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성에 관한 기독교의 도덕, 즉 그리스도인들이 '순결. chastity'이라고 부르는 덕목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규범인 순결을 사회의 규범인 '정숙함. (이것은 'modesty'라는 단어가 지닌 여러 뜻 가운데 하나지요),
즉 예의범절이나 얌전함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의범절. propriety 이라는 사회적 규범은 주어진 사회 집단의 관습에 따라 신체는 어느 정도나 노출시킬 수 있으며, 대화는 어떤 주제에 한해 허용되는지, 또 단어는 어떤 것들을 쓸 수 있는 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결의 규범은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반면, 예의범절의 규범은 늘 바뀌게 마련입니다.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태평양 제도의 소녀나 온몸을 옷으로 칭칭 감싼 빅토리아 시대 숙녀나, 그들 사회의 기준에 따르면 똑같이 '정숙하고' 예의 바르며 얌전하게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옷차림과는 상관없이 순결할 수도 있고 순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순결한 여성들이 사용했던 언어들이 19세기에는 아주 방탕한 여성들이나 쓰는 말이 될 수도 있지요.
자기나 남의 욕정을 부추기려고 의도적으로 자기 시대와 장소에 통용되는 예의범절의 규범을 깨뜨리는 사람은 순결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나 부주의 때문에 깨뜨리는 사람은 그저 예의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남에게 충격을 주거나 그들을 당황시킬 작정으로 도전하듯이 예의범절을 어기는 이들은 순결하지 않다고까지는 못해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지요.
저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예의범절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 곧 순결의 증거가 된다거나 순결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에, 제 시대에 그 규범이 크게 완화되고 간단해진 것을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연령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예외 없이 같은 기준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입장을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이런 혼란기일수록 나이 든 이들이나 구식 취향을 가진 이들은 젊은이들이나 '해방 된' 이들이 예의 없이(옛 기준에서 볼 때) 행동한다고 해서 타락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또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연장자들이 새로운 기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위선자라느니 청교도라느니 하면서 비난하지 말아야겠지요.
할수있는한 진정으로 다른 이들의 선량함을 믿으며, 할 수 있는 한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려는 마음만 있다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순결은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입니다.
여기에는 피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규범은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충실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완전히 금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우리의 본능에도 어긋나는 규범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틀렸든지 우리의 성적 본능에 그야말로 문제가 생겼든지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합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우리의 본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쪽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생물학적 목적이 체력을 키우는 것이듯이, 성관계를 갖는 생물학적 목적은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싶을 때마다 먹는다면, 대개는 과식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턱없이 많이 먹는 경우는 없지요.
한 사람이 2인분까지야 먹을 수 있겠지만 10인분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즉 생물학적 목적에 비해 식욕을 약간 더 느낄 수는 있지만, 아주 지나칠 정도로 느끼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청년이 성욕을 느낄 때마다 성관계를 맺고 그때마다 아기를 낳는다면 10년 안에 작은 마을 하나 정도의 인구는 너끈히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처럼 성욕은 그 기능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까요?
스트립쇼 공연-무대 위에서 여자가 옷 벗는 것 구경시키기-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나라에 가서 보니, 덮개로 가린 접시를 무대에 들고 나타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추고 천천히 덮개를 들어 올리며 양 갈비나 베이컨 조각을 보여주는 쇼만으로도 극장이 꽉꽉 찬다면, 그 나라 사람들의 식욕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다른 세계에서 자란 누군가가 우리를 보면 우리의 성욕 상태를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까요?
한 비평가는 만약 그런 음식 스트립쇼를 하는 나라가 있다면, 자신은 그 나라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겠노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는 스트립쇼 같은 것들은 성적 타락 때문이 아니라 성적 굶주림 때문에 생긴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어떤 이상한 나라에서 양고기 공연이 성행할 경우 기근을 한 가지 이유로 가정할 수 있다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실제로 그 나라에서 소비되는 음식이 많은지 적은지 살펴봄으로써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충분히 먹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면, 굶주림이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다른 가설을 생각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적 굶주림이 스트립쇼의 원인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기 전에, 실제로 우리 시대가 스트립쇼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시대보다 더 금욕적이라는 증거부터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는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지금은 피임법 덕분에 부부간의 성생활도 더 편해졌고, 혼외정사도 어느 때보다 안전해졌으며, 부정(不貞)이나 심지어 변태적 성에 대한 여론 또한 이교도시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덜 적대적인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굶주림'이라는 가설 외에 다른 가설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성욕도 다른 욕구들처럼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더 커지는 법입니다.
굶주린 사람도 음식 생각을 많이 하겠지만, 대식가 역시 음식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굶은 사람뿐 아니라 게걸스러운 사람도 자극에 약한 법입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은 음식 아닌 것을 먹고 싶어하거나 음식을 먹는 것 외에 다른 용도에 쓰려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태적 식욕을 가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변태적 성욕은 사례가 많을 뿐 아니라 고치기도 어렵고 증세도 심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세세히 하게 되어 죄송하지만, 그래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지난 20년 동안 성에 관한 그럴듯한 거짓말을 쉼 없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물나게 들어온 말은 "성적욕구도 다른 자연스러운 욕구들과 똑같은 것이므로, 성에 대해 쉬쉬했던 옛 빅토리아 시대의 어리석은 사고방식을 버리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선전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 점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을 쉬쉬해야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사람들은 성에 대해 쉬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쉼 없이 떠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은 여전히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쉬쉬해 온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즉 성에 대해 쉬쉬했기 때문에 성이 골칫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성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고 늘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인류가 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번식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이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기독교도 이와 똑같이 말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 그 자체나 성이 주는 쾌락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옛 스승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성적 쾌락은 지금보다 작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정신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기독교가 성이나 육체나 쾌락을 본질적으로 악하게 여기는 양 말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히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로서, 물질은 선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적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또한 우리는 천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몸을 갖게 될 텐데 그 몸은 우리의 행복이나 아름다움이나 활력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리라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랑의 시는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쓴 것들입니다.
