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에서 권위는 인기 없는 단어입니다.
권위적인 리더, 권위적인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 사상을 따르는 현대인들은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기준대로 살고 나는 내 기준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기준을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시작에는 해체주의가 있었습니다.
해체주의는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문예 비평 이론입니다.
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가 한 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각각의 독자가 텍스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해석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단 하나의 정해진 의미가 있다는 기존의 권위와 전통을 거부한 것입니다.
문학에서 시작된 해체주의는 현대 음악과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친구 중에서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음대 교수로 있고, 코리아 심포니 상임 작곡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이 친구가 현대 음악을 하는데 아주 실험적인 곡을 쓸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를 모티브로 해서 성악곡을 썼습니다.
잡쌀 떡 하는 그 멜로디를 가지고 모티브로 해서 곡을 썼는데, 이 노래를 한국 성악가가 부른 것이 아니라 미국 성악가가 불렀습니다.
찹쌀떡이 발음하기 힘든 단어거든요.
정확하게 발음해서 불렀는데 엄청 신기한 곡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입니다.
고전 음악을 탈피한 현대 음악이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해체주의 현대 음악, 현대 미술은 기존의 권위를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문화와 예술에서 이러한 노력은 좋게 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만 항상 그렇게 예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권위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모든 권위를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위와 전통은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고 딱딱하다라는 생각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해체주의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던 사상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절대 규범을 거부하고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추세가 강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권위라는 말 자체가 인기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권위가 없는 세상은 좋은 것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허용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밤새 게임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을 허락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라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매일 라면을 주는 부모도 없습니다.
여러분 부모는 왜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할까요?
아이들을 억압하고 괴롭히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아이가 성숙해서 스스로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숙할 수 있도록 부모의 권위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성숙할 때까지 부모의 권위에 잘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은 권위와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하신 그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아침과 저녁이 일정하고 계절의 변화가 일정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계절의 변화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름이 싫다고 해서 여름이 오지 않게 계절을 조종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과학은 변하지 않는 질서와 원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적인 논의에는 레퍼런스 포인트 기준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스페이스 x에서 만든 우주선이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중력이 일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중력이 일정하지 않으면 최첨단 항공 장비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 중에서 크리스천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절대자를 믿고 창조주를 믿겠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20세기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65%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머지 20%는 유대인이고, 그 외 종교는 15%밖에 되지 않습니다.
과학을 제대로 연구하면 우주의 정교한 질서에 압도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권성수 목사님께서 미세 조정, 파인 튜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몰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우주의 미세 조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우주론 학자들 사이에서는 우주가 생명에 대하여 미세 조정되었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주를 연구하고 생명을 연구하면 엄청나게 정교한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의 기본 상수들이 지금과 조금만 달랐다면 이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력 상수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컸다면 별이 다 불타게 되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작았다면 별이 형성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챗gpt에 가서 Fine Tuning of the Universe 라고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이 우주의 분명한 질서를 세우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의 왕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는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통치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따라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는 물리학적인 질서도 있고 영적인 질서도 있고 관계적인 질서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방식을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에 질서가 없다고 우리가 우긴다고 해서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와 이미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모르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이 유혹을 받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매우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담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이 상태를 영어로 표현하면 sinless입니다.
그런데 sinless가 성숙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가 없다는 의미이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성숙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지 성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아담이 성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의 신분과 지위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아담은 마치 자기가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마치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담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아닌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담의 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볼 때마다 아담은 기억하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당한 자유와 권한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만 이성과 의지를 주셔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처음부터 무제한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바운더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처음부터 무제한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자유에는 제한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타락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운전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다른 자동차들이 위험하게 만들면 안 되죠.
그래서 교통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교통 규칙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운전하면 모두가 다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신호 위반을 하면 벌점을 받게 되죠.
그렇게 벌점이 쌓이게 되면 일정 기간 동안 면허가 정지됩니다.
1년 동안 벌점이 121점이 넘으면 면허가 아예 취소됩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니까 운전할 수 있는 그 자유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제한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국가와 사회에 또한 교회와 가정의 법과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한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중요한 권위 가장 기초적인 권위는 바로 부모의 권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가 내게 준 땅에서 내 생명이 길리라.
