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옳고 그름_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인간본성의 법칙>
우리는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를 흔히 듣습니다.
개중에는 재미있는 다툼도 있고 불쾌감만 주는 다툼도 있지요.
어떤 다툼이건 간에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가만히 들어 보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누가 너한테 이런 짓 하면 좋겠어?"
"거긴 내 자리예요. 내가 먼저 맡았다구요."
"걔 좀 내버려 둬. 너한테 나쁜 짓 한 거 없잖아."
"왜 먼저 밀고 들어오는 거야?"
"내 오렌지도 좀 줬으니까 네 것도 좀 줘야지."
“이봐요,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못 배운 사람뿐 아니라 배운 사람도, 다 큰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매일 이런 종류의 말들을 합니다.
여기에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의 행동이 어쩌다 보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그런 기준 따위는 집어치우시지"라고 대꾸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실은 자신의 행동이 그 기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거나, 기준에 위배되 긴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요.
즉, 이 특별한 상황에서는 설사 남이 자리를 먼저 맡았더라도 그 자리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든지, 자기가 오렌지를 받았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른 것이라든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는 식의 구실을 댄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공정한 처신fair play이라 해도 좋고 바른 행동이라 해도 좋고 도덕이라 해도 좋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는 어떤 '법칙'이나 '규칙'을 양쪽 모두 염두에 두고 있으며, 실제로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는 법칙이나 규칙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없다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울 수는 있겠지만, 인간적인 의미에서 다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툼 quarrelling 이란 상대방의 그름을 밝히려는 행동이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 일종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다툼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맙니다.
풋볼 경기의 규칙에 대해 서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을 때, 선수에게 파울을 선언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laws of nature' 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중력 법칙이나 유전 법칙, 화학 법칙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 전 시대의 사상가들이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사실상 '인간 본성의 법칙 Law of Human Nature' 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모든 물체가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유기체가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듯이 인간이라고 불리는 생물에게도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
그러나 신체는 중력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없어도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사상가들의 생각이었지요.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봅시다.
인간은 매순간 여러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 법칙만큼은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아무 지탱 장치 없이 공중에 던지면, 돌이 땅에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다른 동물들처럼 다양한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법칙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법칙,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기체들과 공유하지 않는 법칙만큼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법칙을 '자연'이라고 부른 것은, 굳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을 전혀 만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색맹이나 음치가 가끔 있을 수 있듯이 이 법칙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옳지 않다면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언급해 온 말들은 전부 헛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치도 우리처럼 내심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들에게 "너희는 그르다"고
말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개념이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싸울 수는 있어도 그들을 비난 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카락 색깔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듯이 말입니다.
문명이나 시대에 따라 도덕도 크게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 누구나 알고 있는 '자연'이라는 것은 그리 견고한 개념이 못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각 문명과 시대의 도덕 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인 차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인도인, 중국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도덕들을 비교하면, 그것들이 서로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폐지 The Abolition of Man》라는 책의 부록에 그 증거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각각의 도덕이 전적으로 다를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전투중에 줄행랑치는 행동을 높이 평가하거나 자기에게 가장 친절했던 사람을 배신해 놓고 으쓱거리는 곳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보다는 차라리 2 더하기 2가 5가 되는 곳을 상상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이기적이지 않은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
가족들한테만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같은 나라 동포들이나 모든 인간들한테도 그렇게 해야 하는지- 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을 달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 자신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늘 동의해 왔습니다.
이기주의가 높이 평가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한 명의 아내하고만 살아야 하는지, 네 명의 아내와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을 달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모든 여자를 다 차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늘 동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람조차 금세 자기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남에게 한 약속은 마음대로 어기면서도, 남이 자기한테 한 약속을 어기려고 하면 당장에 "이건 공정치 못해" 하면서 불평을 터뜨립니다.
조약이란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국가가 바로 다음 순간에 “이 조약은 불공정 조약이므로 파기한다"고 말하는 이율배반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만약 조약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즉 '자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정한 조약이든 불공정한 조약이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것은 겉으로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사실은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법’을 알고 있음을 무심결에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옳고 그름의 존재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숫자 계산이 가끔 틀릴 수 있듯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가끔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구단이 취향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옳고 그름'도 단순한 취향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다음 요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요점이란 이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예외가 있다면 양해해 주십시오.
이 책에서는 그런 분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분들은 다른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그런 분들을 제외한 평범한 사람들끼리 이야기해 봅시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잘난 척하려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저는 다만 한 가지 사실에 주의를 모으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해, 이 달, 아니 바로 오늘,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스스로 실천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실패에 대해 온갖 변명을 둘러댑니다.
“내가 아이들을 부당하게 대한 것은 그때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야.”
“금전 거래에서 좀 부정직한 짓을 한 건 - 지금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만 그때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지."
"아무개 노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바빠질 줄 알았다면 그런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내 행동이 아내(또는 남편)이나 누이(또는 형제)를 그렇게 화나게 만들 줄 알았다면 왜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겠어."
"어쨌든 나란 인간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저도 여러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 또한 자연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사실을 지적하는 순간 엄청나게 많은 변명거리들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그 변명거리들이 그럴듯하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변명거리들이야말로, 싫든 좋든 우리가 자연법을 얼마나 깊이 믿고 있는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른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렇게나 변명거리를 찾느라 노심초사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바르다'는 가치를 아주 깊이 믿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의 압력을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법칙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지 책임을 전가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아챘겠지만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에 대해서만 이렇게 온갖 변명을 늘어 놓습니다.
또 자신의 나쁜 습성에 대해서만 피곤이나 근심이나 허기 탓을 할 뿐, 좋은 습성은 늘 자기 공으로 돌리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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