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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3-2 기본 덕목

by 마이코 2024. 7. 17.

앞장은 본래 짧은 라디오 강연을 위해 작성된 원고였습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10분으로 제한되어 있을때에는, 간결성을 위해 거의 모든 내용을 희생시켜야 하는 법입니다.

제가 도덕을 세 요소로 나눈 (함께 항해하는 배들을 예로 들어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가장 짧은 시간에 전할수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옛 사상가들이 도덕을 구분한 다른 방식, 방송에서 언급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생략했지만 사실은 아주 유익한 방식에 관해 약간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오래된 분류 체계에 따르면 도덕에는 일곱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그 중 네 가지는 '기본'덕목. (Cardinal virtues), 나머지 세 가지는 '신학적'덕목. (Theological virtues) 이라고 하지요.

'기본'덕목은 문명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들이지만, '신학적'덕목은 대개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것들입니다.

신학적 덕목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기본 덕목 네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에서 '기본. cardinal'이라는 단어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Cardinals' 이라는 단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경첩'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덕목들은 '중추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쓴 것이지요).

여기에 해당하는 덕목에는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이 있습니다.

 

'분별력. (Prudence)'이란 실생활에 적용되는 양식. (良識) (common sense)을 뜻하는 말로서,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분별력을 '덕목'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했다고 해서 '착하기만' 하면 어리석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첫째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관심 있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별력'을 발휘하며, 아주 지각 있게 사고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는 지성의 영역에서 아이처럼되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바라시는 것은 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머리입니다.

그는 우리가 착한 아이처럼 순진하고 한결같으며 정 많고 잘 배우기를 바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성은 어느 면에서나 그 임무를 다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최상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한다고 해서, 그 자선단체가 가짜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볼 필요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예컨대 기도하고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해 다섯 살 수준의 유치한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평범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하나님이 덜 사랑하시거나 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는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다 품으십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진 그 이해력을 사용하기 바라십니다.

"착하게 살아요, 예쁜 아가씨. 다른 사람이야 똑똑해지든 말든 내버려두고요" 라는 노래가사는 "착하게 살아요, 예쁜 아가씨. 그러려면 똑똑해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를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지적인 면에서 게으른 사람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그리스도인이될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곧 두뇌를 비롯한 자신의 모든것을 요구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일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정직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새 지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따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바로 교육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니언처럼 교육받지 못한 신자가 온 세상을 놀라게 만든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제. (Temperance)'는 불행히도 그 의미가 변질된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이 말은 대개 '절대 금주. (teetotalism)'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요.

그러나 이 두 번째 덕목에 '절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그 당시에는 전혀 이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절제는 특별히 음주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부 절대 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금주를 요구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회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성향을 가졌다거나, 자기가 그런 성향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잘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독한 술을 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자기한테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술을 삼가는 것이지 남이 술 마시는 것을 죄로 생각해서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남이 적당히 술을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좋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부류의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이유로 어떤 것 - 결혼이든 고기든 술이든 영 화든 - 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절제'라는 말을 음주 문화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큰 해약이 있습니다.

음주 외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똑같이 무절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골프나 오토바이를 자기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남자나 옷이나 카드놀이나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자는 저녁마다 술에 취하는 사람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요.

카드놀이광이나 골프광이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자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정의. (Justice)'는 법정에서 통용되는 정의 이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정함' 이라고 부르는 모든것을 옛날에는 '정의'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정직함이나 공평한 교환, 성실함, 약속을 지키는 일 등 삶의 모든 부분이 포함됩니다.

'꿋꿋함. (Fortitude)'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용기-고통 속에서 '버티는' 용기뿐 아니라 위험에 맞서는 용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가장 비슷한 현대 영어는 아마 '배짱. (guts)' 일 것입니다.

이 덕목을 발휘하지 않는한 다른 어떤 덕목도 오래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덕목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좀더 깊은 차원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정의롭거나 절제 있는 특정 행동을 한다는 것이 곧 그 사람 자체가 정의롭거나 절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이 아니어도 가끔 좋은 샷을 날릴 수 있습니다.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이란, 좋은 샷을 수없이 쳐본 결과 이제는 마음 놓고 믿어도 좋을 만큼 눈과 근육과 신경이 잘 훈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수학자의 정신은 수학을 다루고 있지 않을 때에도 일정한 습관과 시야를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테니스 잘 치는 사람은 테니스를 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일정한 상태나 특질을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꾸준히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결국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덕목'이란 특정 행동이 아니라 바로 이런 특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분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특정 행동만을 덕목으로 여긴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그릇된 생각을 조장하게 될 것입니다.

(1) 옳은 행동을 하기만 하면, 어떻게 왜 그 행동을 했느냐 - 기꺼이 했느냐 마지못해 했느냐, 부루퉁하게 했느냐, 기분 좋게 했느냐, 여론이 두려워서 했느냐, 그 일이 옳기 때문에 했느냐

- 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그를 때에는 아무리 옳은 행동을 한다 해도 정작 중요한 내면의 특질이나 성품, '덕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실력이 변변찮은 선수가 강한 스트로크의 필요성을 간파해서가 아니라 그저 홧김에 세게 친 공이 운 좋게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 일은 그가 믿을 만한 선수로 자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2) 그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묶음의 규칙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덕목'은 현세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내세에는 다툴 일이 없을 테니 정의로울 필요가 없고, 위험이 없을 테니 용감할 필요도 없으리라는 것이지요.

다음 세상에서 정의롭거나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할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정의롭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만 형성될 수 있는 됨됨이는 여전히 요구될 것입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이러한 특질이 그 내면에서 싹 조차 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외부 조건이 좋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깊고도 강하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https://youtu.be/u2tbGg-_C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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