누군가 성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즉시 그를 반박할 것입니다.
또한 "성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현재 성적 본능이 도달한 상태는 전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틀렸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즐기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절반이 음식을 삶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음식 그림을 보면서 침을 흘리고 입맛을 다시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현 상태에 대한 책임이 우리 개개인에게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조상들은 이 영역에서 애초에 뒤틀려 있던 기관(器官)을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결하지 않은 삶을 옹호하는 선전들에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또 돈을 긁어낼 목적으로 우리의 성욕을 자극 시키려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들이 노리는 것은 자나깨나 성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매 저항력이 아주 약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는 이렇게 극복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해서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고 끈기있게 이 어려움들을 극복하고자 애쓰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치료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도움을 원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의 경우, 도움을 원하는것조차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원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오래전에 한 유명한 그리스도인은 청년 시절에 늘 순결을 위해 기도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보니 자기가 입술로는 "오 주님, 저를 순결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하지만 아직은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주소서'라고 은밀한 소원을 늘 덧붙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덕목을 달라고 기도할때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순결을 갈망하기가-완전한 순결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특히 힘들어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우리의 뒤틀린 본성과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 그리고 정욕을 부추기는 현대의 온갖 선전들이 합세하여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욕망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지극히 건강하며 지극히 온당한 것이므로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거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태도'라고 느끼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화와 포스터와 소설들은 성적 방종을 건강함이나 정상적인 것, 젊음, 솔직함, 좋은 기분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잘 먹혀드는 거짓말이 다 그렇듯이 이 거짓말도 진실-앞서 말했듯이 성 자체는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빠지지만 않는다면)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라는 진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유혹받고 있는 성적 행위가 전부 건강하고 정상적이라는 말은 거짓말 입니다. 기독교와 상관없이 상식적인 눈으로 보아도 이것은 헛소리가 분명합니다.
모든 욕망을 무작정 따르다 보면 결국은 무력해지고 병들며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감추게 되는 등,
건강해지고 기분 좋아지며 솔직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한 법입니다.
따라서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들은 전부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욕망은 허용하고 어떤 욕망은 거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일련의 원칙들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어떤 이들은 위생학적 원칙에 따라, 또 어떤 이들은 사회학적 원칙에 따라 이렇게 합니다.
즉 진정 한 갈등은 기독교냐 '본성'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제어하는 일에서 기독교적 원칙을 따르느냐 다른 원칙을 따르느냐에 있습니다.
인생을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본성'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뜻에서의 '본성')을 제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원칙은 다른 원칙들에 비해 확실히 더 엄격합니다.
그러나 다른 원칙들은 줄 수 없는 도움을 우리에게 줍니다.
둘째로, 많은 이들은 기독교적인 순결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진지하게 노력해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가능성 여부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법입니다.
시험지 선택 문제가 나왔을때에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필수 문제가 나왔을때에는 어찌 되었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답안을 제대로 못 쓰더라도 어느 정도의 점수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단 한 점도 얻을 수 없습니다.
시험뿐 아니라 전쟁이나 등산, 스케이트, 수영, 자전거 타기, 심지어 곱은 손으로 뻣뻣한 목칼라를 잠그는 일에 이르기까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도 결국에는 완수해 낼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물론 완벽한 순결은-완벽한 사랑처럼-단순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분명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움을 구했는데도 오랫동안 도움이 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패할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일어나 거듭 시도하십시오.
많은 경우 하나님이 무엇보다 먼저 도우시는 부분은 덕목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바로 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순결(또는 용기나 성실 같은 다른 덕목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그 덕목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습관을 훈련시켜 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착각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최상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패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치명적인 실패는 오직 하나, 완전을 포기하고 그 이하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사람들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을 종종 오해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억압된 성적 욕망. repressed sexuality 은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억압된'이라는 것은 전문 용어로서, '거부하다', '참다'라는 뜻의 '억제된. suppressed'과 구별됩니다.
심리학에 나오는 억압된 욕망이나 생각이란, 과거에 잠재의식 속에 파고들어 왔다가 (대개는 아주 어렸을 때)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위장해서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억압된 성적 욕망은 결코 성적 욕망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청소년이나 성인이 의식되는 욕망을 거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과거의 억압 때문이 아니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새로운 억압을 만들어 낼 위험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순결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더 의식적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성욕에 대해 누구보다 월등히 많이 알게 되는 법입니다.
그들은 웰링턴 장군이 나폴레옹을 알듯이, 셜록 홈스가 모리아티를 알듯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잘 압니다.
고양이가 쥐를 알듯이, 배관공이 파이프 누수에 대해 알듯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잘 압니다.
덕은- 아니 덕을 추구하기만 해도- 빛을 주지만, 방탕은 우리를 안개 속에 빠뜨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성에 대해 꽤 길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기독교 도덕의 중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않은 것을 최고의 악으로 여긴다면 착각입니다.
육체의 죄는 악하지만,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 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즐기는 것,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악한 죄입니다.
제 안에는 제가 정말 추구해야 할 인간적 자아와 싸우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입니다.
둘 중에 더 나쁜 것은 악마적 자아입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둘 중 어느 쪽도 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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