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5월 25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5. 27. 10:28

세계관 이야기 (1) 의미가 필요한 존재
사도행전 17:24-31 | 문대원 목사

 

 


오늘부터 세계관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무엇이며 세상은 무엇인지, 세상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세계관 영어로 World View 라고 부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제임스 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관이란 삶에 대한 가장 고귀한 원칙과 관점을 규정하는 하나의 질서 잡힌 총체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단편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이 세상 전체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세상 만물은 개별적으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게 존재합니다.
그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생각의 기초가 됩니다.
건축으로 비유하자면 세계관은 건물의 기초와 같습니다.
우리가 건축할 때 바로 건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합니다.
큰 건물일수록 기초 공사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지 제대로 된 건물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가 뭐 1년 2년 일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인생을 쌓아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모든 기초가 바로 세계관입니다.
다음에 도표를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원은 행동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가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치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신념에 의해 결정됩니다. 

신념은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세계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계관은 무엇이 궁극적인 실제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도표에서 중심에 있는 것이 그 바깥에 있는 것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신념을 결정하고 신념이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가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내 안에 완벽하게 밀테인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안경을 쓴 사람은 그 안경이 자연스러워서 마치 몸의 일부와 같이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자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장 동료와 이웃과 정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싶은 경우가 있겠죠.
그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과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은 신념을 결정하고 신념은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행동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 변화될 때 그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아테네 설교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에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것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성경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를 꼼꼼히 생각해 보고 논리적으로 성찰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하나씩 하나씩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 변증, 영어로 Apologetics 라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는 CS 루이스였고, 21세기에 있는 팀 켈러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변증가이셨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매우 변증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설교를 시작하지 않고 온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아멘.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유행했던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잘 훈련하면 신적인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성찰과 금욕을 통해서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그 원리를 알기 원했습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진리, 그 원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것은 비인격적인 원리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선포함으로써 바울은 인생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논할 수 있게 됩니다.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기는 중요한 질문을 한 가지 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인간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삶을 설명해 주는 참된 이야기는 무엇일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속한 거대한 이야기, 철학적인 용어로 메타네러티브(Metanarrative) 라고 합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사건이 속한 큰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비가 온다라는 것만으로는 그 사건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소풍날 비가 온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겠죠.
하지만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에 비가 온다면 그것은 기쁜 일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없었던 이스라엘의 비가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건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 속한 큰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에 속한 그 거대한 이야기를 알아야지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지 종교 의식과 어떤 율법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전체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 Metanarrative 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만물이 창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만물이 새롭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게 됩니다.
그 중간에는 우주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는 이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여러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동물 중에 하나로 여깁니다.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으니까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창조론자들은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능력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 의식이 있고요. 또한 언어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인간과 같은 도덕 의식과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동물은 본능을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냥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것이 동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본능대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동물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냥 맛있는 간식 주면 좋아할 뿐이지요. 

오직 인간만이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고민이 많이 있습니다. 

100가지가 행복해도 한 가지 고민이 있으면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 있으시죠?

돈도 많고 자식도 잘 되고 모든 것이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런 걸로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그 고민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매우 복잡하고 고민이 많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물은 전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고민하는 동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소년들 중에서 왜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내가 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그런 고민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다그치겠습니까?
아니면 직업별 연봉표를 보여주면서 좋은 대학 나오면 얼마나 월급이 높은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겠습니까?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누구나 방황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없으면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중년의 나이에 방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고민과 방황은 10대에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이 속한 그 거대한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에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도 이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에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이 모두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향한 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온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실체는 인격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우주의 존재의 목적인 줄로 믿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한 바울은 이제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는데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선포합니다.
본문 2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from one man)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기를 한정하셨으니 

 

아멘, 한글 성경에는 한 혈통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from one ma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류는 한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한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인류의 조상이 한 사람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동일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동등한 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6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분리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흑인이 백인용 좌석에 갈 수 없었고, 흑인이 백인용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훨씬 더 심했습니다. 

남아공에서는 1994년까지 흑인과 백인이 분리된 공간에 있었습니다.
극장, 버스,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흑인 좌석과 백인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종적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했던 것은 2천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 2천 년 전에 그리스 사람들은 이방 민족을 야만인, 바바리안(barbarian)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 철학, 문학,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이 좋아서 야만인이지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동물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방 민족을 깔보는 그리스인들에게 바울은 온 인류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철학과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동일한 조상에서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며 모든 사람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 이외에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왜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까?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을 왜 함부로 억압하면 안 됩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선포합니다.
26절에 보니까 '온 땅에 살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온 땅에 살게 하셨다라는 말은요. 온 땅에 충만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온 땅에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형상은 왕의 통치권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왕의 형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땅을 왕이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온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온 땅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음을 나타내기 원하셨다 하는 의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 일을 행하기 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온 우주에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아니면 피조물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주 아니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간은 피조물이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대리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의 역할과 본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인간이 신의 위치에 올라가서 내 마음대로 결정하라는 건 큰 잘못이죠.
반대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인간을 동물 중에 하나로 보는 것도 문제이고, 인간을 어떤 수단으로 삼는 것도 문제입니다.
온 우주에서 인간은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분의 뜻대로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우주의 왕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확한 위치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되 왕 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연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눈으로 자연과 역사를 바라보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연은 스스로를 뽐내지 않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스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성이 얼마나 놀라운지 자연 가운데 나타납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아멘.

