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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기독교 핵심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려드립니다ㅣ기독교 교양 사전 365

by 마이코 2023. 12. 5.
 

성서와 기독교, 예수님의 역할은?

성서는 복음서와 신학성서로 구성되어 있어요.

복음서 에는 예수의 일대기에 관한 내용이, 사도행전은 예수의 죽고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활동을 다루고 있으며, 서신서는 개신론과 히브리어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요.

성서는 한 인물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네권의 책'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기독교는 '털을 살피는 종교'라는 뜻이며, 예수는 구세주로 여겨지며 죄인들을 의도적으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일컫어요.

구약성서의 구성은?

역사서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있고, 시와 지혜서에는 시편과 지혜서 관련된 책들이 들어가요.

예언서에는 주로 예언자들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구성되며, 탄핵과 구약성서는 같은 내용이지만 사용 목적이 다르다는 점이 있습니다.

또한 구약성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용되며, 유대교와 공유하는 부분이 구약이고, 기독교의 토대가 되는 책은 신약입니다.

성경의 작가와 책의 배열 순서에 대해 알려주세요.

성경의 각 책의 작성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9명 이상의 작가가 작성했다고 합니다.

4권의 복음서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판단에 따라 쓰인 순서대로 배열되고, 빌레몬서까지 바울의 편지는 긴 순서대로 배열됩니다.

대체로 50-60년대에 작성된 편지들은 복음서보다 먼저 작성되었으며,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편지들의 배열 순서는 대체로 길이가 긴 것부터 짧은 것 순으로 배열되지만, 예외적으로 길이가 긴 요한게시록은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성서의 특징과 의미는?

신약성서는 1세기 이전에 27권의 책으로 저술되었어요.

각 책의 저자와 시기에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합니다.

자신에게 적힌 책인지, 누구에게 쓰여진 것인지에 따라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으며, 책의 형식도 다양합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일대기,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의 활동, 서신서는 바울과 제자들의 편지, 그리고 요한 게시록은 환상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필사본을 통해 현재 5000개 이상이 남아있으며, 이를 토대로 원본을 축적하여 오늘날의 신약성서를 구성합니다.

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명확하게 말해주는 매체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개시와 영성이란 무엇인가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개시는, 배경이 되어주는 자연, 성서, 예수 그리스도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자연은 모든 사람이 열려있는 방법으로,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스스로를 알리게 한답니다.

또한, 영성이란, 성령을 따르는 생활로, 신의 영을 따라서 삶을 통합시키는 것을 뜻해요.

이는 라틴어로 '스피릿두 알리타스(spiritus alitas)'로 성령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기독교적 삶의 원천인 예수의 영 안에서 생명이 강화된 것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란 몸과 마음이 상호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인 성격을 가진 것과, 우리 삶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모든 존재와의 관계에서 영성을 이루는 총체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뜻합니다.

참된 영성으로는 마음과 몸, 역사와 사회, 정치와 경제, 아름다움과 지혜, 지성과 감성 등 여러 차원을 통합하여 이해합니다.

이러한 영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사는 것, 자신의 세계에 빠져 만족하는 것은 영성이 아니라고 해요.

그리스도인의 경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결국 예수를 닮아가며 자유, 사랑, 공의, 평화와 같은 가치를 전파하는 창조적 변혁을 이루려 하죠.

또한 오경(例經)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뜻하며, 이는 영성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의 일부분입니다.

모세의 역사가 다루는 내용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모세의 역사는 창세기 이야기의 시작은 산세에서부터 시작되어, 배신 사건,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이 전역사로 불립니다.

럴라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해당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히브린이라 불리는 백성들의 이야기는 출애국기부터 시작해 세어보는 일 등 광야에서의 생활을 다루며, 제사와 관련된 역할을 맡았던 레위 후손의 이야기는 레위기에 담겨 있습니다.

민숙이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은 에피소드가 담겨 있고, 식물성 요리금지, 육성절, 부활절 등 기독교의 기본 규정 출처인 구약성서 '토라'는 이 다섯 권의 책을 대표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유대교의 토라는 모세가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것을 뜻하며, 살인하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의 규칙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총 616개의 율법 중에서 출애국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네 권의 책에서 발견됩니다.

반면, 기독교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이치와 원리를 가르치며, 다른 종교들과 다르게 믿음과 고백의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란?

기독교 교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차이점과 독특성을 변호하고 변증하여 창조, 종말, 예수, 교회, 인간 등의 내용을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또한, 3위일체 하나님의 속성, 창조와 종말, 개시,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인간 등 다양한 주제를 정리하고 형성하여, 기독교 정체성을 선언하고 창조하는 역할을 해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책 형태의 전기로서, 나사리 예수의 일생, 그의 행적 및 가르침,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등을 담고 있어요.

복음서들의 다양성과 공관복음에 대해

Matthew, Mark, Luke, & John 복음서는 같은 인물과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일부분이 다르죠.

예를 들어 예수가 채용된 날짜, 재판, 대화, 부활에 대한 내용 등이 각기 다릅니다.

또한, Matthew, Mark, & Luke 세 권을 묶어서 부르는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있다고 하는 반면, John 복음서에는 예수의 뜻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네요.

성서와 복음서의 기록 순서와 내용 설명

마르코 복음서가 기록된 복음서의 첫 번째이며, 베드로와 함께 일했던 마르코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돼요.

마르코 복음서를 바탕으로 후반부는 '마태 복음서'와 '누가 복음서'가 작성됐어요.

이는 십자가에서 부활까지를 다루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어요.

세 계신 하나님인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보금서는 예수의 목소리와 함께 있으며, 하늘에 계신 예수와의 관계를 형상화해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 인간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혜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 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어요.

성경의 지혜서란?

성경의 지혜서는 성경에 대한 이해도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담은 책이에요.

규범적 지혜와 회의적 지혜로 나누어지며, 규범적 지혜는 여러가지 선택과 갈등에 대한 판단과 이해를 돕아요.

규범적 지혜에 따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명확해 대부분의 경우 선택하는 것이 쉽지만 때로는 고민과 갈등을 초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성경의 지혜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용서에 관한 깊은 생각과 더불어 무작정 규범에 따르지 않고 화합과 태평을 이루는 길을 제시해줘요.

그래서 지혜서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삶의 지혜와 희망을 줄 수 있어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전도서의 지혜의 차이는?

규범적 지혜가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는 반성적 지혜에 대해 설명해요.

이 반성적 지혜는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혜로, 이는 규범적 지혜의 패턴에 어긋나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삶이 짧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해요.

잠원, 욕기, 전도서는 한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처럼, 규범적 지혜에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지혜의 단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긴 시간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인간의 삶은 잠깐 스쳐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요.

성경의 지혜는 왜 규범과 예외를 모두 담고 있는가?

학교 졸업 후 세상에서 경험을 하다 보면, 규범적인 지혜만으로는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요.

사람들은 각자가 신앙의 여러 단계를 겪고, 각각의 단계에 맞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돼요.

그래서 성경의 지혜는 규범과 예외를 모두 담고 있지만, 각각의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되지 않을 경우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져야 해요.

따라서 초보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규범적인 문장을 가르치는 것도,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예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요.

죽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고 생각되며, 성경의 지혜는 삶에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만 삶과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귀중한 자원 이라고 생각돼요.

교양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교양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에 대한 지식과 역량을 쌓는 일을 뜻합니다.

교양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인이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과 같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빚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제 전문 회계사에서 교양을 접하게 된 존청은 자신감을 길러나면서 세법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교양은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며, 자신의 제한된 인식과 경험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양의 요소로서 역사, 대화, 소통이 필수적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지혜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술과 역량입니다.

기독교 경전 '성경'의 이름 유래는?

'성경' 또는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가리키는 용어예요.

처음에는 '성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성경'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현재 '성경전서'는 공식적인 명칭이며, 이를 줄여서 '성경' 또는 '성서'라고도 부릅니다.

