면서 어머니는 너무너무 미안해 했습니다.
결국 야구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경기장 밖에서 도시락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오래 흘렀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병에 걸리셨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아시고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야구 미안해' 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는데 야구장에 데려가지 못한 것이 늘 미안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미 해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해주지 못한 것만 기억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경험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건강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실패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고받아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곳입니다.
실패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의 에이미 에드미선 교수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연구한 학자였습니다.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를 위해서 심리적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는 25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원래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줘도 안전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혁신적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부정적인 관행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심리적 안정감을 배양하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리더가 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을 때 개인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심이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을 때 공동체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부정적인 관행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을 때 공동체는 변화와 혁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부정적인 관행에 대해서 질문할 수 없었습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안정감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 그때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손주에게 어떤 질문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그런 자유가 있을 때 여러분의 자녀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렇게 될 때 심리적 안정감을 누리게 되고,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온전한 사랑과 용납이 가득하여서 여러분의 자녀와 손주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차가운 사람이 되기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따뜻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많이 있지도 않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실제의 내 모습 사이에서 혹시 좌절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함께 스노우보드를 타는 영상이었습니다.
5살쯤 되는 어린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어린 아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1분도 안 되는 영상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댓글을 보니까 이런 글이 많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나도 이런 아빠를 갖고 싶어요라는 글이 많았습니다.
사랑이 많은 아빠, 마음이, 따뜻한 아빠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런 아빠를 키운 부모가 대단하네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학대를 받은 사람이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사랑,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그러한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는 일을 실제로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내가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는데 자녀 교육을 잘 시킬 수 없습니다.
나도 공부를 안 해 봤는데 자녀에게 공부를 잘 지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실제로 하는 것은 아주 아주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한 사랑을 주십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아무리 훌륭하셔도 완전한 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 타락한 인간은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을 때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사랑, 고난이 다가와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사랑,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의 가장 완벽한 아버지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좋은 분이셨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런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면서 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주지 못했던 그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어주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나의 외모, 나의 능력, 나의 성과를 가지고 나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나의 연약한 모습, 나의 불완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면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시나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 혹시나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할까 반복해서 반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모든 일은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구절 안에 헬라어 meno 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왔습니다.
meno 는 생명적 연합 관계를 뜻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주 위에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연결되어 있을 때 그분으로부터 생명 수액을 받아서 누리게 됩니다.
몸이 아플 때 우리가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는 경우가 있죠.
저도 예전에 독감에 걸렸을 때 정말로 몸이 아팠는데 병원에 가서 수액 맞고 나왔습니다.
그때 수액의 힘을 느꼈습니다.
영양 수액을 맞으면 아픈 몸이 회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수액을 맞으면 상한 마음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영적인 수액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면 마음의 깊은 상처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가끔 마음이 날카로운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찌르는 말을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분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저러는구나.
충만한 사랑을 받았다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사랑입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게 되면 우리의 날카로운 마음이 누그러지게 됩니다.
인격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됩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을 때 이 동사는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사랑을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차갑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회복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치고 상한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그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가 있고, 매주 만나는 사이가 있고, 매일 만나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누구와 가장 편안하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당연히 매일 만나는 사이에게 가장 편안하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무 가식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친밀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무 가식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셔도 됩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고 그분의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선 오랜 시간과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도 그렇고, 가족과의 친밀감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결단한다고 해서 자녀와 친밀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어떤 분이 자녀와 친밀하게 지내기로 결단했다고 하겠습니다.
평소에는 대화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녀 불러서 대화하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엄청 어색할 것입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당연하죠.
친밀감은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나는 너랑 친밀하고 싶은데 왜 너는 안 그러냐고 다그치면 안 됩니다.
진정한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거절과 심판에 대해서 노예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랑은 용납과 구원을 경험한 자녀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온전한 사랑이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할 곳은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 곳입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안전한 곳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여서 그 사랑으로 가족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FvH61A33J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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