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4월 20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4. 20. 23:19


골로새서 3:1-4 | 문대원 목사
2025-04-20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가르침을 강조하지, 창시자가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곧 부활을 전파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명은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을 발견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돈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돈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보다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나 권력을 위해 살아갑니다.
명예의 유혹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명예보다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은 그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자기 목숨이 소중했고,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잘 설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유주의자들은 정의, 평화, 화해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강조합니다.
역대 WCC 대회의 주제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013년 WCC 대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였고,

2022년 WCC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듣기 좋은 말이고,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핵심에서는 멀어진 말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승천하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정의, 평화, 화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사라진 그 교회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지금 자유주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자유주의 교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갔던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하러 갔습니다.
보스턴 인근의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봉사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했던 장소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던 교회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곳은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은 아주 낡았고 전혀 관리되지 않았습니다. 

지하 식당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사라진 교회에는 제대로 된 예배가 없었습니다.
다음 세대 청년들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활이 사라진 교회는 그저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구호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예배하는 곳인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부활의 신앙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다'가 아닙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선포합니다.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부활을 과거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2천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작년과 재작년 부활절에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활을 미래의 약속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입니다.
의인도 부활할 것이고, 죄인도 부활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부활해서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에 일어나게 될 미래의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을 우리가 현재의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 미래의 약속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지금도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 미래의 약속만이 아니라 동시에 현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선포한 진리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두 가지 축이 되는 사건은 창조와 부활이다.
하나님은 창조로 세상을 만드시고 부활로 세상을 구속하신다.
그 사이에 놓인 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고통, 혼란, 우울, 불행, 괴로움, 그리고 죽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적인 관점, 거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짧고 유한한 내 인생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 우주적인 이야기, 영원한 이야기 안에서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야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축은 창조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시작점이 있고 그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속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주님의 풍성한 그 생명이 모든 성도의 삶을 회복시켰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이 거대한 이야기 'grand narrative'가 우리 인생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알기 원합니다. 

동물은 먹을 것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우리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에 가서 열심히 수행한다고 명상한다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적인 이야기, 그 영원한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과연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온 우주를 향한 거대한 이야기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구속하셨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구속의 역사는 지금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한다면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상관없게 느껴집니다.
아직 내가 죽을 날이 멀었는데 부활이 별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우리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부활 때 누리게 될 그 기쁨과 감격을 우리가 지금부터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확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약혼식을 많이 안 하지만 예전에는 약혼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도 약혼식을 먼저 하고 1년 있다가 결혼을 하셨습니다.
약혼식을 하면 결혼이 더 확실해지지 아직 법적으로 부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을 모시고 약혼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부부가 누리게 될 그 기쁨을 먼저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아파트 청약을 받은 것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서울의 아파트 청약을 받은 친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내 집 마련을 위해서 고생하다가 마침내 청약에 당첨되었습니다.
입주하려면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하지만 청약에 당첨된 순간부터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아갑니다.
살고 있는 환경은 똑같거든요.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약에 당첨된 이후로는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이루어질 그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아파트 청약에 비교하는 것은 물론 무리가 있겠습니다.
제 말의 포인트는 아직 이루어지지 그 확실한 약속을 현실로 인식할 때 우리 안에 있는 기쁨과 소망이 넘친다 하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부활을 현실로 인식할 때 우리 삶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사도 바울은 두 개의 단어로 이 변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2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아멘, 주님의 그 부활을 현실로 인식할 때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위의 것을 찾게 됩니다. 

둘째로 위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찾는다 하는 것은 마음의 갈망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이 간절하게 원하고 간절하게 소망한다는 거죠.
또한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그곳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초점이 거기에 맞춰져 있다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현실로 인식할 때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 그 모든 것이 위의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생각에 초점이 위의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위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골로새서 3장 1절 빨간색 부분만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아멘.

위에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하는 것은 주권과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통치권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천국을 통치하시고 우주를 통치하는 그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은요. 

예수님의 통치를 갈망하고 예수님의 통치에 생각에 초점을 맞추라 하는 말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지 말고,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고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갈망하고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당연한 말이기도 하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선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말은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연합할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6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아멘.