영어에서는 '바이블'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며, 원어에서는 도시 이름인 '비블로스'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러나 처음엔 '비블로스'는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던 도시 이름이었답니다.

파피루스와 캐논의 역사는?

'카논'이란 단어는 표준, 법전, 규범을 의미하기도 하며, 본래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유래해요.

지금은 '캐논'으로 불리는 성서가 만들어질 당시 파피루스 생산의 중심지였구요.

4세기에 '카논'은 기독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단어로 사용됐고,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 된 거죠.

오늘날 '캐논'이란 단어는 표준 법령과 같은 뜻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로 인정 받은 공적인 문서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외경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정경인 66권 외에도 구약과 신약에 외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구약의 외경은 히브리어 원본에는 없지만 그리스어 ‘70인 역’번역서에 포함된 문서들을 뜻하며, 신약의 외경은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을 뜻한다.

이외에도 기독교 초기에는 다른 문헌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또한, 유명한 비유 중 하나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는 능력이 기독교 영성에 있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있어요.

성서에서 참된 공감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스플랑크 니조마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여 사마리아인이 느낀 마음을 표현해요.

스플랑크 니조마이는 '같은 고통을 느끼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등한 인간으로서 상대의 고통을 함께하는 참된 공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가지고 사랑과 동정심을 전하며, 성경적으로 인정받는 참된 공감을 보여주고 있죠.

이렇게 공감은 소외되며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해 나타나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으로부터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어요.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을 프로페테이야, 예언자를 프로페테스라고 해요.

이것은 공간과 시간적인 의미를 가진 프로와 페미동사로 이루어진 단어에요.

예언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라는 시간적 의미와, 누군가 앞에서 말하거나 고하다는 공간적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어요.

이는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왔으며, 성경에서 묵시를 통해 예언도 함께 전달되었답니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독교에서도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해요.

성서적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이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성서에서 맞길 예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할 거에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그 의미?

구약성서에는 예언자들을 가리키는 여러 히브리어 표현이 있어요.

예를 들어, '로에' 혹은 '호제'는 '환상을 보는 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섭리를 전파해요.

성서는 예언자의 역할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듣고 따르며 행복을 누리도록 구원의 계획을 선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경에 예언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언어적 특징은?

히브리어는 대부분의 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언어예요.

그중에서도 일부 장에서는 아카드어, 일부 장에서는 아람어가 사용됐어요.

'샘조거'라는 어근을 기반으로 언어가 형성되어, 모음을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언어군이에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어휘, 문법에서 유사하지만, 완전하게 상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아람어와 히브리어 모두 사용 가능한 역사가 있었어요.

'샘조거' 언어군에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제국의 언어인 아카드어,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아람어, 고대 페니키아어, 그리고 현대 중동의 아랍어가 있어요.

고대 이스라엘 히브리어 언어의 변천사는?

히브리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쓰인 언어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예요.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문법과 어휘면에서 변화가 있었어요.

성경 안에서도 초기 히브리어, 중기 히브리어, 후기 히브리어로 나눠볼 수 있을 정도로 변화가 나타나죠.

또한, 아라머라는 공용어의 영향도 받았고, 문법 구조도 변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도 히브리어로 쓰이고 말하는데 그것을 현대 히브리어라고 해요.

히브리어가 대표하는 성경 언어.성경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의 차이는?

현대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언어로, 성경 히브리어와의 연속성이 존재해.

성경 히브리어는 BC 6세기 이후 일상 언어지위를 잃고, 라비 히브리어, 이리시 등의 언어와 혼합돼 현대 히브리어를 창시해.

성경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는 초록 생존함을 나타내며, 현대 히브리어는 성경 어휘를 최대한 반영했지만 문법적 차이는 많아요.

신약은 유대인들의 언어 히브리어 대신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를 비롯한 조직당 선도자와 그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의 전통적인 언어인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대화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영어나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도 처음부터 해당 언어로 기록된 것은 아니며,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아람어로 이어졌으나, 신약은 그리스어로 기록됐어요.

로마의 지배하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언어는?

로마는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며, 로마와 헬라 제국의 악티움 회전에서 로마의 승리로 인해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며 라틴어가 공용어가 되었어요.

로마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그리스어 문화에 열광하던 로마인들은 라틴어로는 기록되지 않았던 신약성경을 그리스어로 기록하게 되었어요.

결국 로마는 그리스를 포함한 헬라 제국들을 모두 정복했으며, 그리스어는 계속해서 문학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신약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된 문서와는 달리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답니다.

그리스어의 역사와 변천사는?

그리스어는 원시 그리스어부터 고대 그리스어, 고전 그리스어, 그리고 중세 그리스어까지 변천해왔어요.

고대 그리스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사용한 언어였죠.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정복 이후에는 그리스어가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정복된 지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어요.

성경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고레벨이 아닌 언어로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어요.

성경은 다른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오늘날에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어요.

기독교와 유대교의 예언서 분류 차이점은?

예언서는 구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자들의 책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예언서를 다르게 분류합니다.

기독교 성서에서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등 17권이 속하며,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를 구분하곤 합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기독교 예언서뿐만 아니라 여우수화서부터 말라기서까지의 책들도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또한, 기독교 성서에서는 예레미야 애가와 단 책은 히브리 성사의 예언서에서 제외되지만, 유대교에서는 이 책들도 포함된다고 해요.

따라서 두 종교의 예언서 분류는 구약성서의 주제와 성격, 정경화된 시기 등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기독교 교양학회의 프로젝트 365의 목적은?

기독교에 대한 사전적 지식 전달을 목표로 한 기독교 교양학회의 프로젝트 365입니다.

기원과 역사부터 현재까지의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지식 습득을 추구하며, 옳지 않은 기독교의 사용과 원론을 바로잡고 자유롭고 편안한 사용을 허용합니다.

