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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Lecture/김동호의 생사를 건 교회개혁

생사를 건 교회개혁#001 좋은 교회 만들기, 좋은 교회 만들기

by 마이코 2023. 10. 29.

제가 장기 하나가 없어요. 그 나중에 그 종합 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자기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더니 목사님 누구한테 신장 하나 주었어요 그러더라고요.
신장이 두 개잖아요. 그런 적 없다 그랬더니 왜 하나밖에 없다고 제가 신장이 하나밖에 없대요.

내가 모르니까 그런 일 없다고 그랬더니 한참을 보더니 아 여기 있기는 조그마한 거 하나 있네요.
그러니까 하나하고 하나는 생기다가 말았어요.
그랬는가 보다 했는데 그 고려대학교에 피난민들 난민들의 복원을 연구하는 학자가 계시더라고요.
아프리카 전쟁 난민들 이런 데 그 난민들의 자녀들에게 저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대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엄마가 뭘 먹어야 영양이 공급돼서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고 그러는데 그게 부족한 거예요.
그걸 만들기에 그래서 몸에 꼭 필요한 것부터 빨리빨리 만든대요.
뇌라든지 심장이라든지 없어선 안 되는 것들을 만드는데 심장은 하나만 있어도 되니까 미처 다 못 만들고 미루다가 그냥 내보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모험이 제 출생한 모험이 내가 얼마나 우리나라가 가난할 때 태어났는가에 산 증인이에요.
세계 최빈국이었잖아요. 세계 최빈국이었죠.
저는 그 어머니한테 업혀 다닐 때 기억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우리 어머니도 잘 안 믿어줬는데 그 내가 말할 줄 모를 때 듣기부터 하잖아요.
그게 기억이 좀 있어요.

근데 제가 돌 되기 전에 우리 집에 불이 나 가지고 판잣집 짓고 살았는데 판잣집을 하루 만에 짓는 판잣집이니까 비난민 난민 천막 같은 거죠 뭐.그런데 이불이 없었어요. 내가 그게 기억이 나요.덮을 이불은 있었는데 깔고 잘 요가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잤던 기억이 돌전이데 제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삶에서 시작을 했어요.
아이가 태어나서 보건 영양적으로 태어나서 1년의 역량이 평생의 건강을 좌우해요.
그런데 그 가장 중요한 때거든요. 그때 어머니가 젖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젖이 안 나오면 요즘 애들은 분유 먹으면 되지 그렇지만 그 분유는 부잣집 아들이나 먹는 거잖아요.
그건 아주 부잣집 아들이나 먹는 건데 제가 어렸을 때 그래서 쌀가루를 이렇게 갈아서 그걸 미움을 써서 먹었다 그래요.
살아있는 게 참 용다싶더라고요. 보니까 그건 진짜 영양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태어나서 1년 동안에 그걸 먹고 자랐으면 이게 살아있는 게 기적 같은 이나마 건강을 유지한다는 게 있을 수 없을 만큼 기적 같은 일이었는데 하여간 그런 데서 제 삶은 출발이 됐어요. 저희 아버지는 부두 노동자도 했었고 미군 부대 목수도 했었고 또 연탄공장 노동자도 했었고 저희 아버님이 저를 마흔여덟 살에 낳으셨는데 나 하나 살리려고 하여간 닥치는 대로 살았어요. 그러니까 참 책임감 있는 부모 만나는 게 내가 복이죠.

 

그러니까 그래서 저를 하여 먹여 살리셨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에 학교 수위로 취직되면서부터 삶이 안정됐어요. 매달 월급이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조마조마하지 않고 월급은 작았지만 계산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됐는데 그때 제 기억에 그게 그러니까 5,057년도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57년도에 우리 아버지 월급은 한 달에 7천 환이었어요.

난 그런 게 다 기억이 나요. 7천 환은 그때 화폐 단위는 원이 아니라 환이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인가 한참 후에 이제 화폐 개혁이 됐는데 10분의 1로 해서요.
그게 7천환이면 화폐 계획으로 되면 700원이 되는 거예요.
지금 단위로 얘기하면 하여간 그때 저희 아버지 월급은 한 달에 7천환이었고요.
그 당시 선생님들은 만 3천 환을 받으시더라고요.
선생님하고 수의 월급이 한 곱절 차이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7천환이면 쌀 한 가마 반을 사는 돈이었어요.

