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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4-2 삼위이신 하나님

by 마이코 2024. 8. 8.

 

지난 장에서 우리는 낳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은 아이를 낳지만 조상 (彫像)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낳으시지만 사람은 만드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지 사실, '성부 하나님이 낳으신 존재는 그와 똑같은 존재, 하나님' 이라는 사실만을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점에서만 보면 인간인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일과 비슷하지요.

그러나 아주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는 인격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을 뛰어넘는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개념을 제시해 있는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이 인격을 뛰어넘는 존재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비인격적인 존재, 인격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초인격적인 존재, 인격 이상의 존재를 찾는다면, 기독교의 개념과 다른 개념 사이 에서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초인격적인 신의 개념을 가진 종교는 오직 기독교 하나뿐이니까요.

 

또 어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은 이생을 거친 후, 또는 여러 생을 거친 후 하나님께 '흡수된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물질이 다른 물질에 흡수되듯이 우리 존재가 하나님께 흡수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일이 마치 방울이 바다속에 흘러들어가는 일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물 한 방울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만약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이와 같다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 흡수되는 동시에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 속에 이끌려 들어가면서도 어떻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있는지 (아니 사실은 전보다 훨씬 자기다워질 있는지) 설명할 있는 개념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신학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 속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을수록 우리 삶의 목적은 성취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잠깐동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공간 안에서 가지 방식 (앞뒤, 좌우, 위아래) 움직일 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이 세 가지 중 한 방향이거나 이 세 가지가 절충된 방향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3차원이라고 부릅니다.

, 보십시오. 1차원만 사용하면 직선밖에 그릴 수 없습니다.

2차원까지 사용하면 도형, 이를테면 정사각형을 그릴 있습니다.

그런데 정사각형은 선 네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볼까요? 여러분이 3차원까지 사용하면 이른바 입체, 예컨대 주사위나 각설탕 같은 정육면체를 만들 있습니다.

그런데 정육면체 정사각형 여섯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점을 아시겠습니까?

1차원의 세계는 직선입니다.

2차원의 세계에서는 직선도 그릴 있지만 여러 직선으로 도형을 만들 있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도형도 만들 있지만 여러 도형으로 입체도 만들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현실에 가깝고 복잡한 차원으로 올라간다고 해서 그보다 단순한 차원에 있는 것들을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단순한 차원에서는 상상할 없었던 방식으로) 결합시킬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인간적인 차원은 단순하며 어느 정도는 비어 있다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격은 존재이며, 인격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2차원에서(이를테면 종이 위에서) 정사각형은 도형이고, 정사각형은 별개의 도형인 것처럼 말이지요.

신적인 차원에도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체들은 차원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상상조차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격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보게 됩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지금 우리로서는 그런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없습니다.

2차원만 인식하도록 만들어 진 존재는 정육면체를 제대로 상상할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종의 희미한 이해는 얻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초인격적인 존재 (인격 이상의 존재) 대해 어렴풋하나마 구체적인 개념을 얻게 됩니다.

개념은 우리 혼자서는 도저히 짐작도 없는 것이지만, 일단 듣고 보면 '왜 미리 짐작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들어맞습니다.

 

여러분은 " 인격 (三位)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상상할 없다면, 그런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묻고 싶겠지요. 맞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속에 이끌려 들어가는 일이며, 일은 언제라도 (여러분이 원한다면 당장 오늘밤에라도) 시작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평범하고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지금 그는 지금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또한 하나님이심을,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이셨다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 바로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기 옆에서 기도를 돕고 계시며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지금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도록 밀어주고 있는 주체-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사람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내지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은 좀 더 높은 종류의 생명- 표현대로라면 조에, 또는 영적인 생명-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습니다.

 

신학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막연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미치광이로 쉽게 치부해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그가 죽은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작은 모임 내 지는 공동체를 이룬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들 안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인도해 주셨고,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살펴본 후에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정의 (定義) 도달했습니다.

 

정의는 우리가 만들어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경험 과학입니다.

단순한 종교들은 사람이 만들어 것들입니다.

제가 신학을 '어떤 의미에서' 경험 과학이라 것은, 신학이 어떤 점에서는 다른 경험 과학들과 비슷하지만 모든점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바위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라면 스스로 바위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바위는 제 발로 찾아오는 법도 없고, 여러분을 피해 도망치는 법도 없습니다. 주도권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바위는 여러분을 도울 수도 없고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동물학자로서 자연 서식지에 사는 야생 동물의 사진을 찍고자 한다고 합시다.

이것은 바위를 연구하는 일과 조금 다릅니다.

야생 동물들 역시 발로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여러분을 해 도망칠 수는 있습니다.

아주 살금살금 다가가지 않는 한 전부 도망쳐 버리겠지요.

이 경우에는 동물들에게는 아주 조금이나마 주도권이 주어질 여지가 있습니다.

 

단계 높여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알고 싶어한다고 합시다.

그가 단호하게 여러분의 접근을 거절할 경우, 여러분은 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를 알려면 먼저 그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경우에 주도권은 양측에 똑같이 주어집니다.

사람 원하지 않으면 친구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자 ,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는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찾을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많이 보여 주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편애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과 됨됨이가 온통 잘못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자신을 보여 주실 없습니다.

햇빛은 편애라는 것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거울에 비치는 밝기만큼 더러운 거울에 환히 비칠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다른 과학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여러분의 외부에 있는 것들 (현미경이나 망원경처럼) 반면, 하나님을 있는 도구는 여러분 자신이라고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가 깨끗하고 밝지 못하면, 하나님의 모습 또한 더러운 망원경 렌즈로 보는 달처럼 흐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끔찍한 민족들의 종교 역시 끔찍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렌즈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사람에게만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실 있습니다. 여기에서 참 다운 사람이란 단순히 선한 개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안에 연합되어 서로 사랑 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이 원래 의도하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악단에 모여 있는 연주자들이나 몸에 속한 기관들 같은 모습 말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배우기에 정말 적합한 도구는 다함께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과학 연구를 위한 기술 장비 (실험도구) 셈입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기독교 전통의 대체물이라며 년에 번씩 기발하고 단순한 종교를 제 멋대로 만들어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시간만 낭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도구라고는 아빠진 쌍안경 하나 달랑 있는 사람이 진짜 천문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모조리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몇몇 천문학자들보다는 똑똑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는 승산 없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관한 기억들은 2년만 지나도 잊혀지겠지만, 진정한 천문학은 여전히 건재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가 만들어 것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성이라는 점에서는 새로이 종교를 창안해 내는 사람들과 경쟁할 없습니다.

어떻게 경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사실' 다루는데 말입니다.

신경 써야 '사실' 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단순해질 있겠지만 말입니다.

 

https://youtu.be/8tC0WbdpxBs?si=e9z4Re0O1PHO-z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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