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Faith)'이라고 부르는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두 가지 의미 또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두 가지를 차례대로 다루려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단순히 '신념 (Belief, 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간단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것 (적어도 예전에 저를 당황케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첫 번째 의미의 믿음을 하나의 덕목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덕목이 될 수 있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일련의 진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도덕, 부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저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떤 진술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 증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 증거의 충분성을 잘못 판단했다면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다지 명석하지 못하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또 증거가 충분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믿으려고 애쓰는 이가 있다면 그저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하면 그만입니다.
글쎄요.
이런 입장 자체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몰랐던 것 (지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인간의 정신이 한 번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재고하게 만드는 대단한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그 믿음을 견지하게 마련'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인간의 정신은 전적인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제 이성은 마취를 한다고 해서 사람이 질식하는 것은 아니며 잘 훈련된 의사들은
제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절대 수술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한 증거를 통해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저를 수술대 위에 눕혀 놓고 그 끔찍한 마스크를 씌울 때면, 속에서부터 아주 유치한 공포심이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로 마취되기도 전에 칼을 대지는 않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지요.
다시 말해서 마취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제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 있습니다.
정작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의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한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남자가 아주 충분한 증거를 통해, 자기가 아는 예쁜 아가씨가 거짓말쟁이에다가 비밀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정작 그 아가씨를 만나는 순간, 그의 정신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서 '설마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털어놓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맙니다. 감각과 감정 때문에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수영을 배우고 있는 소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이성은 사람의 몸은 무엇으로 떠받치지 않아도 물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물에 떠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수십 명이나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수영 강사가 잡고 있던 손을 놓은 후 혼자 물 위에 떠 있어야 할 때에도 계속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순간적으로 믿음을 잃고 겁에 질려 가라앉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은, 잘 추론해 본 결과 기독교를 믿을 증거의 무게가 충분치 않은데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이성이 일단 그 증거의 무게가 충분하다는 판정을 내렸다고 합시다.
저는 그 후 몇 주 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쁜 소식이 들리거나 어려움이 생기거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면, 느닷없이 이런 저런 감정들이 들고 일어나 그의 신념에 일종의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여자를 찾고 싶거나 거짓말을 하고 싶거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들거나 조금만 부정직하면 약간의 돈을 벌수 있는 기회가 보이는 순간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즉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아주 편했을 상황들이 닥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바람과 욕구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또 한 번 전격적인 공격을 해올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반대되는 새로운 이유들이 등장하는 순간들과는 다릅니다.
그런 순간들에 대해서는 따로 직접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기독교에 반대되는 기분이 드는 순간들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 (art)입니다.
기분은 이성의 생각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 저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모든것이 도무지 사실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 시절에는 기독교가 정말 사실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분은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에 반기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믿음이 필수 덕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분을 '어디에서 하차시켜야 하는지' 모른다면 건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건실한 무신론자도 될 수 없으며, 그날의 날씨나 소화 상태에 따라 신념이 좌우되는 줏대 없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습관을 들이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데도 정신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이제 믿음의 두 번째 의미,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다룬 주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겸손의 주제로 되돌아감으로써 여기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겸손해지는 첫 단계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거기에 '그다음 단계는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해 보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일주일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여섯 주 동안 해 보십시오. 그쯤 되면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거나 오히려 그 이하로 추락한 자신의 모습에 부닥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유혹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요즘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유혹에 맞서 싸워 본 사람만이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압니다.
독일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려면 항복할 것이 아니라 싸워 봐야 합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알려면 누워 있을 것이 아니라 바람을 거슬러 걸어가 봐야 합니다.
고작 5분만에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은 그 유혹이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악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늘 악에 굴복하여 그 그늘 아래 삽니다.
그러나 악한 충동과 싸우기 전까지는 결코 그 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유혹에 무릎 꿇지 않았던 유일한 인간이며, 따라서 유혹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 (유일하게 완벽한 현실주의자, realist) 입니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기독교의 덕목들을 진지하게 실천해 보고자 할 때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신 일종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생각은 깨끗이 털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생각 (우리는 우리 편의 계약 사항을 준수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께도 하나님 편의 계약 사항 준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시험이나 거래에 관련된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을 때 처음 생기는 일은 그런 생각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한테 기독교는 끝났다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주 단순한 분으로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생각을 산산조각 내는 것은 본래 기독교가 수행하게 되어 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시험에 통과할 점수를 따거나 하나님께 권리 주장을 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을 발견하는 이 순간을 기다리십니다.
그럴 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매 순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섬기는데 바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원래 그분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 어떤 일과 비슷한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아빠 생일 선물 사게 6펜스만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돈을 줄 것이고, 그 돈으로 사올 아이 선물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착하고 바른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 거래를 통해 6펜스의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할 바보는 없습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때에야 하나님은 실제로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C.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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