난 그런 거 얘기 재밌어. 그러니까 밥은 절대 안 굽죠 쌀을 한 가마 반이나 사니까 밥은 안 굽는데 하여간 돈은 없어요.
돈은 있을 수가 없죠.

 

그러면 이제 그럴 때 저희들이 살아남는 가장 좋은 도구는 공부를 잘하는 거예요.
그래도 한국은 아이가 똑똑해서 공부를 잘하면 기회가 있는 나라이잖아.
우리나라는 공부를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학교 공부도 저는 뛰어난 축에 들지 못했어요.

아마 우리 아이들한테도 얘기 이제까지 안 했었는데 그때 보통 한 반에 100명이 넘었어요.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 한 반에 100명이 넘었는데 그때는 100명 중에 10등 안에 드는 아이를 공부를 잘한다 그렇게 했어요.
10등 안에 들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데 한 번도 못 들어왔어요.

내 기억에 제가 제일 높이 올라갔던 때가 11등이었어요.
하나만 꺾었으면 됐는데 11등이 아마 최고 성적이었고 제가 기억하는 정확한 제 등급은 1415등 이게 2억원을 유지했으니까 못한 거는 아닌데 잘했다 공부 잘한다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제 그게 제 삶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지극히 평범한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갔는데 그 교직원 자녀는 학 등록금을 50%를 깎아줬어요.
수업료 나한텐 큰 돈이죠. 이제 그렇기도 했지만 더 정직히 얘기하면 소위 말하는 인류 중학교는 갈 실력이 되질 않아서 아마 갈 수 있었으면 빚을 내서라도 우리 부모님 보냈을 건데 거기도 못 가고 또 중학교 아버지 있는 학교 가면 등록금 싸게 해주니까 하여간 그래서 아버지 수여하는 학교를 다녔고 그 학교는 상업고등학교였어요.


상업 중고등학교 중학교는 일반 중학인데 고등학교는 상업고등학교여서 제가 상고 출신이 되었어요.
상고는 대학 진학에 목표로 하지 않는 학교예요.
아이들을 직업 훈련시켜서 제일 좋은 직장은 은행 가는 거 그다음에 회사 취직시켜주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우리 학교가 취업률은 꽤 높은 학교였는데 그래도 그 선거에도 보면은요 취직반이 있고 진학반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 저는 진학반에 갔었는데 결론을 얘기하면 상고 진학반에 가서 대학 갈 확률은 거의 없어요.

대학 가라고 가르키고 있는 학교가 아니니까. 그래서 하여간 어쨌든 대학도 떨어졌죠.
대학에 실패하고 그 바람에 취직도 제대로 못했죠.
난 취직하는 방으로 갔으면 은행은 아마 들어갔을 거예요.
또 은행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는 됐겠지만 은행도 못 들어가고 학교도 못 들어가고

그래서 결국 저는 세운상가의 오디오 파는 가게의 점원이 되었어요. 69년도였는데 첫 봉급이 7천 원이었어요.
석 달 지나니까 1만 원으로 올려주시더라고요. 이제 그게 이제 제 사회생활의 첫째 일이었어요.

가난한 학교 수위 무녀동남 외아들로 자라서 자라서 그랬는데 열등의식이 제법 있었고요.
가난한 데다가 아버지 학교 수이고 그러니까 뭐 조금 열등의식이 있었고 또 굉장히 좀 내성적이어서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위 말하면 못난이죠. 못난이에 적응 못하고 사람 보면 피하고 숨고 혼자 가만히 이렇게 지켜보고 그래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그래도 제가 바보는 아니고 게으르지 않았으니까 점원 노릇은 아마 잘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장사 배워가지고 조그만 가게 주인 노릇하면서 그리고 결혼하고 애 낳고 뭐 그렇게 살았어도 그게 뭐 루저는 아니거든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이제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

이제 제 인생에 대한 이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뭐 그렇게 살았어도 저는 잘 살았을 거예요.
뭐 그렇다고 못 사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삶을 보면 제가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건 저예요.
정은아 조그만 가게 주인 노릇하고 성실히 일해서 밥 벌어먹고 애들 공부시키고

뭐 그게 산 게 난 부끄럽다고 생각은 안 해요.
또 실패했다고도 생각 안 하겠지만 난 이제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그게 정상이에요. 근데 지금 내가 사는 삶은 그거하고 전혀 다른 삶이에요.
한 번도 꿈꿔본 적도 없고 욕심도 내본 적이 없고 난 이렇게 될 거야.
욕심 내본 적도 없고 바란 적도 없고 사실은 기도한 적도 없고 그랬는데 제 삶은

