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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2-3장 충격적인 갈림길

by 마이코 2024. 7. 2.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한 악한 권세가 현재 이 세상의 군주 행세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연히 나올 질문이 있지요. 
이런 현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상한 분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권위 있는 위치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한 가지 일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에 부합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긋날 수 있는 지 알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오늘 밤부터는 너희 공부방을 정리해 주지 않을 거야. 이젠 너희도 스스로 방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지" 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지각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공부방에 가 보니 곰인형이며 잉크며 불어 문법책이 온통 어질러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방을 잘 정리하길 더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아이들에게 방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역시 어머니의 뜻입니다. 
이런 일은 군대나 회사나 학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때,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이 뜻한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뜻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 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의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추론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강의 지류가 그 원천보다 높이 흐를 수 없듯이, 그는 그르고 여러분은 옳은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에게 반대하여 논쟁하는 것은, 여러분을 논쟁할 수 있게 만든 바로 그 힘에 반대하여 논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걸터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지요.

만약 하나님이 지금 이 우주의 전쟁 상태를 자유 의지를 위해 즉, 하나님이 줄을 잡아당겨야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의 세상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이 진짜 선을 행하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세상,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하신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 의지가 어떤 것인지 이해한다면, 전에 어떤 이가 제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 즉 "하나님은 왜 이처럼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 을 만드셨는가?" 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것입니다. 
좋은 재료로 만든 피조물일수록, 더 똑똑하고 강하고 자유로운 피조물일수록, 옳은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입니다. 
소는 선하든 악하든 거기에서 거기입니다. 
그러나 개는 소보다 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개보다 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지요. 
평범한 성인은 더 그렇습니다. 
천재적인 성인은 더 그렇습니다. 
초인간적인 영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그리고 전통에 의거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 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오히려 타락 이후에야 성적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 즉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릿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 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우리가 인간 역사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 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엔진을 처음 만들었듯이 인간을 처음 만드셨습니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서 우리 식으로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 봤자 소용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복이나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썼습니다.
여러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훌륭한 제도들을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무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언제나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 때문에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들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모든 것을 비참한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사실상 이 기계는 망가졌습니다. 
출발은 잘 한 것 같았고 처음 얼마간은 제대로 가는 것 같았지만 곧 고장나 버렸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연료를 넣고 달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금껏 우리에게 해 온 짓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에 따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 몇몇은 아주 열심히 노력했지요).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제가 '좋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좋은 꿈'이란 어떤 이방 종교에든지 다 퍼져 있는 기묘한 이야기,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한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며 그는 옳은 행동을 원하신다는 것을- 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머리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며, 그렇게 심어 주신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이 유대인 가운데 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습니다. 
또 마지막 날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인 같은 범신론자라면 얼마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일부라고 말하거나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말이 하등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범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세상 밖에 계시며 세상을 만드신 존재, 세상 모든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주장 중에 이제는 우리 귀에 너무 익은 나머지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제 돈을 훔쳤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노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의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제 돈을 훔쳤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노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의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이상하고도 의미심장한 사실인데)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복음서를 읽을 때 그에게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그리스도는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인간에 불과할 경우, 온유나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 말 들을 자주 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 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 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