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옳고 그름_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1-2 몇 가지 반론>
이 두 가지 사실이 정말 토대라면,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확실히 다져 놓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가 받은 몇몇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도덕률' 또는 바른 행동 규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사실상 인간의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른 본능들처럼 발전해 온 것이 아닙니까?"라는 편지를 보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집단 본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본능은 제가 말하는 도덕률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성애나 성적 본능이나 식욕 등을 통해 본능의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나 욕구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끔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그런 욕구로 나타날 때도 있지요.
그런 욕구는 확실히 집단 본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돕고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과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와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위험한 지경에 처한 어떤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합시다.
아마 여러분은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느낄 것입니다.
하나는 당장 달려가 도우려는 욕구요(이것은 집단 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험을 피하려는 욕구입니다(이것은 자기 보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충동 외에 "도망치려는 충동을 누르고 도우려는 충동을 북돋우라"고 말하는 제3의 무언가를 내면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 두 본능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며 그 가운데 어느 본능을 따라야 할지 결정하는 이것이 곧 그 두 본능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떤 키를 눌러야 하는지 지시하는 악보가 곧 피아노 건반 키 가운데 하나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도덕률이 우리가 연주해야 할 곡이라면, 본능은 단지 건반 키들에 불과합니다.
도덕률이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본능만 있다면, 그 두 가지가 충돌할 때에는 강한 쪽이 이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덕률을 가장 선명하게 의식하는 순간에는 대개 둘 중에 더 약한 본능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물에 빠진 사람을 돕는 편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편을 더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률은 그래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도덕률이 옳은 충동을 원래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해 애쓰라고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즉,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을 얻기 위해 상상력을 일깨우고 동정심 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집단 본능을 자극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한 본능을 다른 본능보다 강화시키려 드는 것은 분명히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집단 본능 자체가 "너의 집단 본능은 지금 잠들어 있으니 깨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피아노 건반 키 자체가 자신을 다른 키보다 더 크게 치라고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률이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는 세 번째 길은 이것입니다.
만약 도덕률이 본능 중 하나라면, 언제나 선하며 언제나 옳은 행동 규범에 일치하는 충동 하나를 우리의 내면에서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본능에 대해서든지 때로는 억누르며 때로는 북돋우라는 명령을 도덕률로부터 받습니다.
우리의 충동 가운데 어떤 것- 이를테면 모성애나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충동에는 원래 좋거나 나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피아노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피아노 건반에 '옳은' 키와 '그른' 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키는 옳게 눌리는 순간도 있고 그르게 눌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도덕률은 본능 중 하나도 아니고 본능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닙니다.
도덕률은 본능들을 지휘하여 일종의 곡조(우리가 '선'이나 '옳은 행동'이라고 부르는
곡조)를 만들어 내는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짓은 자신의 본성에 있는 본능 중 하나를 골라,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따라야 할 사항으로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지침이 된 후에도 우리를 마귀로 만들지 않을 본능은 없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애야말로 안전한 본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애를 핑계로 정의를 무시할 경우 여러분은 이른바 '인간을 위하여' 계약을 깨뜨리며 재판의 증거를 위조할 것이고, 결국 잔인한 배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제게 편지를 보내 온 사람 중에는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도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대개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구구단을 모를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단이 단지 인간의 관습, 즉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 낸 것으로서 인간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달리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모든 것도 그렇지만 '바른 행동의 규칙'도 부모와 스승과 친구들과 책들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얼마든지 달라졌을 수도 있는 단순한 관습이지만 우리가 배운 것은 좌측 통행이지만, 우측 통행이 규칙이 되었을 수도 있지요-
또 어떤 것들은 수학처럼 실제적인 진리들입니다.
문제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 그 중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1장에서 말했듯이 한 시대나 한 나라의
도덕관은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도덕관과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어느 쪽 길로 다니며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등의 단순한 관습들은 얼마든지 큰 차이를 보일 수 있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민족마다 다른 도덕들에 대해 생각할 때, 어느 한쪽의 도덕이 다른 쪽의 도덕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까?
또 어떤 도덕은 이전보다 낫게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들이 없다면 도덕적 진보란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보란 단순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향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한 도덕관이 다른 도덕관보다 더 진실하거나 더 나은 경우가 있을 수 없다면,
야만인의 도덕보다 문명인의 도덕을 선호하거나 나치의 도덕보다 기독교의 도덕을 선호하는 것은 다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물론 실제로는 우리 모두 도덕간에 우열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도덕관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이들이야말로 '개혁가'나 '개척자'-
주변 사람들보다 도덕을 더 잘 이해한 사람-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지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어떤 도덕이 다른 도덕보다 더 좋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사실상 어떤 기준에 견주어 그 두 도덕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그 중에 어느 것이 그 기준에 더 가까운가를 건준 것이지요.
그때 두 도덕을 견준 기준은 그 두 도덕과 다른 제3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그 두 도덕을 '참 도덕'이라 할 만한 것과 비교함으로써,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 진정한 '옳음'이라는 것이 존재
하며, 어떤 도덕관은 다른 것보다 그 진정한 '옳음'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의 도덕이 더 참되며 나치의 도덕이 덜 참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 - '참 도덕' 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합니다.
뉴욕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저의 생각보다 더 참되거나 덜 참될 수 있는 이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우리의 생각과 상관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나 제가 말하는 뉴욕이 단순히 내 머릿속에서 내가 그려 낸 도시'라면 어떻게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참되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참과 거짓 자체가 아예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른 행동규범'이 단순히 '각 나라가 어쩌다가 승인하게 된 사항들'에 불과하다면, 한 나라의 승인이 다른 나라의 승인
보다 더 올바르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지며 세상이 도덕적으로 더 나아졌느니 나빠졌느니 하는 말 또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저의 결론은, 바른 행동' 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종종 자연적인 '행동 법칙' 이란 없다는 의심을 하게 되긴 하지만, 사실
은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그런 '행동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도덕간의 차이와 사실에 대한 신념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탓에 도덕간의 차이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한 사람은 "300년 전 영국에서는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서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소.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바 '인간 본성의 법칙' 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이란 말이오?" 라고 묻더군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마녀를 잡아 처형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 더 이상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마녀의 존재를 믿는다면
-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 대가로 초자연적 능력을 받아, 그 힘으로 이웃을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고 날씨를 궂게 만드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 역시 이 불쾌한 이적행위자들을 사형시켜 마땅하다는 데 모두 동의했을 것입니다.
즉, 도덕적인 원칙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된 것은 지식의 큰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녀가 없다고 생각해서 마녀 사냥을 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인 진보가 아닙니다.
집에 쥐가 없다고 생각해서 쥐덫 놓기를 그만 둔 이를 인도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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