아멘.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3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내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신구약 성경은 부모님에게 순종하면 이 땅에서 잘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과 이 땅에서 잘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사, 교수, 사업가, 운동 선수 할 것 없이 자기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절제, 셀프 컨트롤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욕망대로 살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잘 되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절제를 배울 수 있을까요?
나보다 더 큰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첫 번째 장소는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면 이 땅에서 잘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임신했을 때 저희 부부가 기도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 두 가지를 확실하게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말을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태어난 직후부터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 아빠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둘째로, 그런데 너는 엄마와 아빠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아이가 두 가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나를 가장 아끼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배워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큰 권위가 존재하고 나보다 더 큰 질서가 존재하므로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는 첫 번째 장소는 바로 가정입니다.
권위와 질서를 세워주신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 진리가 아름답게 나타나고 전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전자제품에는 사용자 설명서가 있습니다.
그 제품을 만든 회사가 제공하는 매뉴얼이지요.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오류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에도 매뉴얼이 있을까요?
결혼 생활에 있어서, 육아에 있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있을까요?
인생의 매뉴얼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줄 수 있을까요?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매뉴얼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인생의 매뉴얼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시편 119편 44절, 4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아멘.
우리가 주의 율법을 지킬 때에 자유롭게 걸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율법을 지키면 율법에 구속되는 것 아닙니까?
율법을 지키는데 어떻게 자유롭게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자유의 본질을 왜곡했습니다.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그런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렇게 무제한의 자유를 누려야지 행복해진다고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맞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면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자유는 행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했다면 무제한의 자유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선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 가족들을 보호하겠지만, 악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 그것으로 온갖 범죄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타락했습니까?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타락했습니다.
법과 제도로 통제해도 사회가 이 모양인데, 법과 제도가 없다면 이 사회는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 자유를 이용할 수 있는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아이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엄마 이제 잘 시간 됐죠 저 들어가서 잘게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5살이든 10살이든, 15살이든 아이들은 어떻게든 밤에 자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면 밤 12시가 지나도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다 큰 성인에게도 무제한의 자유를 주지 않으십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 자유를 사용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우리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곳으로 온갖 나쁜 일을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해로운 일들을 많이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제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참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하고 있는데 내 앞에 갑자기 차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합법적으로 욕할 자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따위로 운전을 해 이 xx야라고 욕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보다 차원이 높은 자유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해봤자 그 사람 듣지도 못합니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참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에나램키 교수는 중독의학 전문가입니다.
인간의 뇌에서 보상 과정에 관여하는 도파민을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될 때 우리는 쾌락과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도파민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땀 흘려 운동한 이후에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에서 성공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도파민은 이런 역할을 합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게 하는 동기부여를 주게 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감을 줍니다.
이것이 도파민의 긍정적인 역할인데 이 도파민은 나쁜 쪽으로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인간의 도파민 시스템 역시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동기부여는 주지 않고 오로지 보상과 쾌락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독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은 도파민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초콜릿은 뇌의 기본 도파민 생산을 55% 늘린다고 합니다.
성관계는 도파민 생산을 100% 늘리고 니코틴은 150%, 코카인은 225% 늘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초콜릿에 중독될 수도 있고 성관계에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술, 담배, 마약에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중독은 우리 뇌에서 도파민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분비하게 만드는 모든 행동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도파민을 통해서 동기부여를 얻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 좋은 보상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정당한 기쁨, 정당한 행복이지요.
그런데 중독은 동기부여는 무시하고 오로지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쾌락과 기쁨만을 느끼기 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도파민 분비를 강하게 일으키는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애나렘 키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쾌락에 중독되었습니다.
스마트폰, 쇼핑, 마시는 음식, 술과 담배, 성공과 명예 등 수많은 쾌락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도파민 시스템이 망가졌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 45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아멘.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할 때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그런 거짓 자유가 아니라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상담가 테드 트립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차는 철로 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철로를 주셨다.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은 그 철로를 마음껏 달릴 때 가장 깊은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절묘한 비유입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철로 위를 기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과 명령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렇게 함께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타락한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오늘 내 행복을 위하여 내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좋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 가지 중독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책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훈은 명제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아버지의 계명, 어머니의 법은 글로 된 딱딱한 명제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잠언 6장 22절,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내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내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오, 법은 빛이오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아멘.