교회, 학교 및 시민단체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할 수 있으며, 연구 노하우를 접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https://youtu.be/lBI8OU5z4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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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이렇게 두껍지만 그중에 신학성서는 이렇게 얇아요. 이 얇은 책이 놀라운 점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금서에는 예수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고, 사도행전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이후에 제자들이 활동했던 이야기이고 그리고 서신서는 개신은 예언이란? 기독교 영성은? 히브리어는?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이 보금서에 또 다른 특이점이 있는데, 그거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곤의 책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내곤의 책은 프로테스탄트, 곧 개신교는 1884년을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오랜 동안 연구한 수준 높은 학자들이 기독교의 중요한 요거나 개념을 쉽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아가 그간 흐트러지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들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대학교나 중고등학교 그리고 시민단체 또 교회에서 가릴 것 없이 자유롭고 편하게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는 한자어입니다. 기는 털을, 독은 살펴보다를, 교는 가르침을 뜻하지요. 그것을 모아보면 털을 살피는 종교라는 말이 됩니다. 그 자체로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은 의미가 아니라 헬라 오 크리스토스와 그 단어에 해당하는 서구 언어, 특별히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크리스토를 음력한 한자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라고 쓰지요. 그리스도는 키리오스의 형용사이며,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근간이 되는 분이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으 이 세상에서 셀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에 기대하여 삶을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갈 경우, 죄와 더불어 괴로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시며, 우리가 삶에서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살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새로운 세상과 무한한 삶을 얻는 것입니다.
발음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라고' 써서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일종의 변형을 겪은 것입니다. '기독'이 그리스도의 음역이니 기독교라고 하면 그리스도교와 같은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또는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뜻은 자연스럽게 서방교회인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곧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를 모두 포괄하는 말입니다. 근래에는 기독교라는 말로 개신교만을 지칭하는 흐름이 있는데, 그 말의 연언을 따지고 엄밀하게 보면 잘못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이름입니다. 모두 39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모두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순서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부분은 5경입니다. 장세기부터 시작해서 추래국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 5권의 책입니다. 이 책들은 가장 먼저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고요. 구약성서 안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역사서 둘째 부분은 역사서입니다. 여기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책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수아, 사사기, 루기, 사무엘 상하, 열한기 상하, 역대 상하, 에스라, 니헤미야, 에스떠라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난한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왕국을 세우고 그 왕국이 분열하고 망하고 쫓겨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돌아올 때까지, 기원전 13세기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6세기까지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그런 책들입니다.
셋째 부분은 시와 지혜서입니다. 시가 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혜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다섯 권의 책이 있는데요. 욕기,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입니다. 이 책들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의 출생순으로 배열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과 관련이 되어 있고요. 그다음 잠언, 전도, 아가서는 주로 솔로몬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책이 아들의 책보다 앞에 나와 있는 거죠..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예언서입니다.  예언서 중에서도 주로 분량이 많은 책들이 앞에 있고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에가, 에스겔, 다니엘입니다. 그다음에 분량이 적은 호세야부터 말라기까지 12권의 예언서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가는 예언서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통적으로 예레미야가 저자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여기에 위치하고 있고요. 그리고 다니엘도 엄격히 말해서 예언서가 아니라 묵시 문학이지만요. 묵시 문학이 예언 문학 다음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여기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이 구약성서의 원래 이름은 탄학입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탄학이라고 하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탄학의 TNK는 각각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첫 글자입니다. 탄학에서는 각 부분이 이 순서대로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내용을 살펴볼까요? 첫째 부분은 토라에요. 토라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오경과 일치해요.
둘째 부분은 예언서입니다. 이 예언서는 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전기 예언서고 다른 하나는 후기 예언서입니다.
전기 예언서에는 여호수와 사사기, 사무일상하, 열한기 상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게 역사서에 포함되는 책들인데요. 탄학에서는 예언서로 구분을 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도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기 예언서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 세 권의 대예언서하고 호세야부터 말라기까지 12권의 소예언서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성문서입니다. 성문서에는 나머지 책들이 전부 다 포함됩니다.
이 성문서를 대표하는 책은 시편입니다. 누가 보고 24장 44절 그리고 45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런 표현이 나와요.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율법서를 말하고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하고 시편은 성문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탄학을 말하는 것이고요..
탄학과는 다르게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전제로 하는 이름입니다.  비록 내용은 동일하지만 탄학은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이름이고 구약성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은 공직적으로 구약과 신약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구약은 유대교하고 공유하는 부분이고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든 토대가 되는 책은 신약이 되겠죠. 또 하나 다른 특이한 점은 이 얇은 책 우리가 흔히 성서라고 해서 그냥 한 권의 책처럼 묶어 다니고 있지만 27권의 책들이 이 안에 들어있는 전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저자가 몇 명일까요? 사실 성서의 각 책의 저자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9명 그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에서 신약성서의 27권의 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마가복음은 마가, 누가복음은 누가라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마태라는 사람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고 누가나 마가는 그 제자들 중 속하진 않았지만 제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개시록 이렇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섯 권의 책이 있습니다. 다섯 권의 책은 전통적으로 요한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그렇게 인정이 되고 있고요. 그리고 이제 서신서로 로마서부터 시작해서 고린도전서,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리뽀서, 골로세서 대살로니카 전서, 대살로니카 후서,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까지 이렇게 13권을 바울이 쓴 책으로 이렇게 보통 치부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히브리서라는 책은 저자가 거기 책에도 나오지 않고 그래서 저자 미상으로 지금 정리를 해야 될 것 같고요. 베드로 전서,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 예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겠죠. 그리고 야고보서라는 책은 야고본데 이 야고보는 예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친동생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다서는 또 역시 예수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유다라는 사람이 썼다.  이렇게 보면 이 성서의 저자들은 예수와 아주 가까운 모종의 관계가 있거나 그 가까운 사람들과 또 가까운 그런 사람들이 쓴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27권의 배열 순서도 중요해요. 그 배열 순서에 있어서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독교 전통 내에 어떤 아이디어가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복음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은 첫 4권 있잖아요 그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판단에 따라 아마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쓰이지 않았을까 해서 그렇게 쓰여진 순서대로 배열된 것 같아요.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바울의 편지들은 대체로 보면 길이가 긴 것부터 짧은 순서대로 배열이 되어 있고요. 그리고 이제 나머지 서신들도 길이가 긴 서신들이 먼저 나오고 짧은 서신들이 뒤에 가는 그런 방식입니다.
요한게시록은 길이가 길지만 장르도 다르고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으로 그리고 가장 나중에 신약성서에 편입된 들어온 그런 책으로 해서 나중에 마지막에 있습니다. 실제로 쓰여진 순서를 보자면 복음서들보다는 편지들이 더 앞서요. 편지들이 기록된 시기는 대체로 50년대, 60년대까지로 보게 되고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마가복음이 70년경입니다. 그리고 70년부터 100년 사이에 나머지 책들, 사도행전, 나머지 서신들 그리고 요한게시록까지 다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된 셈입니다.

