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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3-4 도덕과 정신분석

by 마이코 2024. 7. 17.

저는 우리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기독교 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먼 훗날 꿈에 그리던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사회와 관련하여 어떤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두 가지 일-"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현대 사회에 세부적으로 적용할 방법을 찾는 일, 그렇게 찾은 방법을 기꺼이 적용하는 사람이 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저는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즉 인간이라는 기계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서에 대해-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세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일반적인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기독교 도덕이 인간이라는 기계를 올바로 움직이기 위한 기술이라는 주장을 들을 때 아마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듯한 다른 기술, 즉 정신분석과 기독교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의학 이론 및 기술과, 프로이드(Sigmund Freud)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여 놓은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것-프로이드의 철학-은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심리학자인 융 (Carl Gustav Jung)의 철학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더구나 프로이드는 신경증 치료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일반 철학에서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므로 신경증 치료에 대한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도 일반 철학에 관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더더욱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자기 분야를 떠나 제가 아는 분야(언어분야처럼)에 관해 말을 할 때마다 그 부분에 아주 무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이드와 다른 이들이 첨가한 철학적 요소들만 제외한다면, 정신분석학 그 자체는 적어도 기독교와 배치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의 기술은 어떤 점에서는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고 있으며, 모든 이들이 이 기술에 대해 좀 알아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기술이 하는 일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요.

도덕적인 선택에는 두 가지 요소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택하는 사람의 심리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선택의 원재료가 되는 다양한 감정과 충동 같은 것들입니다.

이 원재료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정상적인' 재료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잠재의식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바람에 생긴, 아주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재료입니다.

실제로 위험한 사물을 보고 무서워하는 감정은 첫 번째 재료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고양이나 개미를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감정은 두 번째 재료의 예가 되겠지요.

또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욕망은 첫 번째에 해당되고,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비뚤어진 욕망은 두 번째에 해당될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는 일은 두 번째 종류에 속하는 비정상적인 감정들을 제거해 주는 것,

즉 선택하는 행위에 좀 더 좋은 재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은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 봅시다. 전쟁에 나가게 된 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위험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는 도덕적 노력으로 그 두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두 남자는 잠재의식에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도덕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들을 따라가 치료를 했습니다.

즉 이 두 남자를 첫 번째 남자와 같은 상태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고 이제부터 도덕적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치료를 받은 두 남자는 이제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예컨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병명이 뭐라든가 하는 그 증상이 없어져서 정말 다행이야. 이제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군. 나도 이제 나라를 위해 의무를 다해야지."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적의 포화가 떨어지는 판에 이렇게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게 되어 정말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이익을 먼저 챙기면서 위험한 일은 되도록 다른 녀석에게 미루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어.

겁을 덜 내게 돼서 정말 좋은 점은, 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실속을 챙기면서도 더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다는 거지."

이 두 태도의 차이는 순전히 도덕적인 것으로서, 정신분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즉 원재료를 아무리 향상시킨다 해도 그것과 다른 문제, 즉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뒤로 미룰 것인가를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는 진정한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선택은 도덕이 관여하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덕적 선택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고양이에게 병적인 공포를 느끼는 신경증 환자가 어떤 좋은 이유때문에 꾹 참고 고양이를 집어들때, 하나님은 건강한 사람이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 더 용감한 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성격이 비뚤어지는 바람에 잔인함이 몸에 밴 어떤 사람들이 동료들의 조롱을 무릅쓰고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거나 어떤 잔인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지금처럼 좋은 유전형질과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가 악마 취급하는 인간보다 더 못한 인간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히믈러 같은 심리적 소양에 교육까지 형편없이 받고 자라 권력을 얻었을 경우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기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원재료에서 나온 선택의 결과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원재료만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재료로 무엇을 했느냐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심리적 기질의 대부분은 대개 육체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죽으면 그 모든 기질 또한 떨어져 나가고, 진짜 그 사람의 중심, 선택을 내렸던 그것, 자신이 가진 재료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최악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그것만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때, 본인은 자기것으로 여겼지만 사실을 소화가 잘된 결과 생겼던 온갖 멋있는 요소들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모든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깜짝 놀랄 일이 많이 생기겠지요.

 

이제 두 번째 논지를 말할 차례군요. 사람들은 기독교 도덕을 "네가 이 많은 규칙들을 지키면 상을 주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말하는 하나님과 흥정하는 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기독교 도덕을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저라면 오히려 여러분이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여러분의 중심, 즉 선택을 내리는 그 부분을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이 중심부를 평생에 걸쳐 천국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든지,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다른 피조물들·자기 자신과 어울려 살아가는 피조물로 바뀌어 가든지, 하나님·동료 피조물들·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그것들과 싸우는 피조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

전자가 되는 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그것은 기쁨과 평화와 지식과 능력의 삶이지요.

후자가 된다는 것은 광기와 공포와 어리석음과 분노와 무능함과 영원한 외로움을 겪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매 순간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상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점은 기독교 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 늘상 저를 헷갈리게 하던 문제 하나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저자들은 아주 엄격해 보이는 때가 있는가 하면, 지극히 자유롭고 태평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엄청나게 심각한 일처럼 다루다가도, 끔찍한 살인이나 배신행위는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일처럼 말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마침내 저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지금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영원히 우리 각자가 감내하게 될-또는 즐기게 될-그 작은 중심의 자아에 그 행동이 어떤 흔적을 남기느냐' 하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분을 터뜨려 수천 명의 피를 흘릴 수도 있고, 또 한 사람은 분을 터뜨렸다가 조롱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영혼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똑같습니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저질렀고, 회개하지 않는 한 다음에 유혹이 올 때 화를 참아 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며 아마 이번보다 더 심하게 화를 낼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중심의 비틀린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파멸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바가 크냐 작으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평화뿐 아니라 지식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깨어 있을 때는 잔다는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자고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제대로 계산하고 있을 때에는 실수를 해도 금방 알아채지만, 틀리게 계산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지요.

취하지 않았을 때는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취해 있는 동안에는 모릅니다.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릅니다.

 

 

https://youtu.be/7zB3Sox_2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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