여기 왔나 이렇게 싶을 만큼 됐어요.
목사도 되었고 성격과 실력에 맞지 않는 큰 교회 목회도 했었고 제법 큰 일도 이것저것 많이 해봤고 목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가족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도 더 말할 것 없이 잘 풀렸고

그래서 요즘 제가 그 간증하고 다녀요.
굉장히 건방지고 위험할 수 있는데 다윗의 시편 23편이 늘 부러웠어요.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하냐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그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야 다윗은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하나 솔로몬도 못했는데

솔로몬은 훨씬 부자였잖아요. 그래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있다 소리 했는데 다윗은 넘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마음이 나도 그렇다.
내가 다윗의 복을 받았다. 그럴 만큼 복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보통 저 같은 복을 누리고 살려면 보통 상식은 금수저 부모를 만났던가 제가 쭉 얘기했듯이 그래도 똑똑해서 공부를 잘해서 인류 학교를 다닌다든가 뭐 인류 회사를 지나갔다든가 그래서 출세를 했다든가 그런다든가 아니면 성격이 활발하고 해서 사람을 잘 속여가지고 사람들 때문에 어떤 기회를 얻어서 했다든가

좋은 인맥을 쌓고 살았던가 그래야 되는데 저는 하나도 아니에요.
그 어떤 것도 맞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분명히 아는 게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래야만 잘 산다고 생각하는 건 다 속아서 사는 거다.
내가 증인이다. 내가 증인 난 그거하고 정말 애들 말로 일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타고난 것도 그렇고 내가 똑똑한 것도 아니고 성격이 저거한 것도 아니고 숨어 지내고 사람과 서툴고 그냥 조그만 데 구멍가게 하면서 그렇게 살면 제일 편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나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고 했던 삶을 지금 사는 걸 보면 꼭 그래야만 잘 산다라고 하는 생각은 나는 확실히 안 해.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지만 공부를 꼭 열심히 해야만 잘 사는 거 아니야 뭐 성공하는 건 좋지만 그래야 잘 사는 거다 이런 거를 깰 수 있었는데 그게 제가 증인이에요.
그리고 이제 가난한 것은 제법 가난했었는데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저는 굉장히 제법 가난했었는데 저는 불행의 추억이 없어요.
내가 불행했었다라고 하는 추억이 없어. 일도 없어요.

난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 삶의 환경이나 경제적이나 모든 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인데요.
그때를 돌아봐도 나는 행복했어요. 난 그때가 행복했어요.
지금 좀 여유롭게 사는 게 좋아요. 좋은 차 타고 사는 것도 좋고 넉넉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가난이 싫지. 그런데 가난이 절대로 무섭지가 않아요.
왜 그때 끔찍이 하나 했는데 그때도 재밌었거든 사는 게 행복했거든.
그래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데 다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제가 그냥 알아요.

그래서 그게 제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는지 몰라요.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아요.
그래서 저도 실제로 이해가 안 간다 그 얘기를 잘 해요.
그래서 제가 이제 날기새 하면서도 이제 자주 얘기했었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가요 김남정 선생님의 선물이라는 시예요.

내야 흑이 온데 밀랍비도 불켜시고 한평생 도리온 걸 옥에 문양 그으시니 난생 처음 이런 조화를 보겠네.
그거 꼭 내 얘기예요. 흙인데 밀랍비도 불태우시고 막 굴러다닌 돌인데 옥의 모양 그것이고 나를 나보고 옥이라 그러고 보물이라 그러고 보석이라 그러고

난생 처음 이런 조화를 보겠네. 그게 조화지 뭐.
그리고 찬송가 중에서 정말 정말 좋아하는 찬송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난 알 수 없도다가. 이게 제 가장 큰 심정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알아요. 난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알아요.
그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정하게 그 얘기를 했어요.

이해가 안 갈 만큼 삶의 큰 축복을 누리게 됐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살았는데 나는 이 복을 누리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게 됐는지를 저는 안 아주 확실하게 알죠.
저는 저 나름대로 정확하게 알아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근데 그냥 목사로서 늘 상투적인 말이에요.
상투적인 말로 들릴 말이에요. 거두절미하고 믿음이에요.
아무것도 붙일 필요 없어요. 설명할 것도 없어요.
거두 절묘하고. 난 내가 이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한테 믿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어요.

