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은 신학적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영원한 세계를 계속 바라보는 일은 도피주의나 몽상의 한 형태 (어떤 현대인들의 생각처럼)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전환하는 데 토대를 놓은 사도들이나 중세를 확립한 위대한 인물들,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지구상에 이 모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이상한 법칙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와 유사한 법칙이 적용되는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강은 큰 축복이지만, 건강을 직접적으로 주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노상 어디가 병들지나 않았나 노심초사하며 까다롭게 살피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건강은 오히려 다른 것 (음식, 운동, 일, 오락, 신선한 공기)을 추구할 때 더 쉽게 얻어지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문명 자체를 주된 목표로 삼는 한, 문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명 이상의 것을 바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천국'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 대부분에게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고작해야 '천국에 가면 세상 떠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지요.
이렇게 천국을 바라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그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전부 이 세상에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천국을 정말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조차 우리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사실, 그것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 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거나 처음 이국(異國)을 그려 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이나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흔히 말하듯 그 결혼이나 휴가 여행이나 배움이 성공적이지 못할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결혼이나 여행이나 배움이 최고의 것일때에도 그렇습니다.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현실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입니다.
아내가 훌륭할 수도 있고,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잘못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과 올바르게 대처 하는 한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 어리석은 사람이 택하는 방식
이런 사람은 모든 탓을 환경에 돌립니다.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더 호화로운 여행을 하는 등등의 일을 하면 그때야말로 모두가 추구하는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보냅니다.
권태와 불만에 빠져 사는 대부분의 부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하지요.
그들은 늘 이번에야말로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매번 실망을 거듭하면서,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이혼 절차를 밟아가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 취미에서 저 취미로 옮겨 다니느라 전 생애를 탕진합니다.
2)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식
이런 사람은 모든것이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려 버립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법이지. 하지만 내 나이쯤 되면 무지개 끝을 좇는 일 따윈 그만두게 된다구."
그는 현실에 안주한 채 매사에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환상을
좇는데' 쓰이는 기능을 억누릅니다.
이것은 물론 첫째 방식보다는 훨씬 나은 것으로서, 자신은 더 행복하고 사회에는 해를 덜 끼칩니다.
이런 사람은 남보다 나은 인물인 양 행세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자기가 '철부지' 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다소 우월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대체적으로 그런대로 무난하게 지냅니다.
인간이 영원히 사는 존재만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행복이란 것이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지개 끝에 도달하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제서야 (죽은 후에야)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능을 스스로 가정해 놓은 '상식'으로 억눌러 없애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겠지요.
3) 그리스도인의 방식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를 채워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해.
아이는 배고픔을 느끼지. 그러니까 음식이란 것이 있잖아. 새끼 오리는 헤엄치고 싶어 하지. 그러니까 물이란 것이 있는거고. 또 사람은 성욕을 느껴. 그러니까 성관계란 것이 있잖아.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얘길 거야. 지상의 쾌락으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없다고 해서 우주 전체를 가짜로 볼 수는 없어. 아마 지상의 쾌락은 처음부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긴 게 아니라, 다만 이 욕구를 일깨워 주고 진짜 쾌락이 어떤 건지 암시해 주려고 생긴 걸 거야. 그렇다면 한 편으로는 이 지상의 축복들을 반갑잖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쾌락들이 복사판이나 메아리나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지.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는 욕구는 죽은 후에야 채워질수 있는것이니만큼, 이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겠다. 이 욕구가 다른 욕구에 짓눌리거나 밀려나지 않게 하자. 나 자신이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일을 내 삶의 주된 목표로 삼자."
"나는 영원토록 하프나 타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면서 그리스도인이 가진 '천국'의 소망을 우습게 만들려는 경박한 이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전혀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른들의 책을 읽는 법도 모르거든 잠자코 있기나 하라고 말해 주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들 (하프, 면류관, 금 등)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동원된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 악기가 나오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황홀감과 무한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암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은 하나님과 영원히 연합된 사람들이 그의 광채와 능력과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금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 천국의 영원함과 (금은 녹슬지 않으므로) 귀중함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비둘기처럼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을 낳으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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