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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3-6 그리스도인의 결혼

by 마이코 2024. 7. 17.

앞장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성적 충동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그 올바른 쓰임새,

즉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지요.

제가 특히 결혼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지극히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저 자신이 결혼해 본 적이 없으므로 간접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이 주제를 빼놓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기독교의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 -이것은 '한 몸'에 해당하는 현대어입니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감상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의 진술- '열쇠와 자물쇠는 하나의 기구이다', '바이올린과 활은 하나의 악기이다'처럼-로 믿습니다.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든 제작자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반쪽은 단지 성적인 차원에서만 짝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결합 되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해 보이는 것은 원래 함께 어울려 모든 차원에서 연합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것에서 딱 하나 (성적인 연합)만을 떼어낸 탓입니다.

기독교적 자세란 '성적 쾌락은 먹는 쾌락 이상으로 잘못되었다' 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자세란 '음식을 삼켜 소화 시키는 대신 씹기만 하고 뱉어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 하면

안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떼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된다' 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한 번 결혼이 평생을 간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교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이혼을 전혀 인정하지 않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한해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반 평신도들이 주목할 점은, 아무리 결혼에 대한 교파들의 견해에 차이가 있다해도 세상 견해와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들은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 수술처럼 살아있는 몸을 잘라 내는 일과 같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다만 그 수술이 너무나도 폭력적이므로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증세가 심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교회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혼이 동업자와 갈라서거나 군대에서 탈영하는 일보다는 다리를 잘라 내는 일에 더 가깝다는 데 모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혼을 단순히 '짝 재정리하기' 정도로 여겨서, 배우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경우에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 반대합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관점을 순결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기 전에, 또 다른 덕목인 정의와 관련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미 말했듯이 정의에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 포함됩니다.

교회에서 결혼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노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그 서약을 지키는 것은 굳이 성도덕과 연관시키지 않아도 이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즉 다른 약속을 지켜야 하듯이 이 약속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늘상 말하듯이 성적 충동이 다른 충동들과 똑같은 것이라면,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들과 똑같이 취급해야 합니다.

즉 다른 충동들이 약속의 제재를 받듯이 성적 충동 역시 결혼 서약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제 생각처럼 성적 충동이 다른 충동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적으로 더 부풀려진 상태에 있다면, 이 충동 때문에 부정직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자신은 교회의 결혼 서약을 단순한 형식으로 여겼을 뿐 꼭 지킬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속이려고 그런 서약을 한것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정말이지 현명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속이려 했습니까?

이것도 그리 현명한 일이 못 됩니다.

아니면 배우자나 친지들을 속이려 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그들의 믿음을 배신한 것입니다.

저는 신랑과 신부(또는 둘 중의 하나)가 대중을 속이려고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에 따르는 대가를 치를 생각 없이 그저 체면만 세우고자 하는 것이지요.

즉 그들은 사기꾼으로서 속임수를 쓴 것입니다.

계속해서 속임수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정직해질 마음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순결이라는 더 높고 어려운 의무를 지키라고 어떻게

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정직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전에 했던 약속의 제약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것은 순결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입니다.

결혼을 평생 가는 일로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지킬 생각도 없는 서약을 하느니 그냥 동거하는 편이 더 나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은 간음의 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입니다.

한 가지 잘못을 피하려고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서약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순결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느껴야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결혼을 계약이나 약속으로 볼 여지는 아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이 전부라면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고, 약속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약속이라는것은 아예 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정작 사랑에 대해 떠드는 이들 보다는 참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약속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체스터튼 (G. K. Chesterton)이 지적했듯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에게는 약속으로 자신들을 묶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전 세계의 사랑 노래들은 서로 영원히 함께하겠노라는 맹세로 가득합니다.

즉 기독교의 법은 사랑의 열정이 갖는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정 자체가 촉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물론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하기 때문에 했던 약속, 즉 자기가 살아있는 한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하겠다는 약속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유효합니다.