저는 사실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나님이 믿어졌어요.
이렇게 부인할 수가 없을 만큼 그러니까 내가 노력해서 난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조금도 의심 없는 그런 귀한 믿음을 갖게 됐어. 그 얘기도 아니에요. 그래본 적도 없으니까.

근데 저는 왜 이렇게 그런 믿음이 생겼는가 이런 복을 받을 만한 믿음을 내가 갖게 됐나 했더니 믿은 게 아니라 믿어줬더라고요.
정말 믿음은 선물이라고 그러셨는데 제가 그 선물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천하의 가장 귀한 것을 내가 얻은 거잖아요.
믿어줬으니까 믿어줬으니까 이게

그래서 하나님이 믿어지니까 뭐가 알았는가 하면 말씀대로 살아보는 게 저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믿어지는데 뭐 믿어지면 가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쉽지는 않았어요. 쉬워서 간 건 아니에요.
쉬워서 간 게 아니라 믿어져서 간 거예요.
그 말씀대로 산다는 삶이 저도 어려웠어요.

근데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해 힘든 건 사실이야.
이거 어려워. 가시밭길이고 좁은 길이고 십자가고 그건 다 느끼는데 이 끝이 좋다는 게 믿어지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요 그 믿어졌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남들은 포기하고 도망가고 그런 길을 나는 가게 됐단 말이에요.
근데 갔더니 맞더라고 그 길을 갔더니 다 맞아요.

다 맞는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믿어졌다는 그것인데 그러면 이제 또 궁금하죠.
김 목사는 어떻게 해서 그게 믿어졌을까 힘들고 어려운데도 의심이 안 가고 믿어줘서 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 길을 가서 저렇게 되게 잘난 척하네 할 만큼 저 자랑하고 앉았나 이제 그건데요.
그게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이제부터 얘기하려고 하는 핵심인데 교회 때문이에요.
제가 너무 좋은 교회를 다녔거든요. 너무 좋은 교회를 다녔어요.

그냥 교회가 아닌 좋은 교회 그냥 좋은 교회가 아니라 진짜 아주 좋은 교회를 다녔어요.
그게 제 평생의 최고의 복이에요. 그 복 하나 때문에 내가 어렸을 때 좋은 교회를 만나서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고 교회가 좋아지니까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교회가 좋아하니까 교회가 잘 믿어지는 게 설교 말씀이나 선생님이 가르키는 거 믿어지는 거야.
교회가 너무 좋으니까. 그래서 좋은 교회를 만나서 예 제가 믿음이 생겼어요.
그 교회의 이름은 제가 늘 자랑하는 청량리 중앙교회라는 교회였어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청량리 중앙교회를 다녔어요.

거기서 좋은 목사님을 만났어요. 임택진 목사님 평생에 좋은 목회자 하나를 만난다는 게 인생이 바뀌어요.
인생이 바뀌어요. 그래서 거기서 좋은 목사님을 만났죠.
임택진 목사님 거기서 좋은 장로님들을 만났어요.
장로는 저렇게 사는 거구나 하는 정말 모델이 될 만한 장로님을 만났어요.

김익명 장로님 이춘익 장로님 그런 분들을 신앙의 어른으로 보면서 자랐다는 게 제 인생의 큰 축복이 되었어요.
거기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화여대에 다니던 홍 선생님 이름은 잊어버렸어요.
홍 선생님 이제 돌아가셨는데 그다음에 강덕조 권사님 이런 분들을 만나서 교회 학교 다니고 했던 일이 자연석에 보복이 되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아주 좋은 친구들 평생을 같이 할 신앙의 동지인 친구를 만났어요.

김의명 이요일 신대철 이철주 먼저 하나님 앞에 갔는데 윤철명 이런 인생 최고의 축복들을 다 어디서 만났는가 하면 교회에서 만났거든요. 제 인생에서 교회를 딱 재끼면 아무것도 남을 게 없어요.
그리고 제 삶은 설명할 수도 없고 보장이 되지도 않는데 딱 하나

너무 좋은 교회를 만나서 내가 이 복을 받게 되었다 싶습니다.
세상에 학교는 참 많아요. 그런데 학교라고 다 좋은 학교는 아니에요.
좋은 학교가 있어요. 그래서 다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 하고 자녀들을 좋은 학교 보내려고 무진 노력을 해요.
무진 노력을 해요.

