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2007년부터 우리나라 법정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부부의 날을 왜 21일로 정했는지 제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한몸이 된다라는 의미로 21일로 했다고 합니다.
아주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성경은 부부가 한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멘.
남편과 아내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입니다.
그러니까 배우자를 바라볼 때 나와 다른 인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배우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영광도 함께 받고 고통도 함께 받습니다.
인생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서로 위로하고 붙잡아주는 관계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홀로 있어서 붙잡아줄 사람이 없으면 화가 임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사람이 바로 배우자입니다.
영원히 내 편이 되어주는 그 사람이 있는 것은 인생의 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요즘 TV를 보면 결혼 생활이 얼마나 불행한지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 거면 빨리 이혼하라고 마치 조장하는 듯한 분위기이죠.
저는 이런 프로그램을 왜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부분은 보여주지 않고 극단적으로 불행한 부분만 보여주면서 이것이 결혼 생활의 현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실제 현실에 부합하지도 않고 결혼을 꿈꾸며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의도가 있다면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내 결혼 생활이 불행하니까 다른 사람도 불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면 나는 결혼 안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이 불행한 모습을 보고 결혼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드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부부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엄청나게 이기적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결혼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결혼은 나와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자라온 배경과 성장 과정, 성향, 취미, 많은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맞추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나도 안 변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사에서 이기적인 사람 만나면 피곤한데 이기적인 사람하고 함께 사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겠다 하는 결정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포기하고 서로서로 맞추겠다는 결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도 안 변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맞추기를 원한다면 그런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행복하지 않은 부부는 서로에게 함부로 대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을 함부로 합니다.
인격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욕설을 하기도 합니다.
부부는 한 몸인데 배우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마치 내 몸을 함부로 대하고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는데 아무도 내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 바로 배우자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타락한 이 세상은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면서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부부 간에 필요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추상적인 개념, 철학적인 개념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증거하는 사랑은 어떤 상태나 감정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랑은 무엇, 무엇을 한다,
사랑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와 같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15개의 헬라어는 다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동사 원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한 번만 하는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하는 꾸준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agape)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을 헬라어로 우리가 아가페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가페라는 단어 들어보셨죠?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서의 아가페의 개념은 '없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아가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이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아가페 안에 그러한 개념을 갖게 한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겸손이 미덕이 아니었던 것과 똑같습니다.
겸손을 뜻하는 헬라어 '타페이노스'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나약한 노예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단 한 번도 '겸손을 미덕'으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겸손을 미덕으로 처음 소개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셀프 기빙 러브로서의 아가페의 개념을 처음으로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돈보다 명예보다, 성공보다 상대방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공을 위해서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과 존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거 절대로 사랑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인격적인 존중이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합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정중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과 존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절대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외모, 학벌, 직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보면 식당에 가서 종업원들에게 함부로 반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님이 왕이라고 생각하면서 종업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외모, 학벌, 직업,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들에게 반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자들에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만 19세가 넘은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존댓말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을 편하게 하면 행동해서 실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아주 정중한 사람, 뭐 젠틀맨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봐도 정말로 정중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저런 행동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고난 천성이 정중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부룬디에 있을 때 제 아내는 국제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말이 국제 학교지 학생의 90% 이상이 아프리카 아이들이었습니다.
5%는 아시아에서 오고 5%는 이제 유럽에서 왔습니다.
그중에 벨기에에서 온 중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주 정중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학교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 학생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올라가고 있고, 학생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 학생이 선생님을 보자마자 옆으로 비켜서서 이렇게 손으로 after you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중학교 1학년 남자가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옆으로 비켜서서 after you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타고난 행동일까요? 학습된 행동일까요?
당연히 학습된 행동입니다.
우리가 매너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학습된 행동입니다.
오늘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양보하는 것, 식사할 때 소리 내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학습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매너를 타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선생님께 배웠고 부모님께 배웠습니다.
