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이종태 한남대 교수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천사도 있고, 하나님이 빛을 내시기 전부터 존재하는 악이 있느냐는 질문은 철학과 신앙에서 다뤄지고 있어요.
'악'이 왜 존재하는지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려면, 기독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고민해봐야 해요.
기독교 철학에서 악이란?
'악과 선'의 개념은 어떤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되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악'이란 것은 사실 선의 부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철학의 공식적인 이야기에요.
기독교는 절대 신을 기반으로,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다는 이 기준을 언급하죠.
따라서 '악'은 궁극적으로는 '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는데요.
이 세상에서 '악'과 싸우는 것은 합법적인 왕 하나님의 소유라는 철학적인 이야기도 있다는군요.
기독교에서 자유의지와 수복작전의 관계는?
기독교는 현재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싸움에서, 인간에게 선택이란 자유의지를 주셨다는데,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세상에는 악이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존재로 지어졌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대한 수복작전을 함께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어요.
루이스는 문제의 근본적인 답변 중 하나가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에요.
인간의 자유의지의 목적은?
루이스는,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과 그에 따른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랑은 프로그래밍처럼 기계적이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지만, 인간들은 상대방의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감격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해요.
사랑을 주는 쪽 또한, 자유의지로 인해 사랑을 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여 줌으로서 의미가 있다고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도 자신과 같은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내리신 것이라고 해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로 여긴 인간에게 주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것에서 온답니다요.
이것은 인간이 자유로워져서 주어지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해서 행복을 느끼기를 원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한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일종의 모험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이 인간이 행복을 찾는 모험임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인간이 이러한 모험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 줘야한다는 것도요.
하지만,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렇지만, 더 뛰어난 존재일수록 찬란해지는 동시에 타락 시 더 끔찍해진다는 것도요.
천사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게 되는 이유는 모르지만,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도 알려져 있습니다.
죄의 본질이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을 셀프가 있다, 자아가 있다, 자기가 있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죄의 본질은 자기중심성이라고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데,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돈다는 것이 그 이유에요.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자세가 죄를 벗어나기 위해선 자기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며, 타인을 아우르는 가치관을 가져야 해요.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아가 있다, 셀프가 있다, 자기가 있다'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는 역으로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죄의 본질의 원인이에요.
사탄의 유혹, 인간의 태도란?
사탄이 유혹한 유혹은 나 자신이 중심, 왕, 주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존재하여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 인간의 시도는 무의미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그분 자신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독교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다시 부르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다루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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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스크립트>
지금부터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ㅣ
이종태 한남대 교수, 『순전한 기독교』 『메시지 성경』 번역ㅣ잘잘법 123회
기독교의 신은 불편합니다. 왜 이 세상에 악이 그럼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냥 짠 하고 나타나시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에서 라디오에서 이 방송이 흘러나올 때면 사람들이 심지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잠시 대화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던 그런 방송이 있었습니다. 어떤 뉴스 방송이나 연예방송이 아니라 강연 프로였는데요. 그것도 기독교를 주제로 하는 그런 강연 프로였습니다. 강사는 CS 루이스라고 하는 당시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리키는 교수였습니다. 루이스 교수의 이 기독교 강연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은 루이스 교수는 당시에 전형적인 어떤 설교자나 그런 신학자들과는 달리 보통 사람들, 일반인들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그런 언어와 논리로 기독교를 논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이스의 이 방송 강연은 나중에 책으로 묶여서 나오게 되는데 그 책이 바로 20세기에 어찌보면 가장 유명한 기독교 신앙 개론소라고 할 수 있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 원서의 제목은 미어 크리스티나티라고 하는데요. 기독교의 정수, 기독교의 핵심, 기독교의 골자 그런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독교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독교 안에는 참 많은 교파들이 있죠. 서로 교리나 또 관습이 달라서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 것인데요. 루이스는 나는 이런 교파들 간의 어떤 신학적인 차이 이런 것들보다도 바로 이 공통 분모, 그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을 현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언어와 논리로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내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참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은 총 4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기독교는 대체 뭘 믿는 종교인가? 이 순전한 기독교 제2부의 내용을 여러분들한테 정리해 설명을 드려볼까 합니다. 신은 사실 없다..
왜 이 세상에 악이 그럼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냥 짠 하고 나타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악을 이겨낼 수 있는 힘, 용기, 그리고 희망 같은 것을 이 세상에서 살면서 얻어가게 된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대답입니다.
