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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1-4장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C.S. 루이스_순전한기독교_1장 옳고 그름_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by 마이코 2024. 6. 26.

1-4장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돌이나 나무에 해당하는 이른바 '자연 법칙' 은 단순히 하나의 표현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일정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 는 것은 사실상 자연이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뜻에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법칙들은 실재하는 것 -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 - 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법칙' 내지는 '옳고 그름의 법칙' 은 인간 행위라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즉, 인간의 경우에는 현실의 사실들 외에 어떤 것, 즉 우리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재적 법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법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고의 능력을 갖게 된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이 우주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른바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을 가진 이들은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처럼 사고할 수 있는 생물은 고정된 방식으로 움직이던 물질이 일종의 요행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천분의 일의 우연으로 무언가가 태양과 부딪쳐서 행성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또 천분의 일의 우연으로 그 행성 중 하나인 지구에 생명에 필요한 화학물질과 적절한 온도가 마련됨으로써 지구에 있던 몇몇 물질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아주 많은 일련의 우연을 통해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우리 같은 인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종교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의 배후에는 그 어떤 것보다 '정신mind'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무언가는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존재입니다. 
그 무언가는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목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어쨌든 자신과 닮은 존재
-정신을 가졌다는 정도에서만 닮았다는 뜻입니다-
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이 우주를 만들어 냈습니다.
종교적 관점이 먼저 있었고, 유물론적 관점이 점차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고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이 두 관점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과학으로는둘 중에 어느 관점이 옳은지 알아 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과학은 실험으로 이루어집니다.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하지요.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과학적 진술이라도 그 실제 의미는 "1월 15일 오전 2시 20분에 망원경으로 하늘의 한 부분을 보았더니 이러이러한 것이 보였다"라든지, 
"이 성분을 용기에 담고 이러이러한 온도로 가열했더니 저러저러한 물질이 되었다' 같은 것입니다. 
제가 과학에 반대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다만 과학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적인 사람일수록 이런 제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제가 믿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과학은 유용하고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왜 존재하느냐,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
-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
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만일 '배후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전연 알려지지 않거나, 알려지더라도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닙니다. 
진정한 과학자는 대개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책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어설픈 과학 잡동사니를 주워모아 글을 쓰는 기자들이나 대중 작가들이 그런 말을 하지요. 
결국 이것은 상식의 문제입니다. 
언젠가 과학이 완벽해져서 전 우주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설사 그렇게 되었다 해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은 지금과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 줄 길이 하나 있습니다. 
외부의 관찰로는 알 수 없는 내용들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전 우주에 딱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단순히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를테면 이 경우에 한해서는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는 인간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도덕률 아래 있으며, 그 도덕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내지 않은 것으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고,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점에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만일 전기나 양배추를 연구 할 때처럼 인간을 외부에서만 연구하는 이가 있다면, 
즉 우리 언어를 몰라서 우리의 내면에 대한 지식을 전혀 얻지 못한 채 단지 행동만을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 도덕률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인데 도덕률은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을 다루는 것이니, 어떻게 그

증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돌이나 날씨의 경우에 사실들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 해도, 외부의 연구만 가지고서는 그 무언가를 발견할 희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우리는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든 힘이 배후에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만일 그런 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힘은 관찰 가능한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사실들을 만들어 낸 실재이므로 단순한 사실 관찰을 통해서는 찾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너머의 존재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그런 배후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달리 표현해 봅시다. 
만약 우주 밖에서 우주를 통제하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우주 안에 있는 사실들 중 하나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집 을 지은 건축가가 곧 그 집의 벽이나 계단이나 벽난로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 힘은 오직 우리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내면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으로서만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우리 내면에서 그런 힘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실마리가 확실히 잡히지 않습니까?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사례에서 '그렇다'는 답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 외에 다른 사례에서는 왜 답을 얻을 수 없는지 알고 있습니다. 
푸른 색 제복을 입은 사람이 집집마다 작은 봉투를 놓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안에 편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저 사람이 비슷한 봉투를 놓고 갈 때마다 그 안에 편지가 들어 있었거든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다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은 봉투에도 전부 이런 편지가 들었는지 확인한 적은 없지 않소?" 라고 반박한다면, "물론 없습니다. 
저한테 배달되지 않은 봉투를 함부로 열어 보면안 되지요. 
저는 다만 제가 열 수 있는 봉투들을 열어 본 경험을 통해 열 수 없는 봉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거랍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열 수 있는 유일한 봉투는 인간 자신입니다. 
그 봉투를 열어 보았을 때, 특히 '나'라는 인간을 열어 보았을 때 제가 발견한 것은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 아래 있는 존재' 라는 사실, 
즉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웃집 사람들이 전부 저와 똑같은 편지를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는 것처럼, 제가 혹시 돌이나 나무의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 해도 거기에서 인간의 경우와 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돌이 중력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 -편지를 보낸 이가 저에게는 제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르라는 말만 하는 반면, 돌에게는 그 본성의 법칙을 무조건 따르도록 강제한다는 사실 - 
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편지를 보낸 이가 있다는 점, 말하자면 사실들 배후에 존재하는 '힘' 내지는 '지휘자', 또는 '안내자'가 있다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성급하게 결론으로 나아간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 까지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저는 단지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법칙으로 나타난다'는 데까지만 말했을 뿐입니다. 
그 무언가가 다른 무엇보다 정신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물질뿐인데, 물질이 지시를 내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무언가가 정신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인격과 같다고는 더더구나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미리 이야기해 두어야겠군요. 
지난 100년간 하나님에 대한 감언이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 점만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https://youtu.be/ydBa6WFh8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