매너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5절에 나온 것처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너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내가 편하고 내가 좋은 것보다 다른 사람이 편하고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모든 직업이 필요하고 모든 직업은 다 소중합니다.
귀한 직업, 천한 직업 이런 것 없습니다.
그런데 매너에는 귀천이 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매너에는 귀천이 있습니다.
귀한 매너 좋은 매너가 있는가 하면 천한 매너, 나쁜 매너도 있습니다.
저는 절대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너로는 사람을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는 아무도 없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결정하는 것 역시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진국을 결정할 때 단순히 소득 수준을 가지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원이 많아서 소득이 높은 국가를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동의 카타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7만 달러가 넘습니다.
우리나라의 2배가 넘죠.
하지만 우리가 카타르를 선진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선진국은 뛰어난 질서 의식과 시민 의식 매너를 가진 나라입니다.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국가가 선진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친일도 아니고 반일도 아닙니다.
일본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일본 사람들의 공공 의식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일본에 가면 도로가 깨끗합니다.
길거리에 휴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 주차된 차량이 없습니다.
한국은 골목마다 불법 주차된 차가 많은데 일본에는 그런 차가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불법 주차를 해서 오가는 차량에게 피해를 주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배 전에 영상 광고 보신 것처럼 우리 교회 주차장이 부족하다 보니까 교회 근처에 이제 불법 주차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교회 근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불법 주차를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히 사랑이 아니지요.
정해진 구역에만 주차 구역에만 주차를 하시고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불편한 일입니다.
그래도 내가 조금 불편해서 교회 근처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을 기억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한 인격적인 존중과 존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우리가 가장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대상은 바로 가족입니다.
그중에서도 배우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를 얼마나 존중하십니까?
배우자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십니까?
사랑의 시작은 상대방을 향한 관심입니다.
상대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와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관심이고 관심의 표현은 대화입니다.
배우자를 얼마나 우리가 존중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우리가 얼마나 예의를 갖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자의 말을 얼마나 집중해서 잘 경청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됩니다.
예의는 경청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아멘.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기혼자분들께 질문하겠습니다.
예전에 여러분의 배우자와 연애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오래전이어서 잘 생각나지 않아도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누구나 연애를 처음 시작할 때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합니다.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전화 통화를 엄청 길게 합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내 기분은 어땠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때 그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미국에서 264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부부 관계에서 행복을 주는 것 1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이 아니라 친밀한 의사소통이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대화가 많을 때 그 부부는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부 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그 부부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텍사스 대학의 테 이스턴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친밀감은 관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에게는 아주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들은 5분이면 할 만한 이야기를 여자들은 1시간 동안 할 수 있습니다.
1시간 동안 이야기하면서 과연 여성들은 무엇을 기대할까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해결책을 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와 공감을 원합니다.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거기에 공감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에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를 빨리 파악해서 그것을 빨리 해결해 주고자 노력합니다.
나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은 도와달라는 의미니까 내가 빨리 해결해 줄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성은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내가 느끼는 그 감정에 공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남편이 공감해 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공감해 주지는 않고 자꾸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더 커질 뿐입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고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고 그냥 배우자의 말을 집중해서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상담학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액티브 리스닝이라고 말합니다.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적극적으로 공감을 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제 여성은 남성보다 언어적 비언어적 감정 신호를 잘 해독한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훨씬 더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여성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남성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듣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말을 잘 듣고 있는 건지 건성으로 듣고 있는 건지, 깜짝 놀랄 때가 있지만 여자들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아내의 말에 집중해서 듣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그것이 곧 예의의 표현입니다.
또한 배우자에게 말할 때는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상담가 존 그레이 박사는 남성과 여성이 추구하는 사랑이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남성이 원하는 것은 신뢰, 인정, 감사, 찬성, 격려입니다.
반면에 여성이 원하는 것은 관심, 이해, 존중, 헌신, 공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성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을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이해받기를 원합니다.
