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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3-12 믿음(2)

by 마이코 2024. 7. 17.

모든 사람이 주의했으면 하는 사항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그 주의사항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이 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다루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냥 건너뛰십시오.

전혀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기독교 밖에 있을때에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길을 어느 정도 걷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아주 많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완전히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특정한 갈림길과 장애물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 주는 지침들이므로, 그런 갈림길이나 장애물에 부딪쳐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기독교 서적들을 읽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마주친다 해도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부분은 읽지 말고 그냥 넘어가십시오.

아마 몇 년쯤 지나면 그 뜻이 갑자기 이해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오히려 미리 아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 수준에 넘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도달하지 못한 지점인데도 이미 도달한 것처럼 착각했을 수도 있지요.

그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본 후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를 부탁할 뿐입니다.

다른 분들도 제 말을 깎아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옳다고 확신해서 드리는 말이라기보다는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드리는 말로 들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저는 두 번째 의미의 믿음,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의 믿음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바로 전에 말했듯이, 이 두 번째 의미로서 믿음의 문제는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 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가진 피조물이 되느냐

(그의 의도에 맞는 피조물이 되느냐, 일정한 방식으로 그와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제가 '다른 피조물들과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퀴 살들이 바퀴 축과 테두리에 제대로 끼워져 있기만 하다면 다른 살과의 간격도 자연히 바르게 조정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틀림없이 동료 피조물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시험지를 내주는 시험관이나 일종의 거래상대로 생각하는 한

(하나님과 자신을 서로간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관계로 생각하는 한)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롭게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정한 신앙교육을 받는 아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우리가 그나마 받은 것을 다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발견이란 그렇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사실임을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지켜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해 보는 것 (그래서 실패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로는 뭐라하든, 마음 한구석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음번에는 완전히 선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늘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노력은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그 지극히 중대한 순간까지만 우리를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은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털썩 주저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 지점이 얼마나 가까이 왔나 확인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대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나중에 뒤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이게 바로 키가 자란다는 거로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한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언제 잠이 오나 초조하게 신경 쓰는 사람은 밤새도록 잠 못 들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이런 일은 성 바울이나 존 번연의 경우처럼 꼭 급작하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이 일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심지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본질 그 자체이지, 변화가 일어날 때의 느낌이 어떠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저도 알지만, 그 문제는 잠깐 내버려 두기로 합시다.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모든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게 해 주신다는 사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표현대로 그는 자신의 '아들 됨'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실 것이며, 우리를 그분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말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제4부에서 좀 더 깊이 다룰 생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거저 주신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모든것을 거저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지금껏 해온 모든 일과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좋은 점만 보시고 나쁜 점은 눈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유혹을 이기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전에는 (항복하기 전에는)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력을 포기하는' 방식과 이유가 합당하려면 그 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 모든것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은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을 그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 가기를 바라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희미한 첫 빛줄기를 마음으로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행위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이런 논쟁이 가위의 양날 중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를 따지려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사람은 도덕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 봐야만 항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m6H84hp0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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