그러니까 1세기가 가기 전에 신약성서 27건이 다 저술이 맞춰진 것이죠. 시기나 저자에. 대해서 분명치 않은 여러 가지 이견들이 아직 있습니다. 이렇게 쓴 사람, 그리고 쓰여진 시기, 장소 그리고 누구한테 썼느냐, 이런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신약성서의 책의 내용도 굉장히 다채로운데요. 그래서 누구한테 썼고 언제 썼고 누가 썼고에 따라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뭔지에 대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 문제가 좀 첨예합니다만 그냥 있는 그대로 읽더라도 신약성서의 주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요..
복음서에는 예수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고, 사도행전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이후에 제자들이 활동했던 이야기이고, 그리고 서신서는 그 제자들의 활동 중에서도 바울이라는 사람, 그리고 나머지 몇몇 제자들이 확장되어가는 그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뭔가 곧면의 말들, 뭔가 도움을 주는 말들을 쓰기 위해 썼던 편지들이고, 마지막으로 어떤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봤던 환상이나 초월전 세계를 기록한 요한 게시록 등 이런 내용들이 신약성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글의 형식도 다채로워요. 복음서는 전기에 가까운 그런 장르를 갖고 있고, 사도행전은 역사 기록에 가깝고 나머지는 이제 서신들 그리고 아까 말한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기록한 요한 게시록은 묵시라고 하는 장르로 독특하게 다루어집니다. 신약성서 27권은 애초에 고대 그리스로 모두 쓰여졌습니다. 근데 그 쓰여진 원본이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대신에 일찍부터 그 원본을 손으로 적은 필사본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한 5천 개 이상 됩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그 필사본들을 가지고 원본이 어떠했을까를 가늠해 보고 그래서 다시 한번 그것을 재구성해 보는 결과가 바로 우리가 오늘 원문 신약성서라고 부르는 책이 됩니다. 예수 그리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 첫 100년 동안 예수를 알고 믿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렇게 해서 쓰여진 그 27권이 신약성서로 묶이게 된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일종의 다리입니다. 신이 누구인가, 그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 주고 가장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매개체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입니다.
개시는 감춰졌던 것이 베일을 벗어 드러나 보인다라는 의미입니다. 열개자와 보이다 또는 알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한자와 단어 시자가 합쳐져서 형성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개시는 지금까지 알 수 없었고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개시는 우리가 신적 존재에게 들어서 알거나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알 때에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개시는 우리가 수용자가 되는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개시라는 단어는 종교에서 많이 쓰입니다.  사용합니다. 감춘 것을 보고 깨닫게 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절대자 또는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개시를 중시하는 종교에서는 예언자 또는 경전과 같은 전달자나 매체를 귀중하고 요긴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신적 존재를 거부하는 종교는 예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에서 조차도 한계가 많은 나를 내려놓거나 탈피하여 또 다른 주체를 형성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교리의 기본 개념으로서 개시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아포칼립토라는 단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 역시 숨겨져 있던 것을 보인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개시한다는 말일까요? 기독교에서 개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개시의 내용 역시 하나님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고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알려준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뿐 아니라 하나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시 사건을 통해 신적 존재였던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인격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개시할까요?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시의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연, 성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첫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지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개시합니다. 둘째,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개시하는 결정적인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개시의 방법은 두 가지로 단순화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반 개시와 특별 개시입니다. 자연에 해당하는 것이 일반 개시인데,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개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져 나오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 개시에 해당하는데, 하나님이 독특한 매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영성 기독교 영성은 라틴어 스피릿두스와 연관이 있습니다. "스피릿두스"라는 말은 불같다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서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 성서는 5세기 초에 나왔는데요. 여기서 스피릿두스는 기독교적 삶의 원천인 예수의 영 안에서 생명이 강화된 것을 뜻했습니다. "불같다" 성서가 나오고 수십 년 지나자 비로소 영성의 라틴어 기원인 "스피릿두 알리타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의 뜻은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이란 성령을 따르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뜻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성령을 따르는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요? 신의 영을 따라서 삶의 모든 차원이 하나로 올바르게 통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통합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전인적인 성격이고요. 다른 하나는 총체적인 성격입니다. 전인적인 성격이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이루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육체는 빼놓고 정신이나 영만 강조해서는 참된 영성이 될 수 없겠죠. 총체적인 성격이란 영성의 영역이 우리의 내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서 이 세상 모든 존재와의 관계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나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삶이나 세상과 분리된 채 자신의 내면으로만 들어가려 하거나, 또는 이 세상을 등지고 벗어나서 수행하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일부분에만 해당합니다. 이 일부를 영성의 전체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족한 영성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영성은 아닙니다. 영성은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단편적인 일부분이 아닌 것이죠..
참된 영성은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마음과 몸, 역사와 사회, 정치와 경제, 아름다움과 지혜, 지성과 감성 등등 이런 여러 차원을 두루 보아야 비로소 영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영성이란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 온 세상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넓혀가며 정신과 육체도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성인 것이죠. 특별히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고 본받아 결국 예수를 닮아감으로써 이러한 영성에 이루고자 하죠.
다음과 같은 설명은 영성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성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삶 속에,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이 세상 역사의 과정 속에 임재하는 신의 창조적 입김을 심도 깊게 체험하면서 삶의 전 영역을 자유, 사랑, 공의, 평화로 변하게 하는 창조적 변혁의 힘이다.
오경, 다섯경전이라고 하는 말이죠.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펜타테우크라고 하는 이 말은 다섯이라는 수와 두루마리를 뜻하는 말이 합쳐진 그리스어에서 나온 합성어입니다.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부분에는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시대의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가 있고요. 흔히 이야기들을 전역사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이야기합니다. 역사 이전의 역사라고 하는 그런 뜻이죠. 뒷부분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갈대아 땅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몇몇 사람들하고 가난한 땅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손자였던 야곱대의 기근을 피해서 이집트로 이주해서 사는 이야기로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출애국기부터 시작해서 신명기까지는 주로 모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에 살던 야곱의 후손들을 히브린이라고 불렀는데요. 그들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국기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 있는 시네산이라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때까지의 사건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레위기는 야곱의 후손을 피해서 작업의 네 번째 아들 이름을 딴 책인데요. 레위 후손들은 주로 제사와 관련된 역할을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기는 구약성서에서 제사, 오늘날로 이야기하는 예배, 절기와 관련된 규정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민숙이는 광야에서 일어난 일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일은 백성들의 수를 세워본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그리고 태어났는지 그걸 알아본 거죠. 그래서 우리말 제목에는 '백성민자에다가 세워볼 수'를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명기는 '펼칠신' 혹은 '거듭한다는 신'에다가 '개명명자'를 사용해서 '두 번째 주어진 율법' 이런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 책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의', 출애국기는 '이름들', 레위기는 '그리고 이를 시대에', 민숙이는 '광야에서', 신명기는 '말씀들'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각 책의 첫 구절에 나오고 있는 의미 있는 단어에서 따온 이름들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이 다섯 권의 책의 이름을 오경이라고 부르지 않고, 토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율법서'고요.

그 이유는 유대교의 모든 토라가 여기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토라는 '가르침'을 뜻하는 단어예요. 모세는 출애국한 히브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두 번에 걸쳐 가르쳤습니다. 한 번은 신해선에 도착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가난한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하 평지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가르침은 '살인하지 말라'처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처럼 무엇을 하라는 내용으로 구분이 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하라는 것보다 좀 많아요. 그런데 그 가르침이 주로 법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토라를 번역할 때는 주로 '율법'이라는 말로 번역을 합니다. 구의학성서에는 613개의 율법이 있는 셈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국기에서 신명기까지 이 네 권의 책에서 이 토라가 발견됩니다.  오경과 율법서는 명칭만 다를 뿐이고 그 순서와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경이라고 부르는데에는 이 다섯 권의 책에 율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긴 시대의 역사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경의 또 다른 이름은 모세오경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스라 시대인데요.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다섯 권의 책은 모세의 책으로 불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경의 저자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오경의 마지막에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난제로 남아있습니다.
교리 교리는 가르침이나 교훈을 뜻합니다. 가르칠 교자에 원리 또는 이치를 의미하는 한자어 단어 리자가 결합하여 교리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자적으로 교리는 어떤 이치나 원리에 대한 가르침 또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에 해당하는 고전어 단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라틴어로 독트리나라는 단어입니다. 이 역시 교훈이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르친다는 의미일까요?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어떤 것의 이치나 원리를 가르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단어 헬라어로 도그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떤 철학학파의 사상이나 이상 원리를 뜻합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도케오인데 이것의 의미는 참되고 선하게 여기거나 그렇게 보인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체가 수용하는 원리나 진리를 뜻합니다. 도그마가 1인칭 주어와 더불어 사용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개인이 말하는 진리가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가 인정하는 진리나 이치, 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어떤 철학학파나 종교 집단에서 받아들이는 또 전파하는 진리 내지는 이치를 뜻합니다. 교리가 한 공동체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기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의 차이나 유사성을 가름하는 기준 내지는 규범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사회적, 종교적 집단에는 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가르치고 고백하는 이치 또는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교리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교리의 일반적인 차원과 더불어 믿고 고백하는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의 교리에도 믿고 고백하는 차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를 배퇴시킨 가장 큰 특징은 예수를 그리스도 라고 믿고 고백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정체성 형성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립되고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차이점과 독특성은 무엇인지 변호하고 변증해야 했습니다. 이런 목적 아래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고 발전되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 정체성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기독교 교리는 그들이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내용에 대해 바르게 설명해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가 실행하는 실천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질문들에 응답하고 그 대답들을 알맞게 배열하고 조직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의 내부적인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내용과 주제는 방대합니다. 각 시대마다 교회가 당면한 과제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인 주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3위일체 하나님의 속성, 창조와 종말, 그리고 개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였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누구인가 등에 해당합니다. 물론 여기 나열한 기독교 교리의 기본 개념 역시 한 목소리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교회들이 정치, 경제,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다양함 가운데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 교리의 다채로운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첫 4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이 네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공통된 단어, 복음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그런 뜻 인데요.  그리고 이 복음을 빼고 나면 남는 나머지 이름들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이름들이 전통적으로 각 책을 쓴 저자들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복음은 곧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음서라고도 부릅니다. 복음서는 일종의 전기입니다. 나사리 예수라는 한 인물의 일생, 그의 행적이나 가르침,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이나 태도, 이런 것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서가 전기로써 그 시대, 고대의 다른 전기들과도 다른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우선 이 복음서가 다루고 있는 주인공 예수의 삶에 있어서 그 삶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 특정한 활동에 집중한다는 겁니다. 예수가 출생한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앞부분에 조금 나와요. 그리고 성장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제외하고 나면 사실 예수가 성인이 되어서 활동하기 전 태어나서부터 성장하던 청소년기나 유년기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성인이 되어서 대중연설가로서, 종교 지도자로서 유대 지방에서 활동하던 시기 거기에 복음서 내용이 대부분이 할애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의 생의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요.