첫째는 신은 선과 악을 초월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은 선한 존재라고 얘기하기도 그렇고, 악한 존재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하고 어떤 신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뭔가를 선하다, 악하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의 판단이고 인간적인 구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신은 이런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판단, 인간적인 구분 위에 있는 어떤 신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범신론적인 신관이 사실 이런데요. 범신론이란 신과 이 세상을 거의 동일시하는 그런 사상이거든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신의 표현이고 또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신관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신의 개념이 인간적인 개념과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반면, 기독교, 회교, 또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의 사상은 신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상입니다.
신은 선악을 초월해 있는 어떤 무시무시하고 어떤 신비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입장이 분명하신 분, 캐릭터가 아주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분명히 미워하시는 그런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서술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은 불칼 같은 존재, 선을 사랑하시고 동시에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반드시 도려내고 말하겠다는 그런 작정을 하고 있는 그런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칼, 이 불칼은 사실 사랑의 칼인 거죠. 의사의 칼과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라면 그 환자가 아무리 부담스럽게 여기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할지라도 칼을 들이댈 거예요..
칼을 들이대서 그 환자에게 있는 환불을 암을 도려내고야 말겁니다. 그래야 그 환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다시 말해 기독교의 신은 하나님은 만사다, 오케이다, 모든 것이 다 좋다, 모든 것을 다 그냥 받아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하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으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너희는 이 세상에서 악의 편이 아니라 선의 편에 서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분이 바로 기독교가 믿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선한 신이 만들었다는 이 세상이 어떻게 그럼 나빠질 수 있었냐? 그 말은 선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대답을 설명해 주기 전에 먼저 루이스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에 악이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걸 알고 악이라는 것이 뭔지를 우리가 안다는 거잖아요. 근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악이라는 것이 뭔지를 어떻게 알까요? 루이스는 이런 예를 듭니다. 물고기는 축축하다는 게 뭔지 알까요? 네 모르겠죠? 물고기는 원래 그냥 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축축하다는 개념이 없을 겁니다. 물 바깥세계에 사는 생명체들이라야 축축하다는 게 뭔지 아는 거죠. 왜 물 바깥세계를 알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만약 이 세상이 그냥 원래부터 악하기만 한 곳이었다면 인간은 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예 몰랐을 것입니다..
악하다는 다시 말하면 선하지 않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선이 뭔지 아는 존재라야 악이 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악이 뭔지를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은 악의 바다 바깥세계를 알고 있는 존재고 사실은 원래 그 바깥세계에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을 되게 유리하게 느낀다는 것, 심지어 그래서 이 세상에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신이 과연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고 모든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그런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라는 것은 대체 왜 있는 것일까요? 아까 말했던 범신론에서는 이런 질문, 이 세상에 왜 악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사실 제기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왜냐하면 악이니 선이니 하는 그런 것들이 그냥 인간의 생각이지요. 사실 신의 관점에서는 진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 이런 심각한 질문이 제기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범신론은 선악의 문제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는 사상이 못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대단히 쉬운 대답을 제기하는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월론이라고 하는 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원론이라고 하는 것은 선신이 있고 또 악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신이 있고 선한신이 있고 그런 선신과 대등한 악신이 있어서 이 세상은 이러한 선신과 악신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영원한 전쟁터다 하는 그런 종교사상, 철학사상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있는지가 참 되게 명쾌하게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 선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쁜 것들, 악한 것들은 다 그 악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냥 원래 악은 있는 겁니다. 악이 있지 말라는 법이 없는 거죠. 악은 그냥 있는 겁니다..
문제가 쉽게 해결되죠. 그런데 기독교는 다르게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이런 이월론이 아니죠. 기독교는 선한신, 선신해진 하나님과 대등한 어떤 악신이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했는데 그 천사들 중에 일부가 타락을 해서 된 것이 바로 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인 거죠. 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은 나중에 생겨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적인 그런 세계관 내에서만 이 세상에 왜 악이 있냐 하는 것이 철학적인 문제 또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등하시고 선하신 분인데 왜 이 세상에 그럼 악이 있지 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또 거기에 대한 답이 요청이 되는 것이죠.