하나님의 계명이 너를 인도하며 너를 보호하며 너와 더불어 말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의인화해서 마치 사람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도자, 보호자, 상담자는 모두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부모를 통해서 자녀에게 전수되는 하나님의 계명은 딱딱한 명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 부모의 모습은 자녀의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할아버지 리처드 에드워즈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뿐 아니라 즐거워하기 위해서 그분의 존전에 나아간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그 삶, 아름다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놀라운 부흥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 영어로 하면 릴리저 어펙션이라고 에드워즈가 말했는데,
그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 모습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미덕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모습입니다.
정직이 무엇인지 알려면 정직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면 사랑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그 모습을 보면 아이는 평생 그 가치를 잊지 못합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님께 배운 최고의 교훈은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저희 아버지께 정직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돈에 정직한 것, 말에 정직한 것, 행동에 정직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정직하게 사셨고, 저와 동생이 거짓말하면 혼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면 성공할까요? 성공하지 못할까요?
저희 아버지는 회사 생활에서 성공하셨을까요? 못 하셨을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증은 이런 거죠.
한국 사회에서 원래 정직하면 성공하지 못하지만 저는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성공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간증을 기대하는데 저희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미국계 컴퓨터 회사 임원으로 계셨습니다.
뭐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아주 유명한 글로벌 기업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대학과 회사, 은행에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실적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어떤 해는 최고의 실적을 내서 미국 본사에서 특별 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너무 정직하면 조직에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실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게 되셨습니다.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았는데 정작 사회에서는 큰 인정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손해인 것 같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지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정직을 보았고 그것을 저의 인격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에 선교 후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100만 원을 후원했는데 제가 정확하게 사역을 진행하고 재정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에는 500만 원을 보내주셨습니다.
똑같이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에는 천만 원, 그다음에는 2천만 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사역을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제가 선교 헌금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다 사용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번에 경북 지역 산불 피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 교회와 함께 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피해를 당한 이재민들을 섬기고 산불로 전수된 교회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으로 사역을 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연합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구 지역 몇몇 교회들에서 동참했습니다.
300만 원, 500만 원 헌금을 보내주셔서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함께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투명하게 이 사역을 진행했고 재정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분당우리교회에서 3억 원을 보내주셨습니다.
범어교회에서도 1억 원을 헌금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1억 원 헌금했습니다.
분당우리교회에서 분립 개척한 교회들이 연합해서 2억 원을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 전국 25개 교회에서 총 7억 8천만 원이 모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이 교회들은 왜 우리 교회로 구호 헌금을 보냈을까요?
총회도 있고 NGO도 있는데 왜 동신교회로 구호 헌금을 보냈을까요?
간단합니다.
우리 교회로 보내면 투명하게 정직하게 재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동신교회는 정직하다.
동신교회로 헌금 보내면 가장 필요한 곳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정직하다는 신뢰를 받을 때에 한 달 만에 7억 8천만 원을 모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저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룬디에 있었을 때도 동일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정직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했습니다.
금액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부룬디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선교 헌금을 보내주시고, 대구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구호 헌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녀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인 줄로 믿습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간 모습은 자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더라도 제 마음에는 아버지의 정직한 모습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정직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저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직접 보았던 저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모습대로 살고자 노력했더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 있었는지 저는 간증할 것입니다.
여러분 미덕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진정한 미덕은 살아있는 모습, 인격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에게 맡겨진 중요한 책임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그 모습을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이들은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어떠한 모습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자녀 안에 남아 있기 원하는 여러분의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주는 거 좋은 일이죠.
우리 자녀에게 집 사주는 게 뭐 큰 문제입니까?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유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유산입니다.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모가 말씀대로 살아가면 자녀는 그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아버지의 계명, 어머니의 법이 우리 아이에게 인도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잠언 1장 8절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내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요, 내 목에 금 사슬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권위와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중요한 권위는 부모의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책임 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신실한 모습을 본 자녀들이 시간이 오래 흘러도 그 모습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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