대치동이 왜? 땅값이 비싸고 아파트 값이 비싸요? 학군이 좋아서잖아요.
학군이 그러잖아요. 그건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미국도 사실 그래요.
중국도 마찬가지일걸 그래서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가 집값도 비싸고 그런 거예요.
그게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게 똑똑한 거예요.

여러분 좋은 학교에 있는 동네는 집값이 비싸야 돼.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그 가치를 안다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밥은 굶어도 애들 학교 보내려고 애쓰고 그러잖아요.
그것 때문에 한국이 이만큼 발전하게 된 거예요.
한국은 이렇다 할 만한 천연자원 없는 나라예요.

근데 우리가 이렇게 아까 제가 얘기할 듯이 신장도 하나 못 만들어낼 만큼 극빈의 피난민 생활을 하다가 당대에 내가 죽기 전에 70년 살았더니 세계에서 이제는 10등 안에는 들어가는 부여한 나라가 되었잖아요.
이런 거 있을 수 없어요. 세계 역사상 없는 거예요.
근데 그 이유가 교육 때문이거든요. 밥은 굶어도 애들 학교는 보내려고 그러고 좋은 학교 안 내려고 키쓰고 다니는 건데 그거 지혜로운 일이에요.

그런데 왜 좋은 학교에는 그렇게 욕심 내는데 좋은 교회는 욕심을 안 내냐 사람들은 좋은 교회에 대한 욕심이 뜻밖에 없어요.
밖에 없어요. 그냥 대충 좋은 교회 찾아요.
그래서 좋은 교회가 어디냐 물으면 대개 얘기하는 게 뭔지 아세요? 가까운 교회가 좋은 교회래 화가 나더라고요.
내가 그랬어. 난 서울대학 멀어서 가까운 대학 보내는 건 본 적이 없다 그랬어.

서울대학은 제주도에서도 쫓아다니면서 들어만 가기만 하면 제주도가 뭐야 어디서든지 스파의 소리를 대고 그러는데 교회는 그냥 귀찮으니까 가까운 데가 좋은 교회라고 가까운 데 좋은 교회가 있으면 좋은 거지.
그렇지만 가까운 데 있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고 그런 수준과 그런 욕심으로 교회를 찾으면 내가 단언하고 있는데 절대로 저 같은 복 못 받아요.

절대로 못 받아. 교회는 그렇게 흔한 게 아니라고요.
보석 같아서 찾아야지 기도하고 찾아야지.
여러분 결혼할 때 아무 남자하고 결혼했어요 아무 여자나 대충 골라서 알지 뭐 그러지 않잖아요.
고르고 골랐는데도 잘 못 고르는데

여러분 사실 결혼만큼이나 중요한 게 교회를 만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교회를 대해서 좋은 교회를 만나려면 좋은 교회를 공부해야 돼요.
볼 줄을 알아야 고르지 판단 기준이 있어야 고르지.
제가 이제 다음 시간부터 얘기하려는데 제가 2001년도에 노은트 숭의교회를 개척했어요.

개척할 때 제 목표가 좋은 교회였어요.
내가 좋은 목사님을 만났잖아요. 그래서 내가 좋은 목사님을 만나서 이런 복을 받았는데 나를 자기 교회 담임 목사로 만나는 우리 교인들이 내가 받은 복을 받게 해야지 그 마음이었어요.

내가 좋은 교회를 다녀서 복을 받았으니까 높은 뜻 숭의교회를 자기 교회로 삼은 백성들이 다 내가 받은 복을 받게 해야지 그게 그게 좋은 교회였어요.
근데 그게 안 풀려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몇 달을 좋은 교회가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좋은 교회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많지 그래서 좋은 교회를 정리하느라고 몇 달을 고생했었어요.

이 목회하는 목사도 그러고 목회를 했는데 교인들이 좋은 교회에 대한 좋은 교회 관이 정립돼 있지 않으니까 좋은 교회를 찾을 수도 없고 있어도 못 만나고 만나도 딴 데 가까운 데 찾고 이러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번 시간에 우리 좋은 교회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면 좋겠고 그런 교회를 찾기도 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를 그렇게 만드는 데 일조도 하고 그래서 나도 복을 받고 내 자녀들도 복을 받고 하는 그런 좋은 교회에 대한 안목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 공부를 하려고 이 아카데미를 시작을 했어요.

