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4월 13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4. 20. 22:49

 

 

모든 사람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실패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그냥 안 좋은 기억 정도로 간직합니다.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최대한 숨기려고 할 뿐입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실패, 기본적 실패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과거의 실패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미 있는 실패, 교훈적 실패입니다. 

똑같은 경험, 똑같은 실패를 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실패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우리가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편도체라고 합니다.
위험이 되는 대상이 다가올 때 우리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서 그것을 피하게 합니다.
무서운 것이 다가올 때 도망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편도체의 손상이 생기면 위험한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 서 있을 때 공원으로 피크닉을 간 적이 있습니다.
피크닉을 마치고 이제 차에 타려고 왔는데 저 멀리서 큰 개가 달려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서워서 얼른 차에 타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이 났습니다. 

제 아내도 밖에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 아내가 깜짝 놀라서 다른 문을 열고 이 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한마디 했죠. 

남편이 돼 가지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어떻게 자기만 도망갈 수 있냐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것이 다가올 때 도망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면 실패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직장 상사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으면 그냥 도망가고 싶을 뿐이죠.
그 순간에 무엇을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뇌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패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심리적 안정감은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사랑받고 용납받는다는 확신입니다.
실패한다고 해서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어야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지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실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큰 적은 바로 자신이다 모든 실패를 피하려는 자신의 왜곡되고 비현실적인 기대가 적이다.
옳은 실패는 자기 인식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실패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인식;입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객관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주장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생각하고 성찰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정확한 자기 인식은 이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총독 베스도와 아그리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변증하고 있습니다.
자서전적인 방식으로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법정에서 자주 사용되던 변증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적당히 믿은 것이 아니라 특별한 열심으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기준으로는 흠이 없었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6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바울은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찬성 투표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안에서만 박해를 한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다른 나라에 가서도 박해를 했습니다.
그다음 절 1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바울의 열심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모릅니다.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원정 박해를 간 거죠.
최근 프로야구 인기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동대구역에 갔는데 타 지역에서 원정 응원 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삼성이 아니라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무리를 만났습니다.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면 원정 경기를 따라다니면서 응원하는 것입니다.
미국에도 메이저리그 원정 패키지가 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LA로 원정을 간다 하면 LA 지역의 호텔과 티켓을 함께 판매합니다.
그러면 주로 이제 은퇴하신 분들이 원정 패키지를 구매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원정 응원을 다닐 만하다고 합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타 지역으로 원정 응원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원정 응원을 간 것이 아니라 원정 박해를 갔습니다.
예루살렘 안에서만 박해를 한 것이 아니라 멀리 외국까지 가서 박해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서 그 증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언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 것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열정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정의 방향입니다. 

올바른 목적을 향해서 열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이 있죠.
하지만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찰하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십니까?
혹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유명한 장교가 있었습니다.
매우 유능하고 열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병으로 입대해서 중령까지 진급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병이 장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하물며 중년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맡겨진 그 임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수행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전쟁에 필요한 철도 시스템을 개발해서 사람들을 운송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데 그가 운송하게 될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럽 전역에 있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운송하는 그 일을 했습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가가 명령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지 않았던 일이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그 일이 올바른 일인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열정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았을 때 아주 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그 재판 과정을 다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녀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머리에 뿔 달린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명령에 복종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0년도에 체포되어서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바리새인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3절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영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여러분 우리가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식이 없는 확신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무지한 자가 지나친 확신을 가지면 위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지식,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에 대한 잘못된 상식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접하는 정보 중에서 의사들이 권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원푸드 다이어트가 있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한 달에 10kg 뺄 수 있다.
여러분 이런 제목의 영상을 우리가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을까요?
토마토, 바나나 같이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에너지 섭취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에너지가 급속도로 줄어서 빠르게 살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체중 감량에는 성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급격한 체중 감소와 함께 근육도 감소했기 때문에 기초 대사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식사량을 조금만 늘려도 다시 쉽게 살이 찐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원푸드 다이어트를 하면 모르겠지만 원래 식단으로 돌아오는 순간 금방 다시 살이 찝니다.
뿐만 아니라 영양적으로도 한 가지 음식만 먹는 것은 권할 일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의학을 연구하는 의사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 비전문가들이 추천한다고 따라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식이 없는 열심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얼마든지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미성숙한 사람이고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 과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 6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의 덕을, 덕의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의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의 형제 우애를 형제 의외의 사랑을 더하라.

 

아멘.

이 말씀은 이제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이 시간 관계상 모두 다 설명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련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 과정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덕을 쌓아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보면 판단하지 말고 뭐라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행할 수 있는 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좋은데 지식이 없으면 큰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지식을 쌓았으면 또 필요한 태도가 있죠. 

바로 절제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자랑하고 떠벌리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덕을, 덕의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더하라는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열정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정의 방향입니다.
잘못된 일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오에 갑자기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빛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울만 예수님을 보고, 바울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려짐에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체를 뒷발질하기가 내게 고생이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히브리 말로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하면 사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히브리식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두 번 부르셨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친밀한 관계의 표시입니다.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이름을 부를 때 두 번 부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모세야 모세야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에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그 사람을 따뜻한 사랑의 음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나를 박해하느냐 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너에게 고생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시채란 가시 돋친 채찍을 뜻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몰 때에 가시 돋힌 채찍을 사용했습니다.
주인이 가시를 툭툭 치면서 소가 가야 될 방향을 인도한 것입니다.
대부분에서는 그 가시가 따가우니까 주인의 말을 잘 듣겠죠.
그런데 가끔 고집스러운 손은 뒷발로 가시채를 찼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시 돋친 채찍을 뒷발로 차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만 아프겠죠. 