이 복음서의 또 다른 특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곤의 책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네곤의 책은 1부, 2부, 3부, 4부 그렇게 각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다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들이에요. 즉, 예수에 대한 전기가 4개의 판, 4개의 버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 점이 특이합니다. 물론, 같은 인물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겹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이렇게 다른 디테일들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 점이 특이하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읽어보면 굉장히 다른 디테일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채용된 날이 유대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이었다라고 하는 서술, 마테마가 누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아니다, 그 전날 당일, 니산월 14일이 아닌 6월절 전날 14일이었다라고 또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거든요.  뿐만 아니라, 예수를 재판하고, 신문하고 예수와 나눴던 대화들, 오갔던 대화의 내용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차이들이 있어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죽고 나서 부활했을 때 누가 무덤에 갔는지, 뭘 봤는지 이런 내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면, 마테마가, 그리고 누가, 이 세 권은 많은 내용들이 겹치고 있고요, 요한복음은 겹치는 내용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 보니 이 세 권을 묶어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함께 보는 복음, 함께 보이는 복음. 여러분이 그렇게 이해해도 될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공관복음서에는 역사적 예수, 예수에 관한 사실들이 그리고 그에 관한 정보들이 많이 담겨 있다고 보고요. 요한복음에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의 의미, 함의의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그렇게 보통 봅니다.

내복음서가 쓰여진 시기나 또 그 복음서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독자들도 각각 다릅니다. 네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사실 성서에는 마테가 그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실제 기록된 순서로 보자면 마가가 첫 번째입니다. 마가는 예수 제자 중 하나였던 베드로의 조력자로서 로마에서 함께 일했었는데,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죽고 나서, 마가가 베드로를 통해 전해들었던 예수에 관한 내용을 엮은 것. 그것이 이제 마가복음이고, 70년경, 서기 70년경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기록된 마가복음을 자료로 삼아 80년대, 90년대에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것이 각자 독자적으로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완전히 마가와 상관없는, 어떤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에 관한 내용. 그 자료를 가지고 기록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의 얼개는 마가복음의 얼개에 기본적으로 털을 두고 있고요..
그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의 공생에 그러니까... 갈리리를 중심으로 예수가 가르치고 또 기적을 행하고 또 제자들과 활동했던 그 이야기가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고요. 복음서의 후반부는 예루살렘에서 거기에도 가르침들과 예수의 활동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체포되어서 신문받고 처형당하고 죽어서 무덤에 묻혔지만 무덤이 3일 후에 보니까 비어있더라는 내용까지가 후반부의 주된 내용입니다.
제 보금서는 기독교의 창시자인 나사렛 예수의 일대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구약성서 66권이나 되는 이 책 중에 4권의 복음서야말로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책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행했던 치유나 죽귀나 다른 기적들 이런 것들은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의 아들, 신적 존재의 초월적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하는 이런 내용은 신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것이 표현된 그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은 이해합니다. 예수가 제자들과 또 동시대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들은 아직까지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속적인 효력이 있는 도덕적 규범으로 인정이 됩니다. 하지만, 보금서가 예수에 관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그치는 건 아닙니다.
보금서에 그려진 예수는 실제로 그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예수가 바로 자기들 내면에, 우리들 내면에 계시고 또 초월적으로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 예수를 그려보게 하는 예수의 목소리와 예수의 호흡과 눈빛, 이런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만날 수 있게 우리와 예수를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은 것 또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책이 바로 이 내 보금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란, 하나님이 어떤 물질로 되어 있는지, 손은 몇 개인지, 발은 몇 개인지 같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속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어떠한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와 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와 같은 명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이는 저우를 미워한다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이 서로에게 올바르고 공평하게 대하기를 원하는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지혜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성경 전체가 모두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모세오경, 하나님의 말씀을 배연하는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서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11기, 역대기 같은 역사서들 모두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중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과연 전부인가 하는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룬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을 우리는 지혜서 혹은 지혜 장르라 부릅니다. 자먼과 욕기와 전도서가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이 지혜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한쪽에는 규범적 지혜가 있고, 다른 쪽에 반성적 지혜 혹은 회의적 지혜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란 세상에는 하나님이 정한 규범, 즉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이 되면 어두워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의 변화가 있고 먹을 것이 풍성한 계절이 있으면 죽고 배고픈 시절이 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패턴을 잘 알고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 패턴을 모르거나 알고도 따라하지 않는 사람은 무지하고 아둔한 사람입니다. 성경 중에 자먼이 이 규범적 지혜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이 패턴의 중심에는 뿌린대로 거둔다 라는 규범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처럼 좋은 것, 선한 것을 심으면 그 열매도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을 뿌리면 그 결과는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특징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좋은 것이고 죽음과 멸망은 나쁜 것입니다. 건강은 좋은 것이고 질병은 나쁜 것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고 식이, 질투, 미움은 나쁜 것입니다. 정직하고 솔직한 것은 좋은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얘기할까? 아니면 진실을 숨기거나 거짓을 말할까? 좀 더 부드럽게 애정을 담아 말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우리는 매 순간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데 규범적 지혜는 이 둘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좋은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명히 해줍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무조건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때로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규범이 모든 경우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적용되는 기계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반성적 지혜입니다. 반성적 지혜란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규범적 지혜의 패턴이... 적용되지만 아주 자세히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패턴에 어긋나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질병이 생기고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는 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무언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생긴 나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기는 욕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도 불행과 고난이 닥칠 수 있다고 규범적 지혜의 패턴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해집니다. 하나님의 운행하심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고 복을 주시기도 하고 화를 주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욕의 고백은 하나님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초월한 분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전도서도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는데 욕기와는 결이 다릅니다. 욕기가 잠원의 인과응모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예외가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도서는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시야를 한 사람의 인생으로 한정한다면 생명은 좋은 것, 죽음은 나쁜 것, 건강한 것은 좋은 것, 질병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주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병이 들고 병이 낫고 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상 다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욕기가 현미경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라면 전도서의 시각은 마치 카메라를 뒤로 줌아웃을 해서 높은 산 위에서 저 멀리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은 잠깐 스쳐가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이게 헛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의 뜻입니다.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고 그분의 뜻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잠원이 말하는 지혜자는 어떤 패턴에 따라 미래를 예측해서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지만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을 알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그래서 삶이 아주 짧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잠원과 욕기와 전도서 잠원과 욕기와 전도서는 마치 한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잠원은 입문단계, 마치 초중고 과정같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에 대해 일반적인 현상과 규범들을 배우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욕기의 단계로서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 직접 경험을 해보니 학교에서 배운 규범대로만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규칙의 예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전도서의 단계입니다..
마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규범과 예외를 다 경험한 사람이 나중에 일생을 뒤돌아보면 그 당시에는 예배처럼 보였던 것조차 어느 거대한 규칙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의 지혜가 규범적 지혜 하나로 충분했다면 아마 성경에는 잠언만 있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이 얘기하는 규범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 욕기도 있고 전도서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각자가 신앙의 여러 단계의 산재에 있고, 각각의 단계에 맞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과 욕기와 전도서가 모두 생명을 살리는 지혜이지만 욕기의 단계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잠언의 지혜를 적용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 됩니다. 예배 친구들의 지혜가 우매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입문 단계의 사람에게 전도서의 지혜를 가르치는 건 역시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들한테 "너희도 언제 죽을지 몰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면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살아갑니다. 교양이란 그 가르침 중에서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채득하고 적용하기 위한 노력 또 그럴 수 있는 역량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힘을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길을 양자를 써서 교양인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 교양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이 시간적인 여유를 누리면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그런 모습을 과시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양 개념이 왜곡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교양의 참뜻을 되새겨볼 때,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라틴어 artes liberales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원래 이 말은 자유인에게 적합한 학문 혹은 학문적인 기술을 일컫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교양의 핵심은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빚어나가는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마치 장인이 어떤 기술을 마스터하듯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이 교양의 진면목입니다. 나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 불합리한 전통, 사회적인 압력, 물질 만능주의, 심리적인 강박, 지나치게 의존적인 관계, 잘못된 습관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 교양입니다. 예컨대 역사를 교양으로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을 배우지 않았을 때에는 역사적으로 무지와 편견의 노예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며 판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았겠지만, 이제는 역사 교양, 혹은 교양으로서의 역사를 통해서 그런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으로서 역사를 성찰하고 그 깨달음을 따라서 오늘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독일어권에서 교양에 해당하는 단어 빌둥은 하나님의 형상 빌드, 그 형상을 회복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와 교양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인간이 이 세상의 헛된 형상을 벗어나서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더 높은 존재로 빚어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인으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소통은 교양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게 함께 자유인으로 지혜롭게 공존하기 위한 핵심 역량, 그것이 바로 교양입니다.