저희 높은 교회 이제 그런 교회 할 때 잘못하면 이제 건방져질 수 있는데요.
저희 교회는 굉장히 멀리서 다닌 교회들이 있었어요.
오늘 여기도 뭐 멀리서들 오셨네요. 근데 그게 난 옳은 자세라고 생각하거든요.
저희 교회는 부산에서 다니는 교인들이 있었어요.
몇 명이 있었어요 부산 매주일

재밌는 거는 집사님 중에 한 분은 토요일날 올라와가지고 구역장 노릇 다 하고 주일날 예배 들고 무슨 자동차 공장의 공장장 하던 집사님이셨는데 또 부산의 대학 교수하던 우리 여자 청년 하나도 늘 부산에서 ktx 돈 많이 벌어졌을 거예요.
부산에서 다닌 분들이 있었지. 속초에서 다니던 친구 하나 있었지.
이제 드디어 우리 교회 장로가게 될 나이가 됐어요. 광주 경기도 광주 말고 전라도 광주에서 매일 다녔지.
김천 구미 뭐 이런 데서 다니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내가 그랬어요. 나라도 난 그랬다. 우리 교회만 좋은 교회는 아니지만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생각이 들면 부산에서 와야지 차이 몇 번 든다고 다녀야지 그렇게 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은혜 받는 일에 놓치지 않아요.
차비가 얼만데 그걸 그나마 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다니는 거예요.

사실은 김천에서 다니던 교회는 하나가 있었어요.
제가 이제 가끔 설교하던 분인데 이제 고령 설렁탕 하던 집인데요.
그 집이 우리 교회 다니게 된 얘기는 참 웃겨요.
설렁탕집 하는 아인데 집인데 그 집의 막내 아이가 그때 6살이었어요.

가게 철렁당할 때 막내는 그 방에서 텔레비전 보고 엄마는 뭐 이제 엄마 아빠는 일하고 그러는데 그때 뭐 어느 방송에 이제 무슨 제가 강의를 했었어요.
기독교 방송 쪽에 6살짜리가 소리 질렀대.
엄마 엄마 이 목사님 강의 좀 들어봐.
너무 좋아. 6살짜리가 그래가지고 듣다가 서울 우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놈 지금 신학교에 다녀요. 그래서 이제 원

하여간 이제 그런 식으로 그랬는데 저는 여러분들도 교회에 대한 그런 욕심은 좀 가지시면 좋겠다.
그래서 좋은 교회에 대한 안목을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찾고 보석을 찾듯이 보물을 찾듯이 찾고

그리고 그런 교회를 찾으면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나도 희생하고 그 교회를 만들어서 지금보다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 내 자손들에게 후손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을 받게 하는 그런데 쓰임 받는 우리 아카데미 학생들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게 34년 전에 썼던 책이에요. 다음 시간에 좀 얘기를 하겠는데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교회가 좋지 않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그런지 몰라서 이걸 34년 전에 썼어요.
그래서 오늘 다시 강의를 하려고 그랬더니 감개무량하더라고요.
이때 이거 좋은 교회 한번 만들어본다.
그러다가 죽다 살았지. 근데 아까 시작하기 전에 잠깐 얘기했듯이요 이게 제 평생의 자랑이에요.

그래도 내가 좋은 교회 한번 만들어보려고 죽다 살았다.
그냥 편히만 살지 않았다. 제가 우리 교회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그러니까 높은 뜻을 얘기했 때 어떤 분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다 썼더라고요.
목사님도 고생해 보셨어요. 기가 막혀서 데리고 다녔지.
숫자만 많이 모이면 그냥 공짜로 이렇게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나도 교회 때문에 죽다 살았거든요.

근데 목회하는 목사로서 교회 때문에 죽다 살았던 경험이 있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래도 목사 다 왔잖아 이게.
그래서 이걸 지금 34년 만에 다시 이렇게 꺼내들면서 제가 굉장히 흥분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강의가 참 좋은 강의가 되면 좋겠고

조금이라도 여기 참여하는 분이나 또 이 영상을 보시는 분이 이걸 통해서 조금이라도 아 이게 좋은 교회구나 이런 교회를 다녀야 되겠구나 이런 교회를 만들어야 되겠구나 해서 우리 한국교회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오늘 첫 강의는 오리엔테이션처럼

왜 이 교회에 대한 얘기를 하는가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첫 시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