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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2-5 실제적인 결론

by 마이코 2024. 7. 8.

 

실제적인 결론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복종했고 완전하게 낮아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고, 인간이었기 때문에 복종하며 낮아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낮아짐과 고난을 나눌 때 죽음을 정복한 그의 승리 또한 나눌 수 있으며, 죽은 후에 새 생명을 찾아 그 안에서 완전한 피조물이 된다는 것, 완전히 행복한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다음 단계의 진화 - 인간보다 더 나은 단계의 진화가 일어날 것인지를 궁금해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다음 단계의 진화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에게서 비롯된 이 새로운 종류의 생명은 오늘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자, 우리가 평범한 옛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서, 즉 우리 부모와 조상에게서 우리의 동의 없이 - 쾌락과 고통과 위험이 수반된 아주 기이한 과정을 거쳐 얻은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렸을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나는지 이리저리 추측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실상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선뜻 믿지 못하는 아이들도 가끔 있는데, 그 과정이 워낙 기이하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과정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이 새로운 종류의 생명-그리스도의 생명을 어떻게 전파할 것인지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과정 역시 기이하리라는 예상을 해야 합니다.

그는 성性을 처음 만들때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셨고, 이 새로운 생명을 처음 만들 때에도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와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다른 이름- 성만찬, 미사주의 만찬으로 부르는 신비한 행위가 그것입니다. 

적어도 이 세가지는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지금 저는 이 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이 생명이 전파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특별한 경우들까지 살펴볼 시간도 없고, 그 부분에 대한 제 지식 또한 충분치가 못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에딘버러에 가는 법을 몇 분 안에 설명해 주어야 한다면, 아마 기차를 타고 가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보트나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않겠지요. 
또 저는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저의 감리교도 친구들은 제가 믿음을 좀더 강조하고 다른 두 가지는 덜 강조하기를(상대적으로)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사실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 가지를 다 말할 것이며, 현재 저의 목적에는 이것들만 이야기하 
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로서는 왜 이 세 가지 방식이 새로운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육체적 쾌락과 새로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사이의 연관성 역시 누군가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저도 알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느니 우리가 실재에 기대하는 바는 저러하다느니 하면서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가 새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가 하나님이었다고(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이라고) 믿는 이유는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생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명백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그렇게 말한 예수의 권위에 입각하여 이것을 믿습니다. 
권위라는 말에 질겁할 필요는 없습니다. 

권위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므로 믿는다는 뜻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사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사실들의 99퍼센트는 모두 권위에 입각해서 믿는 것들입니다. 

저는 뉴욕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뉴욕을 제 눈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곳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추상적인 추론을 통해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뉴욕의 존재를 믿는 것은 신빙성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위에 입각하여-즉,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태양계와 원자와 진화와 혈액 순환 따위를 
믿습니다. 

세상의 역사적 진술들도 모두 권위에 입각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노르만 정복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학에서 무언가를 증명하듯이 순전히 논리를 통해 그 사건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는 것은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거기에 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권위에 입각해서 믿는 것이지요. 

종교의 권위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듯이 다른 영역에서도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한평생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듣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연적인 생명은 부모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 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생명을 소홀히 다루다가 영영 잃어 버릴 수도 있고, 자살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얻은 생명을 지키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자기의 동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생명을 보살피고 보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제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몸에 자연적인 생명이 있는 한 그 생명은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은 죽은 몸과 달리 상처를 입었을 때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 
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 해 주므로 -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삶으로써 만약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를 만족시 
키기를 바라며, 아니면 적어도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경우에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 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거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머릿속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를 본받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전체 무리는 그리스도가 활동하는 물리적 유기체 -우리가 그의 몸의 세포이자 손가락이자 
근육을 이루고 있는-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두어 가지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새로운 생명-그리스도의 생명-이 믿음 같은 순전히 정신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와 성만찬 같은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전파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 생명의 전파는 단순한 사상의 전파와 다릅니다. 

사상의 전파보다는 진화, 즉 생물학적 사실 내지는 초생물학적 사실에 더 가깝지요.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아무리 애써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순전히 영적인 피조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떡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조잡하며 영적이지 못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먹는 것을 처음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물질을 좋아하십니다. 

그가 물질을 만드셨습니다.
전에 저를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던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 볼 기회를 얻었고 그래서 그를 믿을 수 있게 된 사람들만 이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일 같지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만 그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이 자기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이 유기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 몸의 구성원이 하나씩 더 생길 때마다 그는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돕고 싶다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한 세포가 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을 불려 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내 놓고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다른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적군이 점령한 이 세상에 변장을 하고 들어와 일종의 비밀 결사대를 통해 마귀의 세력을 전복하시려 합니까? 

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시지 않습니까? 

그만큼 강하지 못해서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대군을 이끌고 오시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라면 연합군이 독일로 진군해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 편이라고 나서는 프랑스인을 과연 높이 평가해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드러내놓고 직접 세상에 간섭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뜻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세상이 끝나는 날입니다.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계 전체가 하룻밤 꿈처럼 사라지고 무언가 다른 것-그 전까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될 그날,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와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그날에 가서야 그의 편이라고 나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변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피조물들은 저마다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뒤덮이든지, 거역할 수 없는 공포에 뒤덮일 것입니다. 

그때에야 어느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려 들면 이미 늦습니다.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엎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때는 선택의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기회를 주려고 잠시 지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체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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