약속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즉 행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대해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는 두통을 겪지 않겠다거나 영원히 배고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연히 없지요. 그러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굳이 같이 살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건전하고도 사회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가정을 지킨다거나, 여성들 (아마도 결혼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거나 희생을 감수했을) 이 남자들이 싫증 낼 때마다 피해를 이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이유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설명하기는 좀 어려워도 제가 옳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BC보다는 좋더라도 그 B보다 더 좋은 A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으냐 나쁘냐만 생각하지, 좋은 것? 더 좋은 것?

최선의 것, 또는 나쁜 것? 더 나쁜 것? 최악의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애국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물론 애국심은 개인적인 이기주의보다야 훨씬 좋지만 보편적인 사랑보다는 못하므로 이 두 가지가 충돌할때에는 사랑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여러분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이번에는 그들이 결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결투하는 것보다야 용서해 주는 편이 훨씬 좋지만, 평생 앙심을 품고 그 사람을 쓰러뜨리려고 은밀히 애쓰게 된다면 차라리 결투하는 편이 낫겠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왜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느냐며 불평하며 가 버릴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분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황홀한 상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그럽고 용감해지도록 도와주며, 연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주고, 단순한 동물적 성욕을 억제해 줍니다 (처음에는 특히 더 그렇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정욕을 이기는 위대한 정복자입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랑이 저속한 육욕이나 냉랭한 이기주의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말했듯이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은, 본능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추구해야 할 사랑으로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못한 일들도 많지만 그보다 나은 일들도 있습니다.

사랑을 느끼는 것을 모든 삶의 토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감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정에 불과합니다.

어떤 감정도 언제까지나 강렬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지속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지속될 수 있으며 원칙도 지속될 수 있고 습관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사랑을 느끼는' 상태 역시 대개는 지속되지 못합니다.

옛날이야 기들은 흔히 "그 후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말로 끝나곤 하는데, 만약 이 말이 '50년이 지나도록 결혼하기 전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뿐 아니라 설명 정말 그럴 수 있다해도 전혀 바람직한 일이 못 됩니다.

50년 동안이 나 그런 흥분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그럴경우 일이나 취미나 잠이나 친구 관계는 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사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꼭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의미의 사랑- '사랑의 느낌'과 구별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 두 사람이(그들이 그리스도인 부부라면)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은혜로써 강화되는 깊은 연합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심지어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 사랑을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정절을 약속하게 만든 것은 '사랑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보다 차분한 두 번째 사랑입니다.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은 이 두 번째 사랑입니다.

사랑의 느낌은 그 시동을 걸어 주었을 뿐입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분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뭘 알겠어? 결혼도 안 해 봤으면서."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전에, 소설이나 영화에서 얻게 된 것들 말고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나 친구들의 삶을 통해 알게 된 것들에 근거해서 제 말의 타 당성 여부를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 자체가 책과 연극과 영화로 철저하게 채색된 상태이므로, 정말 우리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내용을 가려내려면 인내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와 맞는 사람과 결혼하기만 하면 영원히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배우자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짝을 잘못 찾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얼마든지 바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짝을 바꾼다 해도 새 사랑의 매력 역시 옛사랑과 똑같이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모르고서 말입니다. 인생의 모든 영역이 그렇듯이 결혼 생활 역시 흥분은 처음에만 찾아오는 것으로서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소년 시절 처음으로 하늘을 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느꼈던 흥분은 정작 공군에 입대하여 진짜 비행을 배우려 할때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매력적인 장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흥분 또한 막상 그곳에 살러 가서 보면 이미 사그라져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비행을 배우지도 말고 아름다운 곳에 살러 가지도 않는 편이 더 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끝까지 해내기만 하면, 처음에 느꼈던 흥분은 사라지는 대신 좀더 차분하고 지속적인 재미가 생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에 적합한 단어를 찾을 길이 없군요)

 

처음의 흥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재미에 마음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흥분을 발견하게 되기 쉽습니다.

비행을 배워서 좋은 비행사가 된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음악의 매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곳에 가서 정착한 사람은 정원 가꾸기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어떤 것이 먼저 죽지 않는 한 참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뜻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흥분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소용없는 일 일뿐 아니라 가장 나쁜 일입니다.