왜 이 세상에 악이 있는지에 대한 아까 얘기했던 그런 이월론은 사실 따지고 보면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둘 중에 어느 쪽을 선신이라고 하고 악신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어떻습니까? 그 두 신이 아니라 그 두 신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절대 기준을 우리가 상정하는 것이죠.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 신을, 절대적인 표준을 우리가 상정을 해서 그 표준에 비추어 어떤 신을 선신이라고 하고 또 다른 신을 악신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선과 악은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사실은 악은 선의 기생아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에서는 선악을 이야기할 때 악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선의 부재다. 하는 그런 생각인데요. 가령 어둠이 있지 않습니까?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어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빛이 없는 상태를 일컬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이 따름이죠. 마찬가지로 악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있지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고 선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우리가 악이라고 부를 따름인 것이죠. 악은 있지만 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악은 궁극적으로는 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이월론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이 싸우는 영원한 전쟁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이 세상에 합법적인 왕이 계십니다. 그런데 합법적인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어떤 일부 지역에서 말하자면 반란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그 반란은 반드시 언젠가 진압되고 말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들의 점령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온 우주의 합법적인 그 왕이 이 세상의 이 반란지역에 변장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또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침투를 해서 지금 이 세상에서 거대한 반란 진압 작전, 수복 작전을 지금 행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 거대한 수복 작전에 우리 모두가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죠. 본래는 좋았던 세상, 지금은 비록 나빠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소망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중심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까요? 기독교의 대표적인 답변은 우리가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리고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남용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세상에 이렇게 나쁜 것이 됐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또 불순종할 수도 있는 그런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인데요.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이지만, 사랑이나 기쁨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을 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어떻게 그렇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그런 컴퓨터가 있다면 그 컴퓨터의 사랑은 사실 진정한 사랑일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왜 감격이고 기쁨입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사랑해 주기로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기쁨이 있고 또 감격이 있는 거잖아요. 사랑을 받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랑을 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랑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기로 선택했다는 거기에 의미가 있잖아요? 자연 모든 만물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지만 오직 인간만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도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이런 인격적인 사랑과 이런 인격적인 사랑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을 우리 인간들도 맛보고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또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평온한 사랑조차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런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어떻게 말해보면 하나님이 일종의 모험을 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모험을 하신 것이 좀 무모하다 이렇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이런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런 모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셨고, 또 우리가 이 후에 보겠지만 이런 모험에 따르는 대가를 스스로 또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좀 뭔가 지금보다 더 탁월한 어떤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네, 그렇지 않습니다..
더 탁월한 존재일수록 더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진 창조물일수록 그것이 타락하지 않으면 더 찬란한 존재가 되지만 타락하면 더 끔찍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지음받는 존재가 어떤 의미에서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사가 타락하면 마귀가 됩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천사의 타락이 먼저 있었다고 우리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천사는 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루이스는 우리 인간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아까 얘기했던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을 우리가 달리 한번 표현해 보면 '인간에게 셀프가 있다, 자아가 있다, 자기가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는 셀프가 있기 때문에 self-centered, 자기중심적인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죄의 본질은 자기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거죠, 내가 중심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 모든 너, 모든 상대, 모든 타자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으로 여기고 또 취급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즉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죠. 자기가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처럼 되겠다 하는 그런 자세입니다.
아담과 에바가 악마에게 유혹을 당할 때, 악마가 너는 하나님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유혹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라, 되겠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또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즉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겠다는 그런 자세를 말하는 거죠. 진정한 중심, 진정한 주인,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존재가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런 시도를 가리켜 가망 없는 시도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우리가 인간 역사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즉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겠다는 인간의 시도가 이렇게 가망 없는, 부질 없는 시도인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사실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루이스는 참 적절한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동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그렇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마치 네모난 삼각형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이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세상과 인생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보고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하셨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이죠.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루이스는 네 단계에 걸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양심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이런 양심이 더 예리해집니다. 불칼 같으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가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의 소리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인간들이 있었고, 하지만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100% 충실했던 인간은 없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두 번째 일은 루이스가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잘 들어보지 못하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가 좋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세계 많은 민족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신화가 있습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는데요, 그 신적인 존재가 모종의 죽음과 모종의 부활을 겪게 되고 그런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민족의, 그 나라의, 또 그 부족의 어떤 하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그런 패턴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우리 기독교의 이야기와 유사하죠.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세계 도초에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이렇게 예수님 이야기하고 유사한 그런 신화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더 이야기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화는 일종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꿈,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 바로 신화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칼룡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적이 있죠. 그러니까, 인류의 신화라고 하는 것은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는 인류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꾼 어떤 꿈이라고 인류가 꾼 꿈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닮은 그런 신화 이야기들이 바로 그런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시기 전에 유대인들에게는 먼저 율법을 보내주셨습니다. 근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가르쳐주는 손가락 싸인 같은 것이었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한테는 이렇게 신화를 보내주셔서 특별히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하는 그런 이야기를 꿈꾸게 만들어 주셔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토를 가르쳐주는 손가락 역할을 하게 해주셨다는 것이죠..