자연을 보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북 지역 산불이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산불 직후에 제가 현장을 방문했는데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습니다.
정말 까맣게 타버린 산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잿더미가 된 그 산에서 새싹이 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진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자연이 다 파괴되었는데 자연은 망가진 상태 그대로 있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생명력으로 자연은 다시 회복되고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자연 스스로 이러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은 욕심과 이기심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십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된 곳에서도 새싹이 다시 나게 하십니다.
햇빛과 비를 내리셔서 자연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자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민족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아멘.

이것은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모든 국가들마다 시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 조선시대, 일제 시대 이렇게 나눌 수 있겠죠.
그러면 언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까요?
내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겠다 하면 시작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무엇이 새로운 시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역사의 방향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역사의 방향은 무작위가 아닙니다.

역사는 그냥 흘러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역사에는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당대에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이 사건에 어떠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는지 깨닫게 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17세기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영국 왕실 주도로 있는 성공회 교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성공회 교회의 수장은 왕이었습니다. 

원래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어야 하는데, 왕이 수장이니까 교회가 왕실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대한 청교도들이 이제 개혁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성공 후의 교회는 충분히 개혁적이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기준대로 더 확실하게 더 순결하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의회파를 이끌던 올리버 크로멜이 사망하자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공의 교회가 영국의 국교로 복권되었고 그때부터 청교도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사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기준대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이 왜 실패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더 큰 이야기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 가치에 근거한 국가를 설립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여러분 미국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주 신기한 나라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동일한 인종, 동일한 문화, 동일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한족, 한국에는 한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습니다.


여러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회사를 세우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죠. 존재하지 않았던 교회를 세우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핵심 가치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핵심 가치는 독립 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라고 시작됩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은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에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는지 말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속한 거대한 이야기 메타네러티브(Metanarrative) 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운동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 사건의 의미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서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 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세계 선교를 위해서 가장 놀라운 기여를 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인 줄로 믿습니다.
자연과 섭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대에는 다 알 수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과 역사는 그냥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에 따라서 운행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자연에도 나타나고 역사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과 역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제테오인데 구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난 부활 주일에 제가 위에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위에 것을 찾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에 것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역사의 중심에 계신 그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역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경북 지역 산불 피해를 당한 교회들을 방문해서 섬기고 왔습니다.
우리 장로님들과 목회자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중에 영덕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화천 교회라는 교회였는데 1903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농촌 교회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멋지게 리모델링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농촌 교회 중에 led 스크린이 있는 교회 본 적 있으십니까?
너무 좋은 음향 기기와 너무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어르신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편하시도록 자동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교회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서 3년 동안 헌금을 모아서 온 힘을 다해서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올 3월에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주일 예배를 두 번 드렸는데 그만 산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3년 동안 우리가 리모델링한 교회가 불에 탈까 봐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목사님의 사택이 있고 그 옆에는 장로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우측에는 공장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사택, 장로님 댁 모두 다 전소되었습니다.
공장도 전소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멀쩡했습니다.
교회 좌측 교회 우측에 있는 모든 건물이 다 불에 타서 전소되었는데 교회만 멀쩡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교회만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목사님과 장로님을 만나고 왔는데요. 그분들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정작 본인들 집은 다 불에 탔는데 교회는 멀쩡해서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믿음에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집이 전소되었지만 교회가 멀쩡한 곳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장로님께서 분당 우리 교회 이찬수 목사님을 정말로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매주 이찬수 목사님 설교를 들으시는 분이었고, 꿈너머 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이번에 경상 지역 꿈너머 꿈 프로젝트 했는데 신청하려고 하다가 더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양보하셨다고 합니다.
이번에 산불로 피해를 당해서 한국 기독교 연합봉사단의 이름으로 산불 피해 구호금을 저희가 전달했는데 분당 우리 교회에서 큰 도움을 주셨다고 하니까 크게 이제 감격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교회에 이제 사택과 교육관을 다시 지어야 하기 때문에 전달해 드린 구호금이 1억 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꿈너무 꿈 프로젝트에 선정된 교회가 받는 금액이 1억 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다른 교회를 위해서 꿈너머 꿈 프로젝트 양보했는데 정확하게 그 선정된 교회가 받는 금액을 받게 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기뻐하시고 지키신다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산불이 났다 하는 것은 사건이죠.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더 큰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사건이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덕에 있는 화천 교회에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이야기였습니다.
목사님의 사택과 장로님 댁은 다 전소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경험한 이야기였습니다.
산불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사랑과 후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놀라운 간증이었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무엇이며 세상은 어떤 곳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세상 전체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기원과 목적, 인류의 기원과 목적을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kUyx0ImnB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