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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3-3 사회도덕

by 마이코 2024. 7. 17.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기독교의 도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황금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은 모든 사람이 속으로 늘 옳다고 생각해 온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도덕 선생들은 새로운 도덕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가짜와 괴짜들이나 새것을 소개하는 법입니다.

존슨 (Samuel Johnson) 박사 말처럼 "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모든 도덕적 스승들의 진정한 임무는, 우리가 자꾸 외면하고 싶어하는 단순한 옛 원칙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말을 넘기 싫어하는 담장 앞으로 자꾸 끌어가고 또 끌어가듯이,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부분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보게 하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 밝힐 것은, 기독교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특정 시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 프로그램이 없으며, 또 그런 것이 있노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서, 한 시대나 한 공간에 맞는 특정 프로그램은 다른 시대나 다른 장소에는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뿐 그 조리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할 뿐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고사하고 우리말 문법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정규적인 예술과 학문의 자리를 대신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과 학문이 기독교의 뜻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에 새로운 생명을 공급하는 에너지의 원천이자 그 모든 것에 올바른 임무를 부여하는 관리자가 되어 줍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고들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말했느냐에 따라 옳은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 되려면 그들이 말하는 바 '교회'는 곧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이끈다'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인들-경제나 정치에 적합한 재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경제학자나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학자와 정치가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들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들이 그런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빠른 시간안에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낼 기독교적 해결책을 찾게 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교회에게 세상을 이끌라는 것은 대부분, 목회자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목회자는 ' 인간은 앞으로 영원히 살 피조물'이라고 볼 때 필요한 일들을 돌보기 위해 전체 교회 가운데 따로 구별되어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라는 것은, 전혀 훈련받지 못한 생판 다른 영역의 일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가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나 교육분야에 기독교적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노동조합원과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며, 기독교 문학은 그리스도인 소설가와 극작가가 해야 할 일- 주교들에게 남는 시간에 모여 희곡이나 소설을 써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입니다.

신약성경은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의 모습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분명한 단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단서만 보아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의 내용을 알 수 있지요.

우선 성경은 그 사회에 놀고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하며, 더 나아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회에서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그런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더 분별없는 광고는 더구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회에는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하거나 으스대는 일이 없을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 사회는 요즘 말로 '좌파'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는 언제나 순종 - 우리 모두가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 (그리고 존경심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은 상당히 인기 없는 발언일 테지만)- 을 강조합니다.

셋째로 이 사회는 유쾌한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노래와 즐거움이 가득 찬 곳으로서 걱정이나 근심을 악한 일로 여깁니다.

정중함은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약성경은 '참견쟁이들'을 싫어합니다.

만일 그런 사회가 정말 있어서 여러분이나 제가 찾아갈 수 있다면, 아주 기이한 인상을 받고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의 경제생활이 아주 사회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가정생활과 예의범절은 오히려 구식이라고- 심지어 형식 중심적이며 귀족적이라고-느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각자 있어도, 그 사회 전체를 좋아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이라는 기계의 전체 설계도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설계도에서 이탈했고, 원래 설계도를 변경한 자신의 설계도야말로 진짜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에는 이런 반응이 거듭 나타날 것입니다.

즉 누구나 거기에서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만, 오직 그 부분만을 골라낸 후 나머지는 버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제가끔 자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의 이방인이었던 그리스인과 구약시대의 유대인,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로서, 현재 우리의 경제 제도가 완벽하게 거스르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가르친 그 교훈이란 바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른바 투자-은 우리 전체 경제 제도의 근간입니다.

물론 우리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세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자 (당시 용어로는 '고리대금') 받는 것을 금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식회사를 예견하지 못한 채 그저 개인적인 고리대금업자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제가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제학자가 아닌 저로서는 현 상태의 책임이 투자 제도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세 문명이 현대 생활의 토대를 이루는 바로 그 부분을 한결같이 비난했다는 점

(일견 그렇게 보인다는 점) 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군요.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빈궁 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를 그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자선 (charity)-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일- 은 기독교 도덕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양과 염소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유를 보면 마치 자선이 모든 것을 판가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에 어떤 이들은 자선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그런 가난한 자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기독교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는지에 일괄적으로 정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안전한 기준은 우리가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수입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안락한 생활과 사치품과 오락 등에 지출하는 만큼 우리도 그런 일에 돈을 지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양이 너무 적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선에 쓰는 비용 때문에 가계가 빠듯해지거나 제한 받는 일이 전혀 없다면 너무 적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고 싶지만 자선에 돈을 쓰느라 못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선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친척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회사 직원들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책임 아래 두신 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도우려면 여러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 - 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 유혹이 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부심이 자선의 방해꾼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겉으로 후하게 보이는 일 (팁을 주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 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정작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이 장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추측해 볼까 합니다.

아마 좌파 진영의 독자들은 이 내용이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하다며 몹시 화를 낼 것이고, 반대편 진영의 독자들은 외려 너무 그쪽으로 치우쳤다며 화를 낼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 그리기를 방해하는 진짜 암초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정말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입장을 지지해 줄 내용을 기독교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일 뿐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 - 또는 심판자- 을 만나야 할 곳에서 "내 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에는 저 역시 빼 버리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며,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결국 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회는 우리 대다수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에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제 우리는 좀 더 내면적인 문제로 - 사회적인 문제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 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리 집에 가는 법입니다.

 

https://youtu.be/WqQkI96II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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