이 말씀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나타내는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여러분 세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례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비밀리에 행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행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로마서 6장 4절 우리 빨간색 글씨만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러니까 주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되는 그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 인생을 보이는 그대로 관찰한 것이지요.
그리고 말하기를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도 아마 죽음을 원치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보다 훨씬 더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아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죄의 저주에서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으로 있을 때에는 죄를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것을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취해 있는 동안에는 모릅니다.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항상 취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술에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취해 있는데 자기가 안 취했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멀쩡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노예는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그런 사람 보신 적 있으시지요?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 상처를 많이 주고 있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는 자기가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죄의 저주에서 자유케 된 사람은 내가 죄를 짓는지 안 짓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가 탈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가 있지요.
하지만 이제는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죄를 깨닫는 즉시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죽은 사람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자기 뜻과 자기 계획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뜻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뜻을 갈망하게 되고,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천국의 가치,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기 싫은데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게 되면 절제할 수 있습니다.
내 육체가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해도 그와 반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건강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십니까? 

아니면 건강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3세라고 하고, 그 중에서 건강 수명은 73세라고 합니다.
건강하게 우리가 잘 먹고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평균적으로 73세라고 합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몸이 아파서 병원에서 오래 지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건강하게 살려면 건강을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건강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 내 마음대로 먹지 않습니다.
밤에 먹고 싶다고 막 야식 마음대로 먹지 않습니다.
건강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 하기 싫어도 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냥 편하게 누워 있고 싶지만 건강을 위해서 몸을 일으켜서 운동을 하게 됩니다.
저도 건강을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식단 조절을 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막 먹지 않고 건강을 생각해서 먹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 운동을 합니다. 

밖에 나가서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까 교회 계단을 오릅니다.
점심 먹고 교육관 계단 왔다 갔다 여러 번 반복해서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술 좋아하는 사람도 큰 병에 걸리면 술을 끊을 수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진짜로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절제할 수 있습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최상위 가치로 여기라 하는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한 최상위 가치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난 이후에도 세상에 종말이 온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여기서 나온 그 헬라어 동사가 테오인데, 똑같은 동사가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6장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여러분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붙잡고 살아가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자로서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또한 영원한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전과 똑같은 상황을 살아가게 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육신의 관점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과 현실을 보는 영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비밀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3절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아멘,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라는 말은 육신의 관점으로는 이 생명을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그 아이와도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태중에 있는 그 아이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생명이 있습니다. 태

아의 심장이 뛰고 그에게 인격이 형성됩니다.
어머니는 태중에 있는 그 아이와 인격적으로 교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남자라서 한 번도 그런 경험 해본 적이 없지만, 임신해 보신 분에 따르면 태중의 아이와 인격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태중의 아이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 어머니의 배만 보이지, 아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육신의 눈으로 이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태중의 그 아이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감추다라는 것은 공격하는 원수를 피해 안전한 곳에 숨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를 안전하게 숨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 것입니다.
시편 32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란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다.

 

아멘. 환란 가운데 있던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은신처(hiding place)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공격을 피해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감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추다는 안전하게 보호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겠다 하는 약속입니다.
그 부활의 약속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평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 믿음에 진정한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죠.
바로 죽음 앞에서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종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 수많은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테스트는 죽음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테스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 어느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환생을 주장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과 환생을 주장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그 이데아의 세계로 가지만, 육체는 이 땅에 남아서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지만,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도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어떻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지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 부활을 현실로 인식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어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해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현실로 인식한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가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사모님의 장례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마지막 장례 예배 때 관을 열어놓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그 마지막 모습을 보고 한 사람 한 사람 애도를 표합니다.
이 사모님은 너무나도 귀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셨는데 큰 병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팠냐면 팔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병이 깊었는데 그 사모님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런 표정으로 누워 계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마지막 표정이 이럴 수 있는지 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도 아니고 큰 병으로 고통을 받으신 분이 어떻게 이러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사모님의 마지막 표정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테스트인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힘이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 영원히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영원히 함께할 분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그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가진 현재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부활을 현실로 인식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위의 것을 찾게 되고 위에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봄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을 깨워서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진은 주일 예배 사진이 아니라 월요일 새벽 4시 50분 모습입니다.
생후 3개월 된 아이부터 90세가 된 원로 장로님까지 온 세대가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특새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 특새 개근한다고 우리 교회에서 돈을 주지도 않고 선물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특새에 나오셨습니까?

위에 것을 찾고 위에 것을 생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해서 그 힘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한목소리로 고백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그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여서 주님의 뜻을 갈망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Ro6teLC4A8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