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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1-5장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C.S. 루이스_순전한기독교_1장 옳고 그름_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by 마이코 2024. 6. 26.

1-5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저 물질적 우주 너머에 있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도덕률을 통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로써 지난 장을 마무리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결론에 심기가 불편해진 분이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 결국 또 하나의 '종교 선전' 에 불과한 내용을 철학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또는 제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더 이상 들을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라면 이미 세상의 검증이 끝난 만큼 시계를 거꾸로 돌릴 생각은 없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점에 대해 말해 봅시다. 

만일 제가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고 한다면, 시계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거꾸로 돌리는 편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한다면 농담으로 듣겠습니까? 
아니, 시계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합시다. 
우리는 모두 진보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보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원하는 곳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러니까 그 경우에는 가장 먼저 되돌아가는 사람이 가장 진보적인 사람인 셈이지요
이 점은 산수의 경우를 생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면, 빨리 그것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계산을 다시 해야 더 신속히 답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겠지만, 인류는 명백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둘째로, 저는 아직 본격적인 '종교 선전'을 시작조차 못 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하나님은 고사하고, 현실 종교가 믿는 하나님조차 아직 다루지 못했습니다. 
도덕률 배후에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데까지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교회의 도움 없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누군가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중 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점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군가에 대해 두 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만든 우주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주를 유일한 단서로 사용한다면 '그는 위대한 예술가(우주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므로)이지만 
인간의 친구는 될 수 없는 무자비한 존재(우주는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므로」 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우리의 정신 안에 둔 도덕률입니다. 
이것은 내부 정보이므로 우주보다 더 좋은 증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집을 보기보다는 그의 말을 들어야 그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우주보다는 도덕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증거를 볼 때 우리는 우주 배후에 있는 존재가 을은 행동  
-공정한 처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용기, 신뢰. 정직, 신용으로 표현되는 - 
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는 기독교를 비롯하여 몇몇 종교들이 주장하는 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나아가지는 맙시다. 
도덕들은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상냥하고 동정심 많은 분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을 선하다고 생각할 근거를 주지 않습니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덕률은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혹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위험하며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도덕률과 같다면, 그는 상냥한 분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곧 그가 용서하신다는 뜻" 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그것은 너무 성급한 말입니다. 
용서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인격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 무엇보다 정신과 닮은 도덕률 배후의 힘이라는 데까지만 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격과 거리가 먼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순전히 비인격적인 정신이라면, 그 정신에게 용서해 달라거나 벌을 면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허튼 짓이 될 것입니다. 
계산이 틀렸을 때 구구단에게 벌을 면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허튼 짓인 것처럼 말이지요. 
계산이 틀리면 답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 -비인격적인 절대 선-이라면 결코 좋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개의치 않겠다" 고 말한다 해서 피할 길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마음 한편으로 절대 선의 편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탐욕과 거짓과 착취를 인정하지 않는 그 절대 선에게 내심 동의하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분의 경우만큼은 예외로 삼아 한 번만 벌을 면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의 배후에 있는 그 힘이 이런 행동을 정말 예외 없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선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빠져 있는 끔찍한 곤경입니다.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고 다음 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기미 또한 전혀 없으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동맹자가 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절대 선의 시선과 마주치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은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선은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가장 큰 안전책이 될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 선에 잘못된 방식으로 반응해 왔습니다.

저의 세 번째 요지는 이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우회적인 방식으로 진짜 주제에 접근하고자 한 것은 여러분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서술해 온 이런 사실들을 먼저 이해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병들었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처럼 여러분은 인간이 거의 아무 가망도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인간이 지금처럼 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가에 관해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덕률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 정신인 동시에 인격일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제가 충족시킬 수 없는 이 법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충족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을 구원하셨는가에 관해 말해 줍니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저보다 더 권위 있게 말해 줄 사람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의 전제가 되는 사실들을 직면하도록-기독교가 답을 주겠다는 문제들이 어떤 것들인지 이해하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들은 아주 무서운 것들이었습니다. 
저도 좀더 유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제가 참으로 믿는 바를 말할 수밖에 없군요. 
물론 저는 결국 기독교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준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가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로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전쟁이나 그 밖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종교에서도 위안은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한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전쟁 전 국제 정치에 품었던 몽상에서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지금은 종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https://youtu.be/saAa9_AM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