그 흥분이 사라지도록, 사그라져 없어지도록, 그렇게 없어져서 그 상실의 기간이 좀 더 차분한 재미와 즐거움으로 바뀌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늘 새로운 흥분을 만날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흥분없이는 못 살 것처럼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유지시키려고 하면, 그 흥분은 점점 약해지고 드물어질 것이며 결국 남은 인생을 권태감과 환멸감 속에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중년의 남녀들이 사방에서 새 문이 열리고 새 삶의 지평이 나타날 나이에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배회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처음 물장난을 쳤을 때의 느낌으로 되돌아가려고 한없이 (또 가망 없이) 애쓰기보다는 수영을 배우는 편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소설이나 연극이 제공하는 또 다른 개념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 홍역처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면 기존의 부부 관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저는 어느 정도 자란 남녀가 현실에서 이렇게 불가항력적인 열정을 느끼는 경우는 책에 나오는 만큼 흔치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인정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의미에서 그런 좋은 자질에 감탄하며 그 자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관계로 전환시킬 것인가 여부는 대부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머리가 온통 소설과 연극과 감상적인 노래들로 꽉 차 있고 우리의 몸이 알코올로

꽉 차 있을 때에는 어떤 사랑이든 다 '사랑을 느끼는' 관계로 전환시켜 버릴 것입니다.

길에 바퀴 자국이 있으면 빗물이 다 그리로 고이듯이,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것이 다 파랗게 보이듯 이 말이지요.

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두 가지를 구분하고 싶군요.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와는 별개로, 그리스도인들이 유권자나 의회 의원으로서 이혼 법률에 자신들의 관점을 반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노력해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혼을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회교도들이 누구도 술을 못 마시도록 법으로 금지한다면 적어도 저는 몹시 화가 날 것입니다.

제 의견은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회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두 가지 종류, 즉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엄밀하게 구별해야 어떤 부부가 기독교적 의미에서 결혼했으며,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은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영속성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이제 더 인기 없는 주제가 남았군요.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합니다.

또 기독교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하지요.

이 부분에서 분명히 제기될 질문들이 있습니다.

1) 도대체 머리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부부가 서로 동등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2) 설사 머리가 필요하다 해도 그것이 왜 꼭 남자여야 합니까?

(1) 기독교에서 가정에 머리가 필요하다고 보는것은 결혼이 영속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의 의견과 언제나 일치한다면 머리가 있을 필요가 없지요.

그리스도인 부부라면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의견이 갈렸을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일치점을 찾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사람밖에 없으니 다수결로 정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뿐입니다.

헤어져서 각자 제 길로 가든지, 아니면 둘 중 한 사람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이 영속적인 것이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둘 중에 한 사람은 결정권을 가져야 합니다.

헌법 없이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없는 법입니다.

(2) 그렇다면 왜 꼭 남자가 머리가 되어야 합니까?

우선 여성들 가운데 남편의 머리가 되기를 심각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이미 말했듯이 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자기는 가정의 머리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도 옆집 여성이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은 보통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 여성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불쌍한 아무개씨! 왜 저 지독한 여자가 자기 머리 꼭대기에서 설치게 내버려 두는지 모르겠네."

제 생각에는 그 여성 자신도 남이 자기를 그 가정의 머리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좋게 듣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내 자신들이 남편 위에 군림하는 일을 어느 정도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휘둘리는 남편을 경멸하는 것을 보면, 아내가 남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더 잘 보이는 이유이기 때문에, 독신자로서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가정과 바깥세상의 관계 -말하자 면 가정의 외교 정책- 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국은 남성이 책임져야 하는데, 남성은 가정 밖의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또 개개는 더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주로 자기 자녀와 남편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일을 하지요.

여성들이 자녀와 남편의 요구를 다른 모든 이들의 요구보다 앞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성은 자녀와 남편의 이익을 맡은 특별한 수탁자입니다.

남편의 역할은 이러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편애가 가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살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강력한 가족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후 결정권을 갖습니다.

이 이유가 의심스럽게 들린다면,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개가 옆집 애를 물었을 때, 또는 여러분의 애가 옆집 개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그 집 남편과 아내 중 누구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까?

또 결혼한 여성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남편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의 권리나 여러분의 권리를 바라는 만큼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남편이 약간은 유화론자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https://youtu.be/4MD3pdDWl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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