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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4-4 좋은 전염

by 마이코 2024. 8. 13.

 

이번 장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 보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책상 위에 책이 두 권 있는 데, 한 권이 다른 책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때 위 책을 위에 있게 해 주 는 것 -즉 지탱해 주는 것- 은 분명 아래 책입니다.

이를테면 위 책이 책상 표면에 닿지 않고 2인치쯤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래 책이 떠받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책을 A, 위 책을 B라고 합시다.

A의 위치는 B의 위치에 원인을 제공합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며 이제 그 두 책이 원래부터 계속 있었다고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럴 수 있다고-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에도 B의 위치는 언제나 A의 위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B가 이런 위치에 있기 전에 A가 먼저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대개는 원인이 먼저 있어야 결과가 나타납니다.

오이를 먼저 먹어야 그 후에 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모든 원인과 결과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왜 이 점을 중시하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정육면체가 하나의 입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이듯, 하나님은 하나인 동시에 삼위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설명하려면, 그 사이에 마치 선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들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위의 첫째 위를 성부 Father, 둘째 위를 성자 Son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첫째 위가 둘째 위를 낳는다 beget, 또는 생산한다 produce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만든다가 아니라 낳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첫째 위가 생산하는 것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말은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같은-인간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처럼-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것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이나 원인이나 기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중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자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자를 낳기 전에 성부만 계셨던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설명하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조금 전에 저는 책 두 권을 상상해 보라고 했고, 여러분 대부분 제 말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상상하는 행위를 했고, 그 결과 머릿 속에 그림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때 상상하는 행위는 원인이고 머릿속 그림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상하는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 후에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상상하는 그 순간, 이미 그림은 그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 그림을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적 행위와 머릿속 그림은 정확하게 같이 시작해서 정확하게 같이 끝납니다.

따라서 어떤 영구적인 존재가 영구적으로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영구적으로 하나의 그림을 산출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상상하는 행위와 똑같이 영원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등불에서 빛이, 난로에서 열이, 정신에서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이를테면 성자도 성부에게서 영구히 흘러나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자는 성부의 자기 표현 -성부가 하시는 말씀- 입니다.

그런데 성부가 말씀하시지 않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쯤에서 무언가 짐작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빛이나 열 같은 묘사는 자칫 성부와 성자가 두 인격이 아니라 두 물체인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성부와 성자'라는 신약성경의 묘사야말로 우리가 그 대체물로 만들어 낸 그 어떤 묘사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들을 제쳐두고 다른 것을 찾으면 언제나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몇 가지 특정한 사실을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동안 다른 묘사를 빌릴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 경우에도 반드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묘사하는 법은 당연히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 십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계보다 첫째 위와 둘째 위의 관계에 가깝다는 것을 아십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랑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기뻐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공경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이 사실이 갖는 실제적 중요성에 주목해 봅시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 적어도 두 인격이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까지는 사랑이셨을수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 아주 다른 뜻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진짜 속뜻은 '사랑은 하나님' 이라는 것이지요.

즉 사랑의 감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기든, 또 무슨 결과를 낳든 상관없이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사랑의 감정을 존중해야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할 때의 뜻과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생하면서도 역동적인 사랑의 활동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이 활동이 모든 것을 창조해 냈다고 믿습니다.

아마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중대한 차이점일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심지어 한 인격체로만 그치는 분이 아니라-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치 못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종의 춤에 가까운 분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연합은 그 연합 자체를 또 하나의 인격체라고 해도 될 만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인 줄 알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가족이나 클럽이나 노동조합으로 모일 때, 그 가족이나 클럽이나 조합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그들이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각 개인이 함께 모였을 때는 각기 따로 있을 때와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종의 공동 인격이라도 생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진짜 인격체는 아닙니다.

인격체와 비슷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 부분에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생명이 결합 될 때는 진짜 인격체,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3위 하나님이 실제로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셋째 위를 신학 용어로는 '성령', 또는 하나님의 ''이라고 합니다.

이것 (또는 이분)이 다른 두 하나님보다 다소 모호하고 막연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염려하거나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대개는 성령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령은 항상 여러분을 통해 움직이십니다.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 계시는 분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아마 제3위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쉬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인간을 통해 -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영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어온 사랑입니다.

,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과연 중요한 문제일까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pattern)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은 그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춤 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쁜 것뿐 아니라 좋은 것도 전염됩니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합니다.

몸을 적시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아무한테나 나누어 주시는 상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재의 중심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능력과 아름다움의 거대한 분수입니다.

그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물보라에 젖을 것이고,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메마른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어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삼위 하나님의 생명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제가 제41장에서 낳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에 대해 말한 내용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낳으신 존재가 아니라 만드신 존재입니다.

즉 자연 상태 그대로 있을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조상(이를테면)일 뿐입니다.

'조에', 즉 영적인 생명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바이오스', 즉 얼마 못 가서 소모되어 사라질 생물학적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든 생명이 아니라 낳은 생명,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가 성부를 사랑하시듯 성부를 사랑할 것이며,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제 표현대로라면 '좋은 전염'을 시키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https://youtu.be/HVIdQB4f-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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