주인의 뜻대로 가면 아플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집을 부려서 가시채를 뒷발로 차면 자기만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바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소가 가시채를 찾는 것과 똑같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너만 아프고 너만 고생이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시채를 뒷발로 차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쪽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정반대로 이제 가려고 하는 거죠.
이것은 마치 파도를 거슬러서 수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파도가 이렇게 임하고 있는데 파도를 거슬러서 수용하면 어떨까요?
그 반대 방향으로 혹시 수영해 보셨습니까? 

제 친구 중에서 수영을 아주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바다로 같이 놀러 갔다가 한 친구가 바다에 튜브를 빠뜨렸습니다.
자기 튜브가 아니라 대여한 것이기 때문에 건져와야 했습니다.
수영 잘하는 친구가 자기가 가서 가져오겠다고 했습니다.
워낙 수영을 잘하니까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마침 밀물이 들어올 때였습니다. 

파도가 강하게 밀려오는데 거기에 맞서서 수영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수영을 해서 가도 파도에 밀려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파도를 거슬러서 수영하는 게 정말로 어려운 일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방향이 있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정말로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나만 더 고생입니다. 

가시채를 뒷발로 차면 나만 아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서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서만 박해할 뿐만 아니라 멀리 타국에 가서도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면 너에게만 고생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열정을 가졌던 그 일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너만 더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실패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평생을 들어서 정말 모든 열정을 다해서 한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워낙 고집이 강하니까 웬만한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아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시체를 뒷발질하지 않고 주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밀고 가는 겁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확신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끝까지 가는 겁니다.
나의 소신과 철학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가 인정했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지만 바울은 자신의 잘못과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아멘.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정말로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냥 평범한 유대인의 고백이 아닙니다.
율법과 성경에 정통했던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의 제자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실패를 마주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출신 배경, 학벌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그동안의 경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실 때에 바울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바울의 인생에는 변화가 가능했습니다.

 

바울의 원래 계획에 따르면 여러분 이 사건은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다메섹에 가서 교회를 박해하는 일인데 그 일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의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향한 예수님의 뜻과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열정은 동일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나 예수님을 만나기 이후나 그의 열정은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열정의 방향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을 위해서 그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그의 모든 열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정확하게 자기 인식을 할 때 바울은 진정한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의 변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기독교 역사가 변화되었고 세계 역사가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인생의 변화와 역사의 변화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실패를 인정했을 때 그에게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자비롭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한 번 잘못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그런 분 아닙니다.
원 스트레이크 아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내가 내게 나타난 것은 곧 내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내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일어나서 너의 발로 서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 말씀이 나옵니다.
에스겔서 2장 2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하나님의 영이 임하사 

 

에스겔을 일으켜서 발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를 세우는 모습입니다.
이와 동일한 모습으로 바울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도로 세웠으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라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서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바울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공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재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받아서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기회는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기회, 영적인 기회는 누군가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임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징벌과 수치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미국 대중음악 에이전트로 일했던 월리 아모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전설적인 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에이전트였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가수와 계약하기 위해서 초콜릿 쿠키를 만들어서 보내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든 그 쿠키가 너무 맛있어서 가수들이 이거 하지 말고 에이전트 하지 말고 쿠키 사업을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에이전트를 그만두고 고급 쿠키 전문 사업을 했습니다.
Famous Amos라는 쿠키점을 시작했는데 1975년에 2만 5천 달러로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쿠키에 열광했습니다. 

창업한 지 2년 만에 1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7년 후에는 12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7년 만에 회사의 규모가 480배 커졌습니다.
1986년 아모스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기업인 상을 받았습니다.
미국 전역에 페이머스 아모스 매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대규모 사업을 이끌 만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사업이 확장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통 문제와 재정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회사 자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가 설립한 회사를 매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힘든 실패의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설립한 회사 미국 전역에 매장을 가진 그 회사를 매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실패 안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제과기술을 살려서 작은 머핀 회사를 차렸습니다.
자신에게는 경영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유통 문제와 재정 문제를 도와줄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과영업을 위해서 꾸준하게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페이머스 아모스를 인수한 기업의 경영진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판매 부진에 대한 대안으로 아모스를 홍보 책임자로 영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설립한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는데 다시 영입 제안이 왔습니다.
그런데 CEO로 가는 게 아니라 홍보 책임자로 가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거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이름이 남아 있는 그 회사로 돌아가서 그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 회사로 돌아갔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그 결과 페이머스 아모스는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고, 아모스는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마케팅에 대한 강의 동기부여를 하는 강사로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일은 그가 가장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실패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해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이룩한 성취를 자랑하는 '성과프레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명문대학을 나왔다, 내가 과거에 이런 일을 했다.
자신의 성취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성과프레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습 프레임'입니다.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습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순간에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계획대로 잘 되고 성공한 순간에도 배울 수 있고, 계획대로 잘 안 되고 실패한 순간에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성과 프레임으로 볼 수도 있고, 학습 프레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성과 프레임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바울이 원래 계획했던 그 일을 전혀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학습 프레임으로 본다면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고 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패로부터 배울 수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납 안에서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bX3oH0KcP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