나를 비판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공감해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말할 때는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나 중심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 태도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마음에 다가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멘.
세상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서도 이기적으로 접근합니다.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할까 그것을 고민합니다.
이것 역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나를 더 배려해 주고, 나를 더 섬겨주고, 나를 더 행복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으면 그만큼 갈등도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결혼하고 생활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포기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인 것임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서로 서로 배려하고 섬긴다면 그 부부는 행복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결혼 생활에 만족스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배우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행복해지려고 결혼했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결혼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존 메가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로 맞는 말이고 동시에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아내를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아내와의 관계, 아내와의 대화를 하찮게 여긴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배우자를 얼마나 어디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얼마나 존경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존경하는 만큼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대하는 그 태도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배우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부 간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아내가 아침을 차려주면 고맙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이 월급을 가져오면 고맙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꼭 말로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마음으로 통하는 것 아닙니까? 몇십 년을 살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안 하시면서 그냥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아멘.
자기 자녀를 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섬김과 호의를 절대로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부 사이에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말이 있다면 바로 고맙다는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를 키울 때 '땡큐'라는 말을 얼마나 가르치는지 모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받을 때에도 '땡큐'라고 말하라고 가르치고, 누가 문을 붙잡아줘도 '땡큐'라고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나에게 작은 친절을 베푸는 모든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라고 부모는 가르칩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아시아 문화에서는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시아 학생이 미국으로 처음 유학을 가서 첫 번째 추수 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아주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이 학생을 초청해서 함께 추수 감사절 만찬을 했습니다.
풍성한 식탁을 차려놓고 미국 가족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감사한 것 한 가지씩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부터 시작해서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까지 하나씩 감사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따뜻한 집이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건강하게 지낼 수 있어서 감사했고,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한 가지씩 감사한 것을 이야기할 때 이 학생은 이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호주의 작가 매트 켈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많이 불평할까 바로 가장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누구에 대해서 가장 많이 불평할까?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불평은 우리 관계에 독이 된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존중하고 가장 예의를 갖춰야 하는 대상은 배우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배우자에게 가장 많이 불평하고 가장 함부로 대합니다.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죠.
가장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도 예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장 말 조심해야 하는 대상은 직장 상사가 아닙니다.
교회 목사님이 아닙니다.
가장 말 조심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배우자입니다.
배우자는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작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이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집에 왔다고 편하게 아무 말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 가장 아름다운 말, 가장 선한 말을 배우자에게 해야 합니다.
최근에 이혼 전문 변호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이혼 부부를 상담하고 자문했던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모가 예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말을 예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세요' 라고 조언했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죠.
자녀 양육 문제, 경제적인 문제, 시댁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잘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문제를 만나고 잘못을 접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하면 될까요?
같은 편이 되어야 하는 부부가 서로 싸우고 있다면 누가 좋은 것일까요?
진정한 사랑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서로를 품어주는 것이 부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잘잘못을 따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잘잘못 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품어주고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멘.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실수하고 누구나 잘못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 만나면 적대감이 생기지, 나도 나중에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반면에 내 잘못을 덮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큰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그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한 명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배우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부 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는 대화해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 부부 관계는 더욱더 견고해집니다.
어떤 부분은 진지한 대화를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벼운 주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대화를 잘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진지한 대화가 나오면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벼운 대화밖에 할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아주 연약한 것입니다.
진짜 대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지 견고한 대화 관계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진짜 관계입니다.
부부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진지한 대화는 하나님에 대한 대화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서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최근에 읽었던 말씀이나 책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서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에 두 사람의 관계가 훨씬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한 인격적인 존중과 존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예의 있게 대해야 하는 사람, 우리는 바로 우리의 가족, 특별히 우리의 배우자입니다.
예의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예의는 상대방의 호의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의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부부의 날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서 결혼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 세대 가운데 아름다운 모델이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6jWCvsuG7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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