기독교와 성서. 통상적으로 성경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용어입니다. 때로는 성서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왠지 성경은 조금 더 거룩한 느낌이 들고 성서는 조금 더 학술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연구 앞에는 성서를 붙여서 성서연구라고 하고 공부 앞에는 성경을 붙여서 성경공부라고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래 불교 용어였습니다.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의 경전을 가르쳐서 거룩한 경전, 즉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카톨릭 성교사들이 개신교 성교사들보다 약 100년 먼저 우리 땅에 들어왔지만 기독교의 경전은, 개신교 성교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한 분은 중국에서 활동하시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성교사 존 로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두 분의 성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이 두 분이 1885년에 우리 땅을 밟는데, 그리고 한 해 전에 알렌 성교사가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그 전에 1882년에 로스 성교사는 누가복음을 번역, 출판하면서 예수 성교 누가복음전셔 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5년 뒤에 신약 전체 번역을 마치고 예수 성교 전셔 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성경'이 아니라 거룩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성교'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에서는 '성교'라는 표현이 더 이상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기독교의 경전에 '성경'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입니다. 이때가 우리말 신구약 성경이 완역된 해입니다. 로스의 번역이 사역이라면 이 새로운 번역은 공역입니다. 19세기 말에 내안 성교사들을 중심으로 성경 번역자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서 신약이 번역되어 1900년에 신약 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1911년에 구약이 번역되어 구약 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때 신약과 구약 이 두 책을 합본하여 성경 전서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 또는 성서라고 부르는데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명칭은 성경전서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우리는 성경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또 성서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는 성경을 흔히 바이블 또는 홀리 바이블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어의 비블로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이블은 특정한 책, 즉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가리키지만 그리스어 비블로스는 책이라고 하는 일반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부터 일반 명사였던 것은 아닙니다. 비블로스는 원래 도시 이름입니다.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였습니다. 오늘날 베이루트 북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 이름이 비블로스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요. 당시 파피루스라고 하는 식물이 많이 자랐다고 합니다. 파피루스가 많이 났으니 이를 이용한 용지 생산이 활발했습니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또 양피지가 널리 사용되기 전에 식물 파피루스로 만든 용지가 사용되는데 이 용지 또한 파피루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지가 바로 파피루스입니다. 어쨌든 이곳이 파피루스 생산의 중심지였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이 책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 명사인 이 지역의 이름이 책이라는 일반 명사가 되었고 또한 파피루스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바이블이라고 부르는 단어는 비블로스라고 하는 도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한 파피루스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책을 가르치는 또 다른 그리스어 비블리온 역시 도시 비블로스에서 나왔다고 쉽게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또한 정경이라고도 합니다. 영어의 캐논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오늘날 캐논, 영어의 캐논은 법전, 규범, 표준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또한 정경, 즉 교회의 권위로 인정을 받은 공적인 문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경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공인된 구약과 신약을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정경은 그리스어의 카논을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의 캐논, 독일어의 카논이 다 그리스어의 카논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어 카논은 세머 계열의 언어에서의 카네에서 왔습니다. 카네는 원래 갈대를 뜻하였습니다. 흔히 측량 작업을 하는데 갈대가 사용되었고요. 그래서 갈대의 척도더 나아가서 표준이라고 하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던 시대에 그리스어 '카논도' 역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서 10장 13절에 '카논'이 사용되는데 본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화해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여기서 '한계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이 바로 그리스로 하면 '카타토 메트론 투 카논노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표준의 분량' 또는 '표준의 척도'에 따라서 이것을 조금 풀어서 해석하면 '허용된 규칙의 범위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카노온'이 허용된 규칙, 즉 귀범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도 '카논'이 사용되는데 본문은 이렇습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본문이 되어 있는데 그래서 '표준'으로 번역된 것이 바로 '카논'입니다.
아직까지는 기독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단어는 아닙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카논'은 기독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영어 '캐논'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이 66권의 신구약 책들 외에도 많은 문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66권만이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며 이 66권만이 '정경'이라고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외경'이라고 했는데 외경은 그리스어의 'Apocryphos'라고 하는 형용사에서 나온 말이고요. 그 뜻은 '숨겨진'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외경과 신악의 외경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구약의 외경이라고 할 때는 70인 역에는 있지만 마소라 본문에 없는 책들을 외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70인 역'이란 그리스를 모국어로 하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해서 또는 그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로 번역한 것입니다. '토비트', '유디트', '에스텔', '지혜서', '집회서', '바룩'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제2성경'이라고도 합니다.  반면 마소라 본문은 히브리어로 정순된 권이 있는 본문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외경이란 그리스 번역인 70인 역에는 있지만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 빠져 있는 책들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외경은 초기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을 가리킵니다. 잘 알려진 곳으로는 '도마복음'이라든지 '디다케'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외경 복음서들, 수많은 외경 행전들, 또 외경 서신들, 외경 개시록들이 있습니다. 2세기, 3세기, 4세기, 심지어는 그 이후까지도 어느 지역에서는 이 외경들이 거룩한 문서로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공교에서 인정하는 신약책들이 27권으로 제한이 되면서 나머지 책들을 외경, 즉 경전 받게 경전이 되었습니다.
공감은 기독교 영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기독교 영성의 성격이 관계의 확장이기에 공감하는 능력은 기독교 영성에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이 담겨있는 복음서는 기독교가 말하는 공감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냅니다.
그중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참 유명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버려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이 사마리아인은 외면하지 않고 돌봅니다. 유대교 제사장이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부정을 탄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돕기는 커녕 외면하고 지나쳤지만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마음을 헬라어 스플랑크 니조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우리말로는 불쌍히 여기다 또는 가여움을 느끼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글자적 의미로 공감은 같은 마음을 느끼다 정도의 뜻을 갖지만, 같은 공에 느낄 감이라고 쓰면 그 정서나 심정을 같이한다 같이 느낀다는 뜻을 갖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스플랑크 니조마이는 이런 한자어 풀이 보다 더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감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인 sympathy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같은 이라는 뜻의 심과 감정이라는 뜻의 헬라어 pathos를 말뿌리로 해서 같은 감정을 느끼다 이런 뜻을 갖습니다.  헬라오파토스에는 감정이라는 뜻 외에도 고통이라는 뜻이 더 있습니다. 이럴 경우 공감은 고통을 같이 느낀다는 뜻이 되겠죠.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느낀 마음을 표현한 단어, 스플랑크 니조마이는 바로 같은 고통을 느끼다. 이 뜻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위나 신분, 이해관계 등을 따지지 않고 대등한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공감입니다. 실제로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언제나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는 병들어서 멸시를 받는 사람들, 돈이 없어서 제사에 재물도 못 올리는 사람들, 억울하게 죄인 소리 듣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편들어 주기를.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당대의 높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비난과 위협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 기독교에서 공감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명료하고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공감이란, 소외되며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난에 대등한 동료로 함께 참여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예언이라는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단어의 그리스어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언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프로페테이야이고, 예언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프로페테스입니다. 이 표현들은 모모전에 혹은 모모앞에를 의미하는 접두어 프로와 말하다를 의미하는 페미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접두어 프로는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접두어를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예언이란 어떤 이 앞에서 말하는 행위, 즉 어떤 이의 말과 뜻을 대연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되고, 이 접두어를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예언이란, 즉 앞날의 이를 예견하다가 됩니다..
이 두 의미 모두, 성서 속의 예언 개념과 잘 연결되는데, 그 중에서 전자의 의미, 즉 대언의 행위가 성서에 나타난 예언의 본래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예언이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이 단어는 미리 예자와 말씀 언자로 표기되어, '앞으로 다가올 이를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언의 개념 역시 이 사전 항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연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성서적 예언의 원의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미리 예자가 아니라 맞길 예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서 속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언과 예언자에 대한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표현은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을 지칭하여 불렀던 더 오래된 표현은 히브리어로 로에 혹은 호제입니다. 이 단어들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환상을 보는 자'입니다. 즉, 참된 예언자는 하나님의 고륵한 인재를 눈으로 보고,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애감을 몸소 체험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예언서들은 자신이 참된 예언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그 순간, 그가 목도했던 신비한 체험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과 관련하여 이 단어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어그는 나바이고, 예언자를 일컫는 명사는 나비입니다. 비록 히브리어는 아니지만 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는 아카드어 단어 나부라고 하는 동사는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 아카드어 단어와 나바라는 히브리어 어근이 연관되어 있다면 예언자를 의미하는 나비는 부름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 표현은 이스라엘 왕국시대 때 활동했던 예언자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원을 이루었던 중요한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모세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리더십의 본질이 바로 이 예언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올바르게 전하는 데에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러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버린 사회의 불의와 우상숭배의 모습을 비판하고 이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만일 예언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면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역시 이 예언에 포함됩니다. 성서는 참된 예언은 바로 선포된 예언의 성취를 통해 증명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래적인 예견과 그 성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성서는 심판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마음을 돌이켜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언의 본질적인 목적은 단순히 미래에 있을 일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있습니다. 즉, 성서에서 예언의 초점은 막연한 미래가 아닌 우리의 현실의 모습에 있습니다.