장차 실제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일정의 전조, 암시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말하자면,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인데, 그렇게 신화가 사실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토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사건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다시 말해보면 이렇게 얘기해 볼 수 있습니다. 꿈 같은 일이 정말 참말로 현실이 되었다. 인류가 꿈꾸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토 안에서 현실이 된 것이죠.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신 세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속에 진짜 하나님은 진짜 신은 어떤 신인지 하는 그런 신관을 그들에게 머릿속에 심어준 것이라고 루이스는 얘기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 대다수는 아무튼 모종의 신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대개 신을 그저 무시무시하고 어떤 신비로운 존재라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그런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통해서 진짜 신, 진짜 하나님은 어떤 무시무시하고 그런 초월적인 분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 땅에서의 인간 사회의 정의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을 보면 그저 성전에서 인간들이 제사를 드릴 때나 예배를 드릴 때 그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신은 이 땅에서의 사회의 정의와 이웃사랑 실천을 그런 종교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죠. 이스라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예언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다가 급기야 나라가 망하고 또 성전이 허물어지는 그런 혹독한 심판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신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루이스 당시에도 유럽의 많은 지성인들, 또 지금도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사실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명시적으로 말한 바는 없다면서 예수님을 인류의 어떤 위대한 스승으로는 여기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한 말씀에 우리를 주목시키는데요. 바로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루이스는 이런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령 제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는데 어떤 죄삼자가 저한테 와서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거든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짓는 모든 죄는 어떻습니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라,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거라는 거죠. 루이스는 예수님을 그저 어떤 훌륭한 어떤 위인 정도로밖에 생각을 못하는 그런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그들을 코너로 몹니다.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을 하셨다. 그러면 이 주장은 참이거나 아니면 거짓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죠. 근데 만약 거짓이라면 어떻습니까? 거짓이라면 또 둘 중에 하나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을 했거나 아니면 예수님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잘못 생각했거나. 전자의 경우라면 어떻습니까? 전자의 경우라면 예수님이 아주 인류 최고의 그런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죠..
후자의 경우라면 어떻습니까? 후자의 경우라면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겠죠. 아니면 나머지 유일한 남아있는 선택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주님이시거나 이 세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신, 당신이 보기에 예수님이 사기꾼 같은가? 아니죠 그건 아니죠. 당신 보기에 예수님이 그런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는가? 그것 역시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경배해야 된다는 그런 말씀인 거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좋은 점도 있어 보이는데 훌륭한 말씀도 하시긴 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이래, 자기가 신이래' 그럼 그 사람은 우리가 훌륭한 사람으로만 여길 수 있지 않겠죠? 그러니까 루이스는 당대 그런 유럽의 지성인들한테 예수님을 그런 훌륭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는 그런 어정쩡한 태도가 역사적 기독교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 논리가 어떻습니까? 루이스를 좋아하는 분들 중에도 이 논리는 좀 우악스러운 것 같다 느끼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루이스의 논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분명한 것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구약의 예언자들 그 이상이신 분으로 인류의 위대한 그런 스승들 그 이상이신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여 우리의 주님이신 분으로 고백하는 그런 신앙 고백,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 고백하는 신뢰 고백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과 의미를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오신 목적은 인류에게 어떤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오신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류에게 어떤 좋은 가르침, 굿 어드바이스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굿 유스, 복음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굿 어드바이스라는 게 뭘까요? 가령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뜻의 어드바이스 티칭인 거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말, 사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문제는 어떻습니까? 그 좋은 말을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잖아요. 그렇게 서로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해서 인류가 서로 미워하며 그렇게 지옥 구덩이에 빠져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부활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신 것이라는 것이죠. 어떤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어떤 엄청난 일을 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일으키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하는데요, 복음을 영어로 얘기하면 'good news'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good news'란, 있을 수 없는 일,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엄청난 사건이 이 땅에 벌어졌다는 그 얘기입니다.