히브리언은 구약 성경의 언어입니다. 에스라서 4장 8절에서 6장 18절, 그리고 7장 12절에서 26절과 다니엘서 2장 4절부터 7장 28절의 일부에서 아람어가 사용되었고 그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구약 성경 전체가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크게 아프리카 아시아 어족에 속해 있고 좀 더 좁게는 샘조거 혹은 샘오파라 불리우는 어근에 속해 있습니다. 샘조거라는 이름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샘조거에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제국의 언어인 아카드어, 성경의 블레테 사람들이 사용하던 고대 페니키아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아람어, 그리고 현대 중동의 아랍 사람들이 쓰는 아랍어 등이 샘조거에 속해 있습니다..
샘조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세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어근을 중심으로 단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크트 브'라고 하는 어근은 글로 쓰는 것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로 '카타브' 하면은 '그가 썼다' 라고 하는 동사이고, 아랍어로 '기타브'라고 하면 책이라는 명사입니다. 접두어가 붙은 형태인 '미크타브' 하면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문서, 서류 혹은 왕이 내리는 조서를 가리킵니다. 다 모두 '쓰다'와 관련되어 있죠. '샘조거'는 이렇게 세 개의 자음으로 구성된 어근에 명사나 형용사, 동사를 만드는 특정한 패턴으로 하나의 단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지 않고 자음만 표기하더라도 문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독특한 언어군입니다.
히브리어는 고대 이스라엘 바로 옆에 있던 모아, 암몬, 에돔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거의 차이가 없고 골리아시스턴, 페니케아어와는 형제, 자매 언어로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언어로 서로 얘기해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사촌 언어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문법과 어휘면에서 유사성이 높지만 또한 차이도 있어서 서로 완전히 이해되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11교시 18장 26절에 아시리아의 사절단 랍사게가 히브리어로 위협을 하니까 유다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아람어로 말해달라 라고 하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히브리어는 고대 가나한 지역의 민족들의 언어와 거의 차이가 없는 가나한어 중에 하나이고 보다 넓게는 문법 구조와 어휘의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센 조거' 중에 하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쓰인 히브리언은 고정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였습니다. 살아있는 언어라는 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바뀌고 변해가는 언어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언어이기에 지역적으로 차이가 생깁니다. 사사계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에브라임지파는 쉿 발음을 잘 못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쉿볼렛이라고 발음을 해보라고 하니 씹볼렛이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에프라임지파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쌍시옷 발음을 잘 못하는 분들을 특정 지역 출신이라고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도 어휘와 발음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시대의 히브리언은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지방색이 드러나는 살아있는 언어였습니다. 또한 성경 안에서도 초기 히브리어, 중기 히브리어, 후기 히브리어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문법과 어휘면에서 변화 과정이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어가 변화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특히나 페르시아가 고대 근동 전역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국제공용어인 아라머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전통적으로 쓰던 히브리어 단어가 아니라 아라머 단어를 대신 쓰고 문법 구조도 아라머스럽게 변합니다. 이렇듯 히브리어는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언어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쓰던 언어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살아있는 언어였습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히브리어로 쓰고 말하는데 그것을 현대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현대 히브리어는 일종의 인공 언어로서 19세기 말 엘리에제르벤 예후다 라는 시온이즘 운동가가 앞으로 건설되는 이스라엘 국가에서는 히브리어로 말하고 쓰자고 주창하면서 만들어진 언어입니다. 성경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성경 히브리어는 BC 6세기 바빌론 포로시기와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을 거치며 일상 언어로서의 지위를 점차 잃어가고 페르시아 제국의 국제 공용어인 아라머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됩니다. 히브리어는 아라머와 혼합된 라비 히브리어, 유럽 언어와 혼합된 이리시 같은 언어로서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엘리에제르벤 예후다는 성경 히브리어와 라비 히브리어, 이리시 등의 언어를 연구하며 현대 히브리어를 창시했기 때문에 성경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는 2000년이 넘는 시간적 거리에도 연속성이 존재합니다. 문자를 표기하는 방법, 성경에 쓰인 어휘와 표현을 최대한 현대 히브리어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현대 문물들을 표현하는 어휘들이나 현대 유럽어의 시제 개념과 같은 성경 히브리어에는 없는 문법적 개념들로 현대 히브리어의 틀을 만들었기 때문에 두 언어 사이에는 차이점 역시 많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말 성경을 보지만 때로는 영어 성경이나 독일어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우리말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서 성경이 처음부터 우리말 또는 영어로 기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전인 구약은요. 아람어로 된 에스라와 다니엘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의 언어, 즉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자신들의 언어로 썼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로 기록되었습니다. 흔히 헬라옥, 히라보라고도 하는데 왜 그리스일까요? 예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첫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하던 이 첫 기독교인들은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은 구약과 달리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아람어를 썼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는 원래 고대 시리아의... 언어인데 예수 시대에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목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갈릴리 출신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아람어로 대화를 하였겠지만 신약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인물이 바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된 로마의 5대 총독 빌라도입니다. 기원전 31년, 로마와 헬라 제국 이집트 사이의 악티움 회전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둔 이후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고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된 1, 2세기에는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된 로마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은 라틴어로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멸망시킨 헬라 제국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도시 국가였을 때부터 그리스 문화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명문가 자제들은 그리스에서 모셔온 스승을 두었습니다. 그리스야말로 철학과 문학의 나라였으며 또한 예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문학 활동의 가장 적절한 언어는 그리스어다 라고 로마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열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의 세력이 점점 팽창하였고 로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들이 세운 헬라 제국들, 마케도니아와 셀레오코스 왕조의 시리아 푸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게 됩니다. 이제 전쟁에서 패배한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로마인들은 자기 자식들의 스승을 그리스 노예들 가운데서 찾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래서 문학적으로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로마 문화, 그레꼬로만 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모든 도키먼트, 서류, 공식 문서 등은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되었지만 리터러처, 문학, 소설과 시 이런 것들은 여전히 그리스어가 사용됐습니다.
그리스야말로 문학의 가장 적절한 언어라는 이러한 생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어떤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가 정복한 나라한테 정복당하였다. 조선시대 때 우리 한글이 있었지만 문학작품을 쓸 때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한자를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한 권 한 권은 도키먼트가 아니라 리터러처, 공식 서류가 아니라 문학입니다. 누구나 당시에는 리터러처에 그리스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나 아라모가 아니라 또 로마시대의 공용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교부들이 라틴어로 저수를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라틴어로 글을 쓴 교부는 기원 후 200년경에 활동한 트르툴리아누스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초기 기독교의 저술가들은 모두 그리스로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로 기록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라고 해서 다 똑같은 그리스어는 아니었습니다. 언어는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말과 우리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고전 문학 배웠잖아요. 고전 문학을 보면 분명히 우리 말인데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세월의 흐름 가운데 언어가 그만큼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로 기록된 신약성경을 그리스로를 모국어로 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인 독자들을 위해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야 오늘날의 그리스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 유럽 오족에 속하는 그리스어는 시대별로 크게 다섯으로 구분합니다. 원시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어, 코인의 그리스어, 중세 그리스어, 현대 그리스어입니다. 물론 지역적으로도 구분됩니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에도 방언이 많습니다. 그리스에도 아티케, 도리아, 이오니아 등 많은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방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중세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대별로 보자면 우선 원시 그리스어는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미노스 문명 그리고 그리스 본토에서 기원전 17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는 미노스 문명입니다. 부터 시작되었다는 미켄의 문명에서 사용된 언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서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언어를 과연 그리서라고 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논쟁이 있을 만큼 고대 그리서와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라든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그리서는 고대 그리서입니다. 작가인 호메로스라든지 역사가인 헤로도토스 등이 사용한 언어입니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300년경까지 사용된 언어를 가리켜 고대 그리서라고 하는데 특별히 기원전 5세기, 4세기 그리스를 가리켜 고전 그리스 그리고 이때 언어를 고전 그리서 라고 합니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4세기부터 중세 그리서가 사용되기 전까지의 그리서를 코이네 그리서라고 합니다. 신학 성경이 바로 코이네 그리서로 기록되었습니다. 형용사는 코이노스의 여성형입니다. 그 뜻은 '공통의', '일반적인', '속된', '불결한', '더러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코이네, 그리서는 보편적인 그리서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 그리서가 아니라 다소 저급한, 아무나 사용하는 그리서라고 하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준 높은 고대 또는 고전 그리서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지중해를 벗어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멀리 아시아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때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만나면서 또 다른 하나의 문화, 제3의 문화를 만드는데 이것을 헬레니즘이라고 합니다. 여기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지역에서는 그리서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조 때부터 그리서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낯선 언어를 배우는 사람들의 그리서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종적으로 그리스인들만 그리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리서와 상관이 없었던 민족이 그리서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인도와 필리핀의 영어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인도 사람들이나 필리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어를 잘하지만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사용하는 영어와는 다르죠.
아마도 코인의 그리서가 그러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그리서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대 또는 고전 그리서보다 쉬운 언어였습니다. 문장 구조도 단순합니다..
그래서 그리서를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언어가 코인의 그리서였고 성경은 바로 이러한 쉬운 언어로 기록된 셈입니다.  물론 헬레니즘 문화권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그리서에 익숙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서로 기록된 성경은 또 다시 라틴어, 콕투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에디오피아어, 고투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렇게 신약 성경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예언서는 구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자들의 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분류하는 예언서들과 유대교에서 분류하는 예언서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성서의 예언서로 분류된 책들은 전통적으로 예언자들이 저술했다고 여겨지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이렇게 세 권의 대예언서와 호세야서, 요엘서, 아무스서, 오바디야서, 요나서, 미가서, 나홈서, 하박국서, 스바니야서, 학계서, 스가리야서, 그리고 말라기서 이렇게 12권의 소예언서 그리고 추가로 예레미야 애가와 다니엘서 등 총 17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를 나누는 기준은 예언자들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서의 분량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등과 같은 구교 전통에서는 외경서인 바룩서와 예레미야의 편지도 예언서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에는 보다 넓은 범위의 책들이 예언서로 분류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예언서는 위에서 언급한 예언자들의 책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사 안에서 역사서로 분류된 여우수화, 사사기,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한기상하까지도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 전통의 예언서 부분은 여우수화서에서 열한기서까지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전기예언서와 이사야서에서부터 말라기서까지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후기예언서로 다시 분류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는 내용까지도 예언서로 분류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예언자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성사에서 예언서로 분류된 책들 가운데 예레미야 에가와 단이에서는 히브리 성사의 예언서 부분에서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책들이 완료되었던 당시 유대교에서 예언서의 목록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예언서에 포함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책들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했다라고 하는 예언서들의 전형적인 문구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 히브리 성사는 사무엘 상하와 열한기 상하를 각기 한 권으로 세고 또한 12권의 소 예언서들을 한 권으로 세기 때문에 총 8권의 책이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예언서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 기독교의 구약 성사는 책들의 주제와 성격에 근거하고 있고 유대교의 히브리 성사는 대체로 각 책들이 정경화된 시기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 성사의 예언서와 히브리 성사의 후기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삶과 그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들을 담고 있습니다. 유다 멸망 이전의 예언서들은 주로 사회의 불의와 우상 숭배 그리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면 유다 멸망 이후 포로기의 예언서들은 위로와 회복에 대한 희망의 예언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성사에서 예언서는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를 연결하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구약 성서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12소 예언서의 마지막 책 말락이선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엘리아를 보내실 것이라는 예언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 말락의 예언은...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길을 예비한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과 연결되는 것이라 전동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마태복음은 이사야서에서 선포된 메시아 예언이 예수 글씨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전통에서 예언자의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말락이를 끝으로 예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보고 있고 이후에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로 여깁니다. 이후 예언서의 권위와 전통은 세상의 종말을 예견하는 묵시문학 전통과 성사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라삐 전통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기독교는 태어난 이후 끊임없이 성장했습니다.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발생한 이 종교는 놀랍게 확장하였고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학자들은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라는 지위를 당분간은 유지하리라 전망합니다. 기독교는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정치, 경제, 사회문화, 과학과 예술 등을 막나한 전 분야와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관한 지식은 단지 기독교인이나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꼭 필요한 지식, 곧 교양에 해당합니다.
여러 논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경우 통상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에 들어와서 이벽의 집에서 영세식을 가진 1784년을 시작으로 봅니다. 프로테스탄트 곧 계신교는 1884년을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이후 기독교는 한국 근현대사와 매우 역동적인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의 기독교 교양 사전 365 프로젝트는 교양의 차원에서 기독교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하고 확장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 프로젝트는 사전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종교가 있든 없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사전적 지식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오랜 동안 연구한 수준 높은 학자들이 기독교의 중요한 요거나 개념을 쉽고 간략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정확하게 설명하고 나아가 그간 흐트러지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들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대학교나 중고등학교 그리고 시민단체 또 교회에서 가릴 것 없이 자유롭고 편하게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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