어떤 일인가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 어떻습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하나님이 의로 오신 하나님께서 의로 오지 못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서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죽고 또 부활하셨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기독교는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어야만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이 땅에 들어온 것이죠. 근데 그 죽음의 힘, 사망 곤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력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예수님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기독교의 핵심을 믿지만 또 더 나아가서 이것을 한 번 이해도 해보고 싶어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예수님의 죽음이 왜 이런 특별한, 이런 엄청난 효과, 능력을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냐, 그 사실을 한 번 이해도 해보고 싶은 것이죠. 여러 가지 설명과 이론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는데, 죄를 지었으면 인간은 죽어야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에 대한 벌로서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그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해 주심으로써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셨다. 이러한 사실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런 효과를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이론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루이스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특별한 효과를 갖게 되는지 설명해주는 다양한 이론들 그 자체로는 기독교가 아니며,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가 기독교입니다. 루이스는 기독교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하며, 회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것이 구원입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인류의 스스로의 힘으로는 쉽게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회계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돌아간다 하는 말처럼 그냥 말이 되지 않은 말이죠. 회계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여러분, 그렇다면 회계가 뭘까요? 중요한 것은 회계의 본질은 사실 항복이라는 거예요. 항복,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단순히 개선될 필요가 있는, 어떤 불완전한 그런 연약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아야 되는, 그런 반역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 이해가 여기까지 가야 사실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고 중심이신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잖아요. 내가 주인이고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중심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말하자면 '아, 내 속에는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기독교적인 인간관의 죄에 대한 사상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계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 반역 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의 한 지체인, 한 일부분인 내 몸 안에 내 영혼 안에 새겨져 있는, 베어져 있는 그런 고집과 그런 자만과 죄를 도려내는 일종의 죽는 것 같은 그런 죽은 것 같은 무엇이란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되는, 내가 내 뜻을 꺾고 내가 죽어야 되는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회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계를 인간의 자연적인 자아가 싫어하는 거죠, 죽기처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 딜레마가 있습니다. 인간은 회계해야 되는데 회계할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사실 나쁜 인간일수록 회계할 필요성은 더 커지는데, 회계할 능력은 더 줄어들어요. 자기 뜻을 꺾고 자기를 죽이는 내가 죽는 그런 거룩한 죽음을 죽는 것이 회계인데, 인간은 나빠질수록 이런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능력이 더 줄어들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가 할 수 있겠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도와주신다는 것이 사실 기독교의 복음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서 어떻게 도와주실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도와주신다 하는 것은요,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살 때도 많지만 우리 인간도 가끔은 생각다운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근데 이거는요,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이성, 그걸 로고스라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이성인 그 로고스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빌어서 생각다운 생각을 가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겁니다.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가끔은 그래도 진짜 사랑다운 사랑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넣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 나뉘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 사랑을 빌려서 그 사랑을 힘입어서 우리 인간이 사랑다운 사랑을 조금 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달리 표현하면 우리 하나님 안에는 어떤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이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태평양 바다가 있는데 그 바다의 물방울이 조금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떡 떨어지면 인간이 이성적인 생각을 조금 해볼 수 있는 거예요. 또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안에는 거대한 태평양 바다와 같은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의 물방울이 우리 조금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떨어지면 인간이 빌려서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 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도움이 있잖아요. 인간은 죽어야 돼요. 내 뜻을 꺾고 내가 죽어야지 할 때 그런 죽음을 인간이 죽어야 되는데 근데 어떻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본래는 이런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가 죽어야지 하실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렇죠? 하나님 안에는 이런 죽음이 원래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루이스는, 루이스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이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죽으셨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심을 통해서 말하자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죽음이라고 하는 그런 태평양 바다가 생겨난 거예요. 그 바다의 물방울이 인간의 의지에 똑 떨어지면 우리 인간도 전에 하지 못했던 일, 바로 내가 죽는. 내 힘으로는 내가 죽을 수 없는데, 내 뜻을 꺾을 수가 없는데 예수님의 죽음을 힘입어, 그 죽음을 빌려서 내가 그런 거룩한 죽음을, 회계라고 하는 그런 거룩한 죽음을 죽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목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렇게 루이스는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내가 죽을 때, 사실은 역설적으로 내가 죽을 때 사실은 인간은 진정으로 참으로 살게 된다.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과 영성이 가르치는 그런 역설적인 진리인 것이죠.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어떤 좋은 가르침을 따라 하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겨난 이러한 새로운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그 생명의 힘을 빌려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바로 기독교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 땅에서부터 벌써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스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요.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넘어집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그리스토의 생명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넘어지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힘입어 우리가 다시 일어나는 이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토인들은 성숙해지고 이런 성숙해질수록 그리스토인은 더욱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더욱 가깝게 됩니다..
이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 내 안에 있는 선은 사실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토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성숙한 그리스토인들이 믿고 경험하는 말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선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문에 나를 점차 더 선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시는 그 날은 아니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미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고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적인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시고 사람의 세계에 침투하여 벌이고 계신 위대한 수복 작전에 우리는 동참해 왔습니다. 그리고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입니다. 루이스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지금 이렇게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것이죠. 회개할 기회를 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각자의 삶과 